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생애와 시대적 상황
1)安鼎福의 生涯
2)시대적 상황
Ⅲ. 安鼎福의 東史綱目
1) 東史綱目의 편찬과정
2) 東史綱目의 체제와 내용
3) 東史綱目에 나타나는 歷史認識
Ⅳ. 맺음말
<참고문헌>
Ⅱ. 생애와 시대적 상황
1)安鼎福의 生涯
2)시대적 상황
Ⅲ. 安鼎福의 東史綱目
1) 東史綱目의 편찬과정
2) 東史綱目의 체제와 내용
3) 東史綱目에 나타나는 歷史認識
Ⅳ.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께 功利的 사고도 가지게 만들었다. 여기서 만주를 차지했던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등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고대국가의 강토를 재점검하려는 역사 지리적 연구가 일어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영 정조시대로 탕평책을 써서 붕당을 잠재운 시대로서 왕조의 중흥이 도래했다. 특히 18세기 중반이후 호란의 충격이 진정되며 청과의 관계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청이 강희 건륭제를 거치며 전성기를 맞자 청을 국가와 문화라는 두 가지 잣대로서 보게 되어 한인 정신문화와 기술문화를 개방적인 자세로 수용하고자 하는 북학이 일어났다. 이는 후에 국가정책으로도 수용되어 18세기 왕조중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역사서술에도 약간의 당색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명분론이 약화되며 역사를 고증적으로 해석하려는 풍조가 지배했다.
동사강목에 나타나는 역사인식
東史綱目 편찬은 기본적으로 성리학 사상에 바탕을 두고, 또한 윤리도덕사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사를 철저하게 우리나라 역사중심으로 체계화하고, 특히 단군조선 이후 삼국병립 이전까지 우리나라 상고사를 계통적으로 서술한 점은 주목할 만 하다. 더불어 지금 중국영토인 만주일대가 우리나라의 옛 강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요동에 대한 失地回復(실지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는 점, 그리고 철저한 바다를 방어하고 변방을 지킴
海防邊禦(해방변어)를 주장한 것 등을 비추어 볼 때, 그의 東史綱目 편찬에는 중국에 대한 견제심리가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安鼎福이 역사서술을 통하여 나타낸 자주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그의 자주의식에서는 대외 개방적이고 진보주의적인 측면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東史綱目은 자주의식과 正統論, 한국사의 주체적 인식으로 歷史認識을 크게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자주적 역사인식은 安鼎福의 고이(考異)와 지리고(地理考)에 나타는 고증작업을 통해 알 수 있다. 東史綱目은 통계, 찬역, 시비, 충절의 문제를 다루어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증의 문제를 치밀하게 다루어 완성도 높은 저술이 되었다. 東史綱目이 후대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도 이러한 고증의 측면 역사고증은 유형원과 이익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안정복이 유형원의 저술을 초록하여 엮은 『동사례(東史例) 』와 지리지『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가 특히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 강세구,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 연구』,혜안, 1996, p.170
때문이었다. 그는 상고에서부터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사실들을 새 자료에 의해 보완하고 나아가 이설들을 새롭게 고증하고, 보충설명이 필요한 부분에는 주를 달아 기록하여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역사를 연구하는 자는 반드시 강역을 정한 연후에야 점거(占據)실태를 알 수 있고, 전벌(戰伐)의 득실을 살필 수 있으며, 분합(分合)의 연혁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지리고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지리고증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地理考」의 작성, 수권의 역사지도의 작성 등으로 표출되었다. 그가 東史綱目 부록으로 地理考를 작성하게 된 데에는 역사에 있어 선결과제가 강역의 확장이라는 평소의 지론과 이전 사서에 나타는 지리고증의 오류에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되었다.
地理考를 통해 그는 요동지역을 단군조선 기자조선 부여의 강역으로 비정하고 국경 문제 등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요동을 천하의 요충지로 인식하고, 우리나라 단군 기자의 옛 영토인 요동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 약소국이 된 중요한 원인으로 보았다. 여기서 安鼎福의 북방에 대한 관심은 방어
동사강목에 나타나는 역사인식
東史綱目 편찬은 기본적으로 성리학 사상에 바탕을 두고, 또한 윤리도덕사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사를 철저하게 우리나라 역사중심으로 체계화하고, 특히 단군조선 이후 삼국병립 이전까지 우리나라 상고사를 계통적으로 서술한 점은 주목할 만 하다. 더불어 지금 중국영토인 만주일대가 우리나라의 옛 강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요동에 대한 失地回復(실지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는 점, 그리고 철저한 바다를 방어하고 변방을 지킴
海防邊禦(해방변어)를 주장한 것 등을 비추어 볼 때, 그의 東史綱目 편찬에는 중국에 대한 견제심리가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安鼎福이 역사서술을 통하여 나타낸 자주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그의 자주의식에서는 대외 개방적이고 진보주의적인 측면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東史綱目은 자주의식과 正統論, 한국사의 주체적 인식으로 歷史認識을 크게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자주적 역사인식은 安鼎福의 고이(考異)와 지리고(地理考)에 나타는 고증작업을 통해 알 수 있다. 東史綱目은 통계, 찬역, 시비, 충절의 문제를 다루어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증의 문제를 치밀하게 다루어 완성도 높은 저술이 되었다. 東史綱目이 후대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도 이러한 고증의 측면 역사고증은 유형원과 이익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안정복이 유형원의 저술을 초록하여 엮은 『동사례(東史例) 』와 지리지『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가 특히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 강세구,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 연구』,혜안, 1996, p.170
때문이었다. 그는 상고에서부터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사실들을 새 자료에 의해 보완하고 나아가 이설들을 새롭게 고증하고, 보충설명이 필요한 부분에는 주를 달아 기록하여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역사를 연구하는 자는 반드시 강역을 정한 연후에야 점거(占據)실태를 알 수 있고, 전벌(戰伐)의 득실을 살필 수 있으며, 분합(分合)의 연혁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지리고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지리고증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地理考」의 작성, 수권의 역사지도의 작성 등으로 표출되었다. 그가 東史綱目 부록으로 地理考를 작성하게 된 데에는 역사에 있어 선결과제가 강역의 확장이라는 평소의 지론과 이전 사서에 나타는 지리고증의 오류에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되었다.
地理考를 통해 그는 요동지역을 단군조선 기자조선 부여의 강역으로 비정하고 국경 문제 등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요동을 천하의 요충지로 인식하고, 우리나라 단군 기자의 옛 영토인 요동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 약소국이 된 중요한 원인으로 보았다. 여기서 安鼎福의 북방에 대한 관심은 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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