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택원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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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초년기(1907~1927)
2. 이시이 바코 무용연구소 입문기(1928~1932)
3. 무용 활동기(1932~1947)
1) 귀국과 조택원무용연구소 개설(1932~1937)
2)파리공연 연행(1937~1938)
3)귀국공연과 이혼과 재혼(1938~1939)
4)『학』,『춘향소곡』,『부여회상곡』(1939~1945)
5) 해방과 조선무용예술협회(1945~1947)
4. 무용방랑기(1947~1960)
1) 미국 순회공연과 방랑생활(1947~1952, 6.25사변기간)
2)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유럽으로(1952~1955)
3)일본에서 은퇴공연(1955~1960)
5. 귀국과 여생의 황혼기(1960~1976)
6. 맺음 ‘조택월의 춤 인생’
<조택원의 주요작품들>
<조택원에게 춤을 배운 제자들>

본문내용

의 소원했던 관계를 청산하고 무용가들은 협력을 다짐하게 되었다.969년 12월 사단법인 '한국민속 무용단'이 조택원의 주관 아래 창단되었다. 김문숙. 김백봉. 송범. 임성남. 전황. 안제승 등이 참가하여 명실공히 매월 일정금액의 월급을 지불하는 직업무용단으로 발족하였다. 창단 개회인사에서 조택월은 "여기까지 오기에 너무나 한눈을 많이 팔았다. 진작 이런 단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런 일을 할 구 있는 유일한 무용인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어야 했다. 남은 인생이나마 이 단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무용계가 제자기 걸음만 하고 현대적인 감각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무용계의 뒷바라지에 애를 쓰게 된다. 결국 이 단체는 장충동의 국립극장이 새로 설립되고, 보다 강력한 국립무용단의 모체로 흡수된다.
조택원은 1966년 서울시 문화상, 1973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으며, 1974년 10월 '문화의 달'에는 문화훈장 제 1호를 서훈 받았다. 그는 숙원사업이기도 했던 무용전문학교 설립을 위해 서울의 남산 중턱에 부지를 마련하고 선축가 김중업에세 셀계를 맡겼으니 끝내 뜻이 이루지 못하고, 1976년 6월 8일 숙환으로, 신무용 50년을 주금잡아 온 유일한 기수이자 증인인 그는 반세기를 마무리 짓고 파란만장한 무용인생을 마감한다.
반세기 동안의 집시모양 한국춤을 추면서 세계를 또 돌아 다녔던 조택원은 우리나가 무용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으며, 그의 무용인생은 후대에 훌륭한 정신적 가르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맺음 '조택월의 춤 인생'
조택원을 둘러싼 인맥의 호화로움은 그의 무용활동만큼이나, 아니 그 몇 갑절되는 숱한 화제와 일화를 남겼다. 휘문동창으로 이어지는 줄기찬 국내판 인맥이 주종이라면, 파리생활에서 결연되었던 맥락은 국제판 인맥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가 뜻을 펴고 춤의 꽃을 피울 때나, 혹은 실의의 혼미 속에 방황할 때나 화려한 춤인생을 보낼 수 있었던 토양과 후광은 바로 이러한 인맥의 여덕이었다. 또한 한번 맺은 인연은 춤의 후원자로 자리 잡게 하는 특유의 사교성, 그리고 무용에 대한 소명의식에서 비롯된 사람들을 감화. 감동시키는 동양적 아니 한국적 춤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가풍으로 이어받은 현실에 대한 부정과 수용이라는 양면적. 모순적 성격은 그의 인생과 무용세계를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파리 공연 여행을 마치고 깨달은 그의 춤 인생을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나는 동양과 서양. 하나는 나를 낳아 주고 나를 키워 준 고장. 또 하나는 난생 처음 와본곳.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생각방식.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예술. 좁혀서는 동양과 서양의 무용 등.
서양의 무용-발레는 놀랍고 훌륭하고 신기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것이 빌려 입은 옷처럼 내 몸에 붙어주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가령, 서양의 대가들이 무용조곡을 듣고 있을 때 물론 춤의 충동, 춤의 감각은 일어나지만 우리의 굿거리, 진양조 따위를 들었을 때처럼 살 속에서, 피 속에서, 혼 속에서, 온몸에서 어쩔 수 없이 용솟음치며 우러나오는 그 충동이란 느낄 수가 없다. 따라서 서양의 춤은 의지의 춤, 체력의 춤은 결국 하나의 매커니즘이요, 서양의 무용가는 하나의 기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거기에 비기면 우리의 춤은 시초부터 흥이 나지 않으면 못 추는 춤, 즉 정서의 춤, 감각의 춤, 피와 살의 춤, 혼의 춤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결국 감정의 춤, 사상의 춤이요, 철학의 춤이라고 해야 옳을 적이다. 동서양의 차이란 이처럼 예술의 조그마한 한 갈래인 무요에서도 뚜렷하고 엄청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그 엄청난 거리의 저쪽에 놓여 있는 서양의 무용, 발레가 내게는 차차 거의 마칠 수 없는 물건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내 생리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내 고장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고 내가 안주할 수 있는 춤, 한국춤에의 향수가 마치 밀물처럼 내게 밀려드는 것이다.
우리의 가을하늘처럼 맑게 트이고 밝고 명랑한 우리의 예술, 우리의 춤이 내 살 속에서, 피 속에서, 혼 속에서 꿈틀거리고 되살아나는 것이었다.(『가사호접』,pp. 137~139)
또한 일본에서의 은퇴공연 후 깨달은 춤 인생에 대해서는,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민족적인 것이다. 내가 태어난 땅과 겨레와 그 배경과 전통에서 아무리 벗어 날래야 벗어날 도리가 없는, 민족혼의 재현인 것이다. 예술이란 겨레와 더불어, 또 그 속에서만 비로소 싹이 틀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특이한 물건이다"(『가사호접』,p.452)라고 쓰고 있다.
<조택원의 주요작품들>
『아루네키노와 코름방』/『세레나데』/『스페인 야곡』/『화려한 원무곡』/『땅에 바치다』/『황혼』/『죽음의 유혹』/『애수의 인도』/『흑인의 노래』/『사랑의 기쁨』/『잃어버린넋』/『승무의 인상』/『아리랑 환상곡』/『무도회의 초대』/『만종』/『굿거리』/『가사호접』/『전원시』/『집시의 무리』/『부여회상곡』/『봄소리』/『아베마리아』/『비애』/『카프리즈』/『춘향전』/『작력하는 사색』/『인도의 노래』/『학』/『망향』/『시골처녀』/『포엠』/『마력』/『농악무』/『춘향조곡』/『선녀춤』/『장고춤』.
<조택원에게 춤을 배운 제자들>
진수방, 김광양, 김송월, 진원경, 오자와 준코 등.
목 차
1.초년기(1907~1927)
2. 이시이 바코 무용연구소 입문기(1928~1932)
3. 무용 활동기(1932~1947)
1) 귀국과 조택원무용연구소 개설(1932~1937)
2)파리공연 연행(1937~1938)
3)귀국공연과 이혼과 재혼(1938~1939)
4)『학』,『춘향소곡』,『부여회상곡』(1939~1945)
5) 해방과 조선무용예술협회(1945~1947)
4. 무용방랑기(1947~1960)
1) 미국 순회공연과 방랑생활(1947~1952, 6.25사변기간)
2)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유럽으로(1952~1955)
3)일본에서 은퇴공연(1955~1960)
5. 귀국과 여생의 황혼기(1960~1976)
6. 맺음 '조택월의 춤 인생'
<조택원의 주요작품들>
<조택원에게 춤을 배운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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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26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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