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의 역사 [전통주 VS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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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서론

▶ 본론
Ⅰ. 술의 역사
1. 술의 어원
2. 신화․전설 속의 술의 유래
3. 최초의 술의 유래
4. 사실적으로 본 술의 유래
5. 술의 역사(삼국시대~조선시대)
(1) 고구려시대의 술
(2) 백제시대의 술
(3)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술
(4) 고려시대의 술
(5) 조선시대의 술
Ⅱ. 주세령의 발포와 영향 - 일제시대
1.일제 치하 이전의 술 문화
2.일제 치하의 우리 술의 현실
(1) 주세령(酒稅令)의 시행
(2) 주세령(酒稅令) 시행의 영향
(3) 주류 소비 경향의 변화
Ⅲ. 해방이후의 현실
1. 해방 이후 "전통주"의 현실적 한계성과 그 배경
2. 소주의 역사와 발전
3. 전통주와 소주의 현주소

▶ 결론

본문내용

후 각 가정에 먹을 쌀도 없는 상황에서 술을 만들어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특히, 이전부터 서민들에게 널리 음용(飮用)되던 막걸리의 경우는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꾸준히 서민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으나, 1964년의 양곡관리법(糧穀管理法) 시행 이후 큰 타격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쌀로 빚어야 제 맛을 내던 막걸리를 우리의 전통 재료인 쌀이 아닌, 밀이나 고구마 등으로 빚어야 했으므로 막걸리가 서민들에게 외면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일제시대 이후 서민들에게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하던 희석식(稀釋式) 소주는 앞서 말한 양곡관리법(糧穀管理法)시행을 기점으로, 몇몇 준비된 회사들에 의해 대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진로소주, 삼화소주 등.
본래 우리 술은 대량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각 고을 마다 있던 양조장에서 소량으로 생산되어지던 것이었는데, 희석식(稀釋式) 소주 공장이 들어서고 이 방식으로서 대량으로 만들어지면서, 밀 막걸리 등 맛없는 막걸리를 외면하던 서민들에게 있어 희석식(稀釋式) 소주는 막걸리의 대체자(對替者)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에 소주가 대량으로 만들어지면서 값싼 원료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가격 또한 서민들이 마시기 적당하였으니, 서민들에게는 그만한 술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소주 가격은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면서 서민들의 시름과 애환을 잊게 해주는 명목 하에, 가격을 올리지 못하게 하여 그 값이 유지된 채 서민들이 부담 없이 즐겨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60~80년대에 실시했던 "심야통행금지령"이나 "심야영업금지"정책을 통해 그 현상이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 우리의 전통술인 막걸리는 대중들로부터 계속적으로 외면을 받아왔고, 그 자리를 대신한 소주는 대량화(大量化)· 기업화(企業化) 되었고, 다양한 마케팅 전략과 함께 그 종류 또한 다양화(多樣化)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결론
조선말, 빠르게 변모하는 국제정세의 흐름 속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대한제국의 종말과 더불어 조선총독부에 의한 일제의 수탈작업이 시작되었다. 일제는 1907년 7월에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주세령 공포로 제일 먼저 주세를 세금원의 대상으로 삼고, 같은 해 8월에는 주세령 시행규칙 공포가 있었다. 또 9월에, 주세령(酒稅令)의 강제 집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전통주는 맥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1916년 1월에는 주류 단속이 강화되는 가운데, 전통주류는 약주, 막걸리, 소주로 획일화시켜 우리의 전통 고급주를 사장시켰고, 1917년부터는 주류 제조업 정비가 시작되면서 자가 양조를 전면적으로 금지, 각 고을마다 주류 제조업자를 새로이 배정하였다.
1930년대에는 집에서 담그는 술 제조는 거의 사라지고, 이에 따라 각 지방에서의 비법도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일본은 주세징수에만 중점을 두어 품질개량은 소홀히 하고, 일본 청주의 범람으로 우리의 탁, 약주는 전혀 개량되지 못했다. 이로써 우리의 주류문화는 침몰되는, 주조사(酒造史)를 기록하게 되었다. 1945년 광복 후에도 일제치하의 주세 행정이 그대로 이어져, 다양했던 전통 주류는 "잠적"을 거듭하였다. 특히 우리의 막걸리는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이유로, 쌀 대신에 잡곡을 재료로 사용토록 하였고, 이로 인한 맛의 저하로 우리의 입맛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희석식 소주가 현대의 대표적인 국민의 술로 자리잡아 가게 된 것이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술 문화는 취하도록 마시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술 문화는 본래 술은 대체로 귀족들의 전유물이며, 풍류의 차원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서민들을 위한 술집이 발생한 이래 서민들도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러다 일제에 와서, 나라를 잃은 울분에 술을 마시게 되고, 일제가 술을 막걸리와 소주로 획일화시키면서 우리의 전통주는 거의 말살 당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어서는 일제치하의 여파로 《고급주-양주, 서민주-소주》라는 공식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1960~70年代의 암울한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우리의 술 문화도 많은 악습들을 남기게 되었다. 술을 "하나의 인간관계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이와는 반대로 집단의식 속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잔 돌리기, 폭탄주, 집단음주, 그리고 뒤풀이 문화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충분조건"으로 생각한다는 좋지 않은 면도 많다는 것이다. "하나의 탈출구"나 "자유" 또는 "술을 만취하도록 마심으로써 진정한 성인이 되었다"는 사고방식 또한 현대 술 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사회적, 역사적 관계 속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한국인의 술 문화는 우리생활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고 단순한 '술'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우리의 술 문화는 우리민족의 정(情)과 한(恨)의 정서, 집단주의, 권위주의, 획일주의와도 관계가 깊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술을 간단히 마시기보다, 많은 양을 만취하도록 마시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에 들어 많이 바뀌고 있지만, 아직까지 술 문화는 우리에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역사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 술 문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봄으로서 좀 더 주체적이고 생산적인 문화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기성세대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술 문화를 이어주어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참고문헌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 조정형. 서해문집. 1997.
『우리 술 빚는 법』. 박록담. 오상. 2002.
『전통주』. 박록담. 대원사. 2004.
『(우리나라)술의 발달사』. 정동효. 신광. 2004.
『한국인에게 밥은 무엇인가』. 최준식. 휴머니스트. 2004.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 - 조세정책을 중심으로』. 정태헌. 역사비평사. 1998.

키워드

,   전통주,   소주,   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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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7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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