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천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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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남천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김남천의 생애

2. 1930년대 전반의 문학활동 - 사회주의, 카프, 물논쟁

3. 1930년대 후반의 문학활동 - 고발문학론, 모랄론, 풍속론 등

4. 1940년대 이후의 문학활동

본문내용

정화를 향하야’를 쓴 때는 1931년 12월이다. 그는 작품에 과도히 정치적 주문을 요구함으로써 작품속의 인물이 '산인간'이 아닌 추상적 인간으로 화해버리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상황의 악화로 인해 당파성의 기피와 탈정치주의 경향 및 창작 옹호론 형태로 전환하게 되는데, 임화는 <물>속의 인간이 '산인간'이자 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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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생물적 인간이므로, 이 신유인적 경향에 남천이 놓여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남천은 오히려 이러한 신유인의 입장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작품의 유형화-도식화의 경향은 작가의 실천 부재 혹은 소시민성의 산물로 보는 과거 예술 운동 볼셰비키화의 논리에 직접 닿아 있는 것이다. 볼셰비키화의 시기 당시에 도식성 극복의 두가지 계기는 카프의 재조직문제와 정치와 문학에 대한 새롭고도 구체적인 관계모색에서 찾고 있었다. 전자의 문제에서
해결점을 찾고자 한 것이 임화, 권환 등이었다. 올바른 프로 예술의 성격이 당문학이므로 예술운동 조직의 볼셰비키화가 우선 해야 한다는 이 견해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실제로 당 조직과 당문학에서의 톱니와 나사는 단순히 예술을 계급투쟁의 무기로 사용하자는 의미도 아니지만 예술가 조직의 전위화를 의미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예술이 그 특유의 힘을 발휘하여 형실의 풍부함을 흡수하고 그 풍부함을 당의 과제(객관적인 사회과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강조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첫번째의 논리는 일면적임을 면치 못한다. 한편 도식화의 극복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작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치환시켜 제기하려 한 것이 안막이었는데 이 논리는 나름의 타당함을 지니면서도 당시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당의 과제와 애써 자신을 구별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작품생산이라는 추상적 과제에 그 의미를 제한시킴으로써 조직해소론의 성격조차 지니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경향은 창작방법 문제에만 주요초점을 두게 되고 후에 안막이 ‘창작 방법문제의 재토의를 위하야’를 썼을때 김남천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김남천은 카프의 돌파구로서 과거 임화의 논리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측면이 바로 ‘물’논쟁에서 김남천의 반론의 출발점을 이룬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말이 바로 이를 드러낸 것이다.
'동지 임화는 우리들이 3여 년 전에 우리문학의 당파성과 및 우리문학의 대중화에 관하야 논의하였는지를 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우리들의 구호는 딴 곳에 있다. 실천 그리고 조선의 노력대중의 당면한 과제의 속에다 그의 전 몸뚱이를 두라. 그리해서만 카프작가의 전진은 가능할 것이다.' (김남천- 임화에게 항의 조선일보 1933.8.4)
이러한 구도 속에서 당대의 임화와 김남천의 차이는 문학운동과 내지는 실천란의 차이에 다름아니었다. 비평가 임화에게 김남천의 작품을 볼 때 작가의 실천문제와 결부시켜 보라고 했을 때 이 '실천'은 정치적 실천을 의미한다. 이점을 강조하는데에 당시 문학인 중, 김남천 만큼 자신감을 지닌 사람이 없었다. ‘공장신문’이라던가 ‘공제생산조합’(전하지 않음)이 작가의 정치적 실천 산물로 씌여졌다는 점, 따라서 김남천에 있어서 문학가는 정치적 실천가이기도 해야 한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임화도 이론(異論)은 없었을 것이다. 초점은 김남천이 문학작품이라는 것을 정치적 실천, 그것도 개인적 체험의 산물이라고 보는데서 오류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을 두고 실천을 이야기 할 경우 그 실천의 범위는 사회의 계급적 실천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 임화였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문학에 있어서의 반영의 문제 즉 리얼리즘의 논리로 귀착되어 가는 것이다. 그가 작품을 비평함에 있어서 현실과의 관계로서 이를 제기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임화의 경우는 훌륭한 작품을 쓰는 것이 훌륭한 문학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논의 하였다면 김남천에있어서의 문학운동의 힘이란 문학 자체의 힘보다는 작가의 정치적 실천과정 속에서 획득되어 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문제가 창작과정으로 좁혀졌을때 작가의 실천이 사회적 실천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주장하는 선에서 김남천은 논의를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강조점은 당시문단에서 현저히 노출되고 있던 정치주의에 대한 일탈에 대해 경고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기도 한데 ‘창작방법에 있어서의 전환문제(형상 1934.3)’ 에서도 그 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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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지속되고 있다. 그가, ‘물’논쟁에 대해 비평을 쓴 박승극에 대해서도 '계급적인 일에 미련을 가지고 정치운동을 할 용기가 없으니 문화운동 이래도 하는 마음보를 가진' '친구들에 대하야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러나 카프 수원 지부장이자 중진인 박승극에게 김남천의 모습이 치기어린 것으로 보였다는 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출옥 하자마자 논쟁에 휩싸이면서 자기를 유지해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힘겨운 작업이었기에 그는 ‘물’의 오류를 모순과 고민에 차있는 나의 실천과 결부시켜서 논평하기를 희망(김남천 ‘문학적 치기를 웃노라’ [조선일보] 10.12)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이제는 자기의 실천 혹은 삶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만이 훌륭한 작품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의당 귀결되게 된다. 이는 1934년의 카프2차 검거에서는 김남천의 경우, 1차 검거의 집행유예 중이어서 불기소처분이 내려지게 되고, 이제 카프작가들은 공공연히 정치적 실천과 결부된 작품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을 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조직이 해산되고 정치적 실천이 불가능해졌을 때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 취해야할 방도는 자기비판의 길 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전의 논리와 연속선상에 놓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삶의 연속적인 발전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논쟁 시기에 ‘생의 고민’을 쓰고 몇 편 더 써보기는 했지만 결국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는 처지에 들어온 것도 이 고민의 흔적을 엿보게 한다. 1935년 카프 해산 후 그는 상경하여 조선 중앙일보 기자로 재직하게 되는데 결국 이 시기는 ‘남매’와 ‘고발의 정신과 창조’의 탄생을 위한 고민의 시기였던 셈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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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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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06.01.05
  • 저작시기2006.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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