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 천안문사태란?
Ⅱ. 제1차 천안문 사태
1) 사건의 발생 경과
2) 1차사건 재평가이후 추진한 개혁개방
3) 급속한 개혁개방과 이에 따른 부작용
Ⅲ. 다시 피로 물든 천안문광장 (2차 천안문 사태)
1) 사건의 발단
2) 사건의 점화
3) 정부의 무력 진압
4) 결과
Ⅳ. 역사적 의의
Ⅴ. 현대적 조명
<참고문헌>
Ⅱ. 제1차 천안문 사태
1) 사건의 발생 경과
2) 1차사건 재평가이후 추진한 개혁개방
3) 급속한 개혁개방과 이에 따른 부작용
Ⅲ. 다시 피로 물든 천안문광장 (2차 천안문 사태)
1) 사건의 발단
2) 사건의 점화
3) 정부의 무력 진압
4) 결과
Ⅳ. 역사적 의의
Ⅴ. 현대적 조명
<참고문헌>
본문내용
직도 물러난 것으로 모였다. 계엄 첫날 천안문 광장에 사람은 그런대로 많았으나 이전과 비교하여 보면 시위규모는 축소되었다. 그러나 북경의 공장들은 휴업상태이고 북경주위에는 1백만명이상의 군중이 모여 계엄군의 입성을 저지하였다.
6월초에 들어와 정부는 강압적으로 이를 진압하려고 하여 군대의 출동은 시간문제였다. 3일밤 10시 반에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출동, 천안문 광장으로 들어가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 그리고 4일 새벽 한시에 군대는 천안문 광장으로 진입, 결국 시위군중들을 진압하여 민주화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를 6.4사건, 또는 천안문사건이라 부른다.
또한 이 상황은 고르바쵸프의 중국방문을 취재차 온 세계 각국 기자들의 중시를 받았다.
4) 결과
그해 겨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소련과 동구 공산국가들이 모두 사회주의체제를 포기하였다. 이것은 6.4 천안문사건에서 아직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중국정부에 새로운 압력으로 다가왔다. 당시에 송평(宋平)은 “중국은 사회주의의 튼튼한 대들보를 준비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지만, 덩샤오핑은 아주 적시에 정세를 판단, “냉정하게 살피고 진용을 단단히 다지면서 대응 방침을 천천히 마련하라“ 하고 이념상의 분쟁을 강력하게 회피하였다.
그 후 중국의 “전방위” 외교를 통해서 나타난 방대한 중국시장의 매력은 인권을 핵심으로 삼고 있는 서방 국가들의 대중국 제재 조치를 점차 와해시켜 나갔으며, 이로써 중국은 점진적으로 “6.4 천안문사건”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덩샤오핑이 죽은 지금에도 “6.4 천안문사건”이 중국 국민에게 안겨 준 마음의 엉어리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Ⅳ. 역사적 의의
덩샤오핑의 잔혹한 민주화운동 진압은 중국을 결코 혼란에 빠뜨릴 수 없다는 그의 기본적인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덩샤오핑이 독재정치를 통하여 이룩한 정국의 안정은 경제 발전을 위한 기초를 확고히 다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정치개혁의 지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개혁의 심화에 더욱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덩샤오핑의 명성은 92년 초 “남방순시” 후에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공적과 권위도 남방순시 후에 더욱 확고해졌다.
Ⅴ. 현대적 조명
현재 덩샤오핑이 강력하게 심어 둔 강택민을 핵심으로 하는 신세대 영도그룹은 이미 덩샤오핑의 권력을 완벽하게 계승한 이후 모두의 우려를 단숨에 씻어내고 중국경제의 성숙을 향해 순항을 거듭하고 있다. 각계에서는 덩샤오핑 사후 중국공산당 고위층의 새로운 권력 투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이미 강택민은 이붕, 주용기, 호금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력체제를 확고히 다짐으로써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전반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세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화/ 중국의 정치리더쉽/ 문원출판사/ 2002
자오찬성/ 중국의 외교정치/ 오름/ 2003
김정형/ 역사속의 오늘/ 생각의 나무/ 2003
6월초에 들어와 정부는 강압적으로 이를 진압하려고 하여 군대의 출동은 시간문제였다. 3일밤 10시 반에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출동, 천안문 광장으로 들어가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 그리고 4일 새벽 한시에 군대는 천안문 광장으로 진입, 결국 시위군중들을 진압하여 민주화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를 6.4사건, 또는 천안문사건이라 부른다.
또한 이 상황은 고르바쵸프의 중국방문을 취재차 온 세계 각국 기자들의 중시를 받았다.
4) 결과
그해 겨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소련과 동구 공산국가들이 모두 사회주의체제를 포기하였다. 이것은 6.4 천안문사건에서 아직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중국정부에 새로운 압력으로 다가왔다. 당시에 송평(宋平)은 “중국은 사회주의의 튼튼한 대들보를 준비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지만, 덩샤오핑은 아주 적시에 정세를 판단, “냉정하게 살피고 진용을 단단히 다지면서 대응 방침을 천천히 마련하라“ 하고 이념상의 분쟁을 강력하게 회피하였다.
그 후 중국의 “전방위” 외교를 통해서 나타난 방대한 중국시장의 매력은 인권을 핵심으로 삼고 있는 서방 국가들의 대중국 제재 조치를 점차 와해시켜 나갔으며, 이로써 중국은 점진적으로 “6.4 천안문사건”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덩샤오핑이 죽은 지금에도 “6.4 천안문사건”이 중국 국민에게 안겨 준 마음의 엉어리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Ⅳ. 역사적 의의
덩샤오핑의 잔혹한 민주화운동 진압은 중국을 결코 혼란에 빠뜨릴 수 없다는 그의 기본적인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덩샤오핑이 독재정치를 통하여 이룩한 정국의 안정은 경제 발전을 위한 기초를 확고히 다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정치개혁의 지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개혁의 심화에 더욱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덩샤오핑의 명성은 92년 초 “남방순시” 후에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공적과 권위도 남방순시 후에 더욱 확고해졌다.
Ⅴ. 현대적 조명
현재 덩샤오핑이 강력하게 심어 둔 강택민을 핵심으로 하는 신세대 영도그룹은 이미 덩샤오핑의 권력을 완벽하게 계승한 이후 모두의 우려를 단숨에 씻어내고 중국경제의 성숙을 향해 순항을 거듭하고 있다. 각계에서는 덩샤오핑 사후 중국공산당 고위층의 새로운 권력 투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이미 강택민은 이붕, 주용기, 호금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력체제를 확고히 다짐으로써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전반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세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화/ 중국의 정치리더쉽/ 문원출판사/ 2002
자오찬성/ 중국의 외교정치/ 오름/ 2003
김정형/ 역사속의 오늘/ 생각의 나무/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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