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겠습니다. <순암선생문집 제 3권> ‘소남윤장의 별지에 답함’
우리나라 통사를 재구성한 것이고, 둘째는 한백겸 이래 서울 실학의 특징인 고증적 역사연구방법을 계승하여 역사지리의 여러 의문점을 고증하여 논문 형식인 <논변>으로 부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주자의 강목법은 범례가 매우 까다롭고 그만큼 서술 원칙이 복잡하다. 도덕적 원칙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용어를 구별해서 서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왕의 역사서들은 강목법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범례를 엄격하게 채용하지 않았다. 임상덕은 특히 유계의《여사제강》이 강목법을 철저히 따르지 않은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100여조의 범례를 두어 한층 강목법에 충실하려고 했다.
임상덕이 재구성한 한국사체계는 통일신라와 고려의 후삼국통일 이후만을 정통(正統)으로 인정하고 고조선과 삼한은 기록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정통에서 제외했으며 삼국시대는 무통(無統)의 시대로 처리했다. 말하자면, 민족이 통일된 시대만을 정통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통론은 기자-마한-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홍여하의 정통론과 다르다.
다음으로 이 책은 중화와 이적을 엄밀하게 구별하여 금이나 원 등 북방족에 사대한 것은 큰 수치로 평가하고 반다로 수, 당, 송, 명과 같은 중화국가에 대한 관계는 군신(君臣), 혹은 부자(父子) 관계로 설정하고 서술했다. 그리하여 수, 당이 고구려를 침략한 것을 정토(征討)라 쓰고 이적국가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경우에는 침략(侵掠) 혹은 구(寇)라고 썼다. 또 우리가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도 명분에 어긋나는 일고 간주하여 삭제했다.
이렇듯 중화를 극도로 높이려는 서술태도는 우리나라를 철저히 제후로 자리매김하는 의미가 있지만 당시로서는 중국에 중화가 없었고 제후였던 우리만이 유일한 중화로 남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청에 대한 적개심을 높이는 데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었다.
《동사회강》이《여사제강》과 다른 점은 고려 말의 서술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여사제강》은 조선건국을 ‘권신에 의한 찬탈’로 서술하여 후세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임상덕은 조서의 건국이 천명을 따른 거사였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끝으로, 이 책에 실린 논변(論辯)은 모두 7조로서 강목법의 원칙과는 달리 순수고증적인 글이다. 여기서는 본문에서 다루지 않은 기자(箕子)·삼한(三韓) 등의 사실을 다루었다. 특히 《기자봉조선지변(箕子封朝鮮之辯)》에서는 기자의 수봉설(受封說)을 부인하여 기자는 주왕(周王)의 신하가 아니라고 논증하였다. 《사기》 미자세가(微子世家)에,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하였고, 《서경(書經)》 홍범대전(洪範大傳)에,
“무왕(武王)이 은(殷)을 이기고 갇혀 있는 기자를 석방하니, 기자는 주(周) 나라의 석방을 차마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여 조선으로 달아났는데, 무왕이 이를 듣고 곧 가자를 조선에 봉했다.”하였고,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은(殷) 나라 국운이 쇠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다.”하였고,
《후한서(後漢書)》에도, “기자가 쇠한 은 나라 운수를 저버리고 조선으로 피신하였다.”하여,
후세 사람들은 반고(班固)와 범엽(范曄)이 쓴 두 역사(《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를 가리킨다)를 신임하는데, 본조(本朝 근세 조선을 가리킨다)에 이르러 장씨(張氏 장유(張維))ㆍ임씨(林氏 임상덕(林象德))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였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기자의 피지조선과 수봉조선의 분별’
그리고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단군, 해모수, 주몽, 혁거세, 알영, 탈해, 수로, 알지 등)를 증명 불가능한 것이라 하여 비판하였다. 말하자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동방지명지변(東方地名之辯)과 삼한지방지변(三韓地方之辯)은 고대 지명과 삼한 등의 위치를 고증한 것 고구려는 본래 조선 지역이었는데 후에 마한을 병합하여 그 영토로 하였고, 백제는 본래 마한 지역이었는데 후에 변한을 병합하여 그 영토로 하였으며, 신라는 본래 진한 지역이었는데 후에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여 삼한의 주인이 되었다. 동명이 처음에 일어난 지역은 본래 조선의 현도의 옛 지역이었는데, 후에 이 지역은 중국에 들어가 지금의 요동이 되었으니 대개 건주위(建州衛) 등의 지방이다. 《동사회강(東史會綱)》. -<연려실기술> 별집 제 19권 동국의 지방을 논하다.
으로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백겸(韓百謙)의 설을 따르고 있지만 마한의 위치를 황해도까지 포함하고 변한의 위치를 가야가 아닌 전라도로 비정한 것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 밖에 옥저 동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이다. 《동사회강(東史會綱)》-<연려실기술> 별집 제 19권 동옥저편.
개마국환도성안시성패수 등 고대의 여러 지명도 한백겸의 주장을 따르면서 이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그리고 풍수지리의 창도자인 도선의 사적에 대하여 고려시대 최유정이 쓴 비명(碑銘)과《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서로 다른 것을 비교하면서 그가 중국의 일행에게 가서 수업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동사회강》은 두 가지의 상반되는 영향을 후세에 주었다. 먼저 신라통일 이후만을 정통으로 간주한 정통론은 안정복을 비롯한 경기학인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강목법에 충실하려는 자세와 고증적인 연구 자세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바로 《동사회강》의 강목법과 고증적 학풍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동사회강》의 정통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이다 .
<< 참 고 문 헌 >>
한영우, 1988, 《안정복의 사상과 동사강목》, 한국학보 제53호, 일지사
강세구, 1994, 《東史綱目硏究》, 민족문화사
강세구, 1996,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 연구》, 혜안
한영우, 2002, 《역사학의 역사》, 지식산업사
한영우, 1989, 《조선후기 사학사연구》,일지사
오항녕, 2002,《조선초기 경연의 <자치통감강목> 강의》, 한국사상사학회
민족문화추진회, 고전국역총서,《東史綱目》해제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한국사기초사전, 《東史綱目》
한국역사통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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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통사를 재구성한 것이고, 둘째는 한백겸 이래 서울 실학의 특징인 고증적 역사연구방법을 계승하여 역사지리의 여러 의문점을 고증하여 논문 형식인 <논변>으로 부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주자의 강목법은 범례가 매우 까다롭고 그만큼 서술 원칙이 복잡하다. 도덕적 원칙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용어를 구별해서 서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왕의 역사서들은 강목법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범례를 엄격하게 채용하지 않았다. 임상덕은 특히 유계의《여사제강》이 강목법을 철저히 따르지 않은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100여조의 범례를 두어 한층 강목법에 충실하려고 했다.
임상덕이 재구성한 한국사체계는 통일신라와 고려의 후삼국통일 이후만을 정통(正統)으로 인정하고 고조선과 삼한은 기록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정통에서 제외했으며 삼국시대는 무통(無統)의 시대로 처리했다. 말하자면, 민족이 통일된 시대만을 정통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통론은 기자-마한-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홍여하의 정통론과 다르다.
다음으로 이 책은 중화와 이적을 엄밀하게 구별하여 금이나 원 등 북방족에 사대한 것은 큰 수치로 평가하고 반다로 수, 당, 송, 명과 같은 중화국가에 대한 관계는 군신(君臣), 혹은 부자(父子) 관계로 설정하고 서술했다. 그리하여 수, 당이 고구려를 침략한 것을 정토(征討)라 쓰고 이적국가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경우에는 침략(侵掠) 혹은 구(寇)라고 썼다. 또 우리가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도 명분에 어긋나는 일고 간주하여 삭제했다.
이렇듯 중화를 극도로 높이려는 서술태도는 우리나라를 철저히 제후로 자리매김하는 의미가 있지만 당시로서는 중국에 중화가 없었고 제후였던 우리만이 유일한 중화로 남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청에 대한 적개심을 높이는 데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었다.
《동사회강》이《여사제강》과 다른 점은 고려 말의 서술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여사제강》은 조선건국을 ‘권신에 의한 찬탈’로 서술하여 후세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임상덕은 조서의 건국이 천명을 따른 거사였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끝으로, 이 책에 실린 논변(論辯)은 모두 7조로서 강목법의 원칙과는 달리 순수고증적인 글이다. 여기서는 본문에서 다루지 않은 기자(箕子)·삼한(三韓) 등의 사실을 다루었다. 특히 《기자봉조선지변(箕子封朝鮮之辯)》에서는 기자의 수봉설(受封說)을 부인하여 기자는 주왕(周王)의 신하가 아니라고 논증하였다. 《사기》 미자세가(微子世家)에,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하였고, 《서경(書經)》 홍범대전(洪範大傳)에,
“무왕(武王)이 은(殷)을 이기고 갇혀 있는 기자를 석방하니, 기자는 주(周) 나라의 석방을 차마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여 조선으로 달아났는데, 무왕이 이를 듣고 곧 가자를 조선에 봉했다.”하였고,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은(殷) 나라 국운이 쇠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다.”하였고,
《후한서(後漢書)》에도, “기자가 쇠한 은 나라 운수를 저버리고 조선으로 피신하였다.”하여,
후세 사람들은 반고(班固)와 범엽(范曄)이 쓴 두 역사(《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를 가리킨다)를 신임하는데, 본조(本朝 근세 조선을 가리킨다)에 이르러 장씨(張氏 장유(張維))ㆍ임씨(林氏 임상덕(林象德))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였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기자의 피지조선과 수봉조선의 분별’
그리고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단군, 해모수, 주몽, 혁거세, 알영, 탈해, 수로, 알지 등)를 증명 불가능한 것이라 하여 비판하였다. 말하자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동방지명지변(東方地名之辯)과 삼한지방지변(三韓地方之辯)은 고대 지명과 삼한 등의 위치를 고증한 것 고구려는 본래 조선 지역이었는데 후에 마한을 병합하여 그 영토로 하였고, 백제는 본래 마한 지역이었는데 후에 변한을 병합하여 그 영토로 하였으며, 신라는 본래 진한 지역이었는데 후에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여 삼한의 주인이 되었다. 동명이 처음에 일어난 지역은 본래 조선의 현도의 옛 지역이었는데, 후에 이 지역은 중국에 들어가 지금의 요동이 되었으니 대개 건주위(建州衛) 등의 지방이다. 《동사회강(東史會綱)》. -<연려실기술> 별집 제 19권 동국의 지방을 논하다.
으로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백겸(韓百謙)의 설을 따르고 있지만 마한의 위치를 황해도까지 포함하고 변한의 위치를 가야가 아닌 전라도로 비정한 것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 밖에 옥저 동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이다. 《동사회강(東史會綱)》-<연려실기술> 별집 제 19권 동옥저편.
개마국환도성안시성패수 등 고대의 여러 지명도 한백겸의 주장을 따르면서 이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그리고 풍수지리의 창도자인 도선의 사적에 대하여 고려시대 최유정이 쓴 비명(碑銘)과《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서로 다른 것을 비교하면서 그가 중국의 일행에게 가서 수업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동사회강》은 두 가지의 상반되는 영향을 후세에 주었다. 먼저 신라통일 이후만을 정통으로 간주한 정통론은 안정복을 비롯한 경기학인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강목법에 충실하려는 자세와 고증적인 연구 자세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바로 《동사회강》의 강목법과 고증적 학풍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동사회강》의 정통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이다 .
<< 참 고 문 헌 >>
한영우, 1988, 《안정복의 사상과 동사강목》, 한국학보 제53호, 일지사
강세구, 1994, 《東史綱目硏究》, 민족문화사
강세구, 1996,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 연구》, 혜안
한영우, 2002, 《역사학의 역사》, 지식산업사
한영우, 1989, 《조선후기 사학사연구》,일지사
오항녕, 2002,《조선초기 경연의 <자치통감강목> 강의》, 한국사상사학회
민족문화추진회, 고전국역총서,《東史綱目》해제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한국사기초사전, 《東史綱目》
한국역사통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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