목차
1. 남사당패의 기원과 현대적 역할
2. 남사당패의 구성
3. 남사당패의 놀이
4. 남사당패 주요인물
5. 안성 바우덕이 축제
2. 남사당패의 구성
3. 남사당패의 놀이
4. 남사당패 주요인물
5. 안성 바우덕이 축제
본문내용
아들 모두가 남사당패의 후계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한다.
(2) 양도일
양도일은 장구의 명수이다.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장구 가락과 쇠가락에 정통한 인물로서 그의 제자가 적지 않다. 양도일은 집에서 나온 후, 어떤 사람의 꼬임으로 유량 생활을 하다가 남사당이 되었다. 양도일은 매호씨나 악사로서 널리 이름을 날렸다.
양도일이 가르친 제자로는 김덕수, 박은하, 남기문 등이 있다. 양도일은 설장구의 가락 가운데 웃다리가락을 남겼다.
(3) 송순갑
남사당패 행중의 일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솟대쟁이패 출신으로, 솟대쟁이패는 경상도 진양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데, 솟대를 세워서 줄을 매달고, 그 위에서 재주를 보이는 놀이패다. 송순갑은 살판쇠로 남사당패에 들어가 유일한 연희자가 되었고, 그 후 살판쇠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4) 최은창
최은창은 본디 남사당패에 있었던 인물이다. 이원보행중에서 굿을 배우고, 걸립도 하고, 고사소리도 하고 다니며, 가락을 배우고 기예를 익혔다. 또한 남운룡행중에도 몸담았는데, 남운룡, 양도일 등과 어울려서 지냈다. 취은창은 남운룡행중과 결별하고서, 평택농악 기능보유자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현재의 사물놀이패와도 인은이 깊은데,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등을 어릴 적부터 데리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들의 성실성과 노력을 높이 샀다고 한다.
(5) 김기복
김기복은 두렁쇠이기도 하고 쓴쇠이기도 하다. 해방된 이듬해부터 6.25가 나더 sgorK지 이원보행중에서 쇠를 치며 따라다녔다고 한다. 판제에 대한 기억과 지도력이 확실하고 상쇠놀음 또한 명쾌하리 만큼 잘 구사하고 있다. 김기복을 중심으로 한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가 1989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5. 안성 바우덕이 축제
안성 바우덕이 축제 공식 홈페이지에서 바우덕이를 소개한 글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서구문화로부터 우리 대중문화예술의 원류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의 대중문화 예술은 서구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민중 예술을 통해서 발전해 온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대중문화의 원류를 찾는 중심점 에서는 항상 사당패가 자리잡는다. 그리고 바우덕이라는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가 사당패를 대표한다. 즉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개척한 인물로서 연예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조선후기 신재효에 의하여 재정립된 판소리는 우리 음악의 중요한 부분이 였으나 민중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연예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개성 있는 인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연희 자체의 형식과 참여에 있어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전승된 궁중음악인 아악이 있지만 종묘제례에 쓰이는 것일 뿐 대중문화와 연관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당패 중에서도 안성남사당 패에는 바우덕이라는 특별한 영혼과 능력을 갖춘 개성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탁월한 능력으로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어 사기가 떨어진 많은 공역자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이렇게 하여 엄청난 규모의 경복궁 중건사업은 잘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아마 바우덕이가 없었다면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바우덕이가 공연을 할 때는 얼마나 신명이 났던지 공역자들은 등짐에 짐도 지지않고 분주히 뛰어다니며 \'얼수 얼쑤\' 흥을 어우르기만 했다는 일화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감흥과 신명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의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이였다. 민중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대중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에, 대중문화 특히 연예의 힘인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잡단인 안성 남사당패에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남사당패 영기에 걸어준 옥관자였다.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벼슬을 받은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절을 드렸다. (만장기를 숙여서 예의를 표시함) 고 하는데 당상관에 대한 예우의 사정을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전국 공연단체 중에서 대장 역할을 담당한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 패는 전국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 남사당패는 \"바우덕이\" 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우덕이가 왔다\" \"바우덕이다\" 로 불렸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름의 대중화는 우리나라 문화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바우덕이의 천부적인 예술적 능력과 스타기질이 이러한 유행어를 파생 시킨 것이다. 대중예술의 특징, 특히 연예의 특징은 스타가 있다는 것이다. 스타는 이름으로 불린다. 스타는 관중을 몰고 다닌다. 스타는 관중과 대중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다.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타로서 인정을 받는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 가 왔다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남사당패가 사당패, 일견 여사당패라고 불리는 유랑 예인집단과 반대되는 집단, 남성중심적인 집단이라는 점을 볼 때, 바우덕이의 뛰어남이 얼마나 됐을지 공감이 간다.
안성 남사당패 축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름인 것 같다. 여러 후배들과 함께하기는 했으나, 오랜만에 하는 문화 경험이었던 듯 하다. 보기만 해도 너무도 어려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하던 재주들, 매호씨(지금에서야 제대로 알았지만)와 온갖 재담을 나누면서 줄을 건널 때는 긴장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던 그 아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아쉬웠던 점은 기대했던 꼭두각시놀음이 생각보다 짧게 진행되었던 것이었다.(전통연희론 수업에서 동영상으로 본적이 있기에 그러하다.)
<참고문헌>
심우성, “남사당패 연구”, 동화출판사, 1978
서연호, “한국전승연희학 개론”, 연극과 인간, 2004
김헌선, “사물놀이 이야기”, 풀빛, 1995
이형영, “사물놀이”, 학민사, 2004
(2) 양도일
양도일은 장구의 명수이다.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장구 가락과 쇠가락에 정통한 인물로서 그의 제자가 적지 않다. 양도일은 집에서 나온 후, 어떤 사람의 꼬임으로 유량 생활을 하다가 남사당이 되었다. 양도일은 매호씨나 악사로서 널리 이름을 날렸다.
양도일이 가르친 제자로는 김덕수, 박은하, 남기문 등이 있다. 양도일은 설장구의 가락 가운데 웃다리가락을 남겼다.
(3) 송순갑
남사당패 행중의 일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솟대쟁이패 출신으로, 솟대쟁이패는 경상도 진양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데, 솟대를 세워서 줄을 매달고, 그 위에서 재주를 보이는 놀이패다. 송순갑은 살판쇠로 남사당패에 들어가 유일한 연희자가 되었고, 그 후 살판쇠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4) 최은창
최은창은 본디 남사당패에 있었던 인물이다. 이원보행중에서 굿을 배우고, 걸립도 하고, 고사소리도 하고 다니며, 가락을 배우고 기예를 익혔다. 또한 남운룡행중에도 몸담았는데, 남운룡, 양도일 등과 어울려서 지냈다. 취은창은 남운룡행중과 결별하고서, 평택농악 기능보유자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현재의 사물놀이패와도 인은이 깊은데,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등을 어릴 적부터 데리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들의 성실성과 노력을 높이 샀다고 한다.
(5) 김기복
김기복은 두렁쇠이기도 하고 쓴쇠이기도 하다. 해방된 이듬해부터 6.25가 나더 sgorK지 이원보행중에서 쇠를 치며 따라다녔다고 한다. 판제에 대한 기억과 지도력이 확실하고 상쇠놀음 또한 명쾌하리 만큼 잘 구사하고 있다. 김기복을 중심으로 한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가 1989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5. 안성 바우덕이 축제
안성 바우덕이 축제 공식 홈페이지에서 바우덕이를 소개한 글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서구문화로부터 우리 대중문화예술의 원류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의 대중문화 예술은 서구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민중 예술을 통해서 발전해 온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대중문화의 원류를 찾는 중심점 에서는 항상 사당패가 자리잡는다. 그리고 바우덕이라는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가 사당패를 대표한다. 즉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개척한 인물로서 연예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조선후기 신재효에 의하여 재정립된 판소리는 우리 음악의 중요한 부분이 였으나 민중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연예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개성 있는 인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연희 자체의 형식과 참여에 있어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전승된 궁중음악인 아악이 있지만 종묘제례에 쓰이는 것일 뿐 대중문화와 연관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당패 중에서도 안성남사당 패에는 바우덕이라는 특별한 영혼과 능력을 갖춘 개성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탁월한 능력으로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어 사기가 떨어진 많은 공역자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이렇게 하여 엄청난 규모의 경복궁 중건사업은 잘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아마 바우덕이가 없었다면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바우덕이가 공연을 할 때는 얼마나 신명이 났던지 공역자들은 등짐에 짐도 지지않고 분주히 뛰어다니며 \'얼수 얼쑤\' 흥을 어우르기만 했다는 일화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감흥과 신명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의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이였다. 민중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대중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에, 대중문화 특히 연예의 힘인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잡단인 안성 남사당패에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남사당패 영기에 걸어준 옥관자였다.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벼슬을 받은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절을 드렸다. (만장기를 숙여서 예의를 표시함) 고 하는데 당상관에 대한 예우의 사정을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전국 공연단체 중에서 대장 역할을 담당한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 패는 전국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 남사당패는 \"바우덕이\" 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우덕이가 왔다\" \"바우덕이다\" 로 불렸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름의 대중화는 우리나라 문화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바우덕이의 천부적인 예술적 능력과 스타기질이 이러한 유행어를 파생 시킨 것이다. 대중예술의 특징, 특히 연예의 특징은 스타가 있다는 것이다. 스타는 이름으로 불린다. 스타는 관중을 몰고 다닌다. 스타는 관중과 대중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다.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타로서 인정을 받는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 가 왔다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남사당패가 사당패, 일견 여사당패라고 불리는 유랑 예인집단과 반대되는 집단, 남성중심적인 집단이라는 점을 볼 때, 바우덕이의 뛰어남이 얼마나 됐을지 공감이 간다.
안성 남사당패 축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름인 것 같다. 여러 후배들과 함께하기는 했으나, 오랜만에 하는 문화 경험이었던 듯 하다. 보기만 해도 너무도 어려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하던 재주들, 매호씨(지금에서야 제대로 알았지만)와 온갖 재담을 나누면서 줄을 건널 때는 긴장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던 그 아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아쉬웠던 점은 기대했던 꼭두각시놀음이 생각보다 짧게 진행되었던 것이었다.(전통연희론 수업에서 동영상으로 본적이 있기에 그러하다.)
<참고문헌>
심우성, “남사당패 연구”, 동화출판사, 1978
서연호, “한국전승연희학 개론”, 연극과 인간, 2004
김헌선, “사물놀이 이야기”, 풀빛, 1995
이형영, “사물놀이”, 학민사, 2004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