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정치사상 기반
2. 통치구조
ⅰ관료체제의 특징
ⅱ중앙 정치 기구와 지방통치조직
2. 통치구조
ⅰ관료체제의 특징
ⅱ중앙 정치 기구와 지방통치조직
본문내용
백성에게 올바름을 보여 줄 것)ㆍ奸猾息(용모를 잘 관찰하여 간사스럽고 교활한 사람을 찾아 내어 이를 없앨 것)ㆍ軍政修(때에 맞추어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단기를 엄히 밝힐 것)ㆍ戶口增(백성들을 편안하게 일하면서 살 수 있게 함으로써, 스스로 사람들이 모여들게 할 것)ㆍ賦役均(부역을 시키는 데에는 차별하지 말고 공평균등하게 부과할 것)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수령이 수행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령 7사의 이행과 함께 지방의 조세와 공물을 효과적으로 징수하고 이를 상납하는 문제였다. 즉 조세의 중앙 조달이었는데, 그것은 효과적인 민정과 국가의 운영에 재정적인 문제가 반드시 수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수령의 직무수행을 돕기 위해서 조정에서는 모든 지방행정 단위에 중앙의 6조처럼 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의 六房을을 조직하고 그 지방의 향리가 향역으로 세습하면서 6방의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지방에 파견된 수령은 그곳의 사정에 어둡고 생소하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능률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지방의 향리들을 잘 통솔하여야 했고, 또한 토착 재향품관들의 자문과 협조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향청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설치 운영되었는데, 고려 말 이래 지방의 양반들이 자치단체로 만든 유향소의 후신이다. 유향소가 은연중에 지방 양반들의 세력기반으로 확대되어 가자 정부는 이를 우려하여 폐쇄시킨 적도 있으나 다시 향청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어 지방의 통치기구로 활용되었다. 향청에는 座首와 別監이 있어서 수령을 보좌하고 지방풍속을 바로잡으며 향리들을 규찰하기도 하였다.
한편 서울에는 각 지방 출신의 중앙관리로 중앙관리로 구성된 경재소가 있어 그 지방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을 주선하고 서울과 지방간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서울에 설치된 경재소가 많을 때에는 330개소나 되었는데 이곳에는 유향소의 인사권까지 장악하는 등 그 폐단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유향소는 존폐를 거듭하게 되는데 태종 6년(1406)에 혁파되었다가 세종 때 복립되는데 세조 때 다시 혁파된다. 그러나 성종 때가 되면 김종직 등의 건의로 복립되어 활동하였고, 선조 36(1603)에는 비변사의 건의로 다시 혁파되고 말았다.
경재소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활용되었다. 경재소 관리가 각기 자기의 지방 연고지를 맡아서 제반 사무에 관여케 한 것 등이 그 예가 된다. 즉 2품 이상의 경재소 관리는 8향을 겸임토록 하고, 6품 이상은 6향을, 참하관은 4향을, 그리고 무직자는 2향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향리 중에서 한 사람을 서울에 파견 상주케 하고 그 고을의 공부를 수납하도록 한 경저리 혹은 경주인제도가 운영되고 있었고, 감영에는 營邸吏제도를 마련하여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이처럼 향청의 설치와 운영, 경재소 및 경저리제도의 마련은 모두 재지사족과 향리들의 협조와 견제를 꾀하여 지방통치의 효과를 높이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모두 중앙집권화 정책을 수행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편 서울에는 각 지방 출신의 중앙관리로 중앙관리로 구성된 경재소가 있어 그 지방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을 주선하고 서울과 지방간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서울에 설치된 경재소가 많을 때에는 330개소나 되었는데 이곳에는 유향소의 인사권까지 장악하는 등 그 폐단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유향소는 존폐를 거듭하게 되는데 태종 6년(1406)에 혁파되었다가 세종 때 복립되는데 세조 때 다시 혁파된다. 그러나 성종 때가 되면 김종직 등의 건의로 복립되어 활동하였고, 선조 36(1603)에는 비변사의 건의로 다시 혁파되고 말았다.
경재소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활용되었다. 경재소 관리가 각기 자기의 지방 연고지를 맡아서 제반 사무에 관여케 한 것 등이 그 예가 된다. 즉 2품 이상의 경재소 관리는 8향을 겸임토록 하고, 6품 이상은 6향을, 참하관은 4향을, 그리고 무직자는 2향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향리 중에서 한 사람을 서울에 파견 상주케 하고 그 고을의 공부를 수납하도록 한 경저리 혹은 경주인제도가 운영되고 있었고, 감영에는 營邸吏제도를 마련하여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이처럼 향청의 설치와 운영, 경재소 및 경저리제도의 마련은 모두 재지사족과 향리들의 협조와 견제를 꾀하여 지방통치의 효과를 높이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모두 중앙집권화 정책을 수행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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