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학입문 - 조선 전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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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학입문 - 조선 전기 정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근세의 세계
ⅱ. 근세 사회의 성립
ⅲ. 통치 체제의 정비
ⅳ.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ⅴ.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ⅵ. 양 난의 극복

※참고문헌,논문

본문내용

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도 부족해졌다. 또,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교과서에서는 국내적인 피해만 서술했고, 일본은 정유재란을 통한 피해가 없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 역시 수십만의 인명과 막대한 물자를 소모하고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국민 생활을 피폐하게 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졌다.
또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명나라에 대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하였으며 만주의 여진족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 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호란과 북벌 운동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특히, 정봉수는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 관계를 맺자며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청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 되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위에 서술을 통해서 서인에 의한 병자호란 즉 서인의 정책의 반대로 인해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는 명분은 첫 번째로 태조 누루하치가 죽었는데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 두 번째는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 청을 공격하였을 때 조선 군사를 다치지 않게 했는데도 감사하지 않았다는 점, 세 번째로는 청의 적인 모문룡을 보호하고 있으며, 넷째로, 요동에 있는 청의 백성이 조선에 들어가면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점의 네 가지 명분을 내세웠으므로 이는 서인의 정책에 의한 것으로 보기에는 잘못된 점이 있다.
★ 인조반정을 계기로 남인과 서인은 사회적 안정을 꾀하면서 주자학 이념의 이론적 토대 위에 예치의 질서를 추구하였다. 또한 대외정책에서도 명분론을 강하게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한 명분과 실리적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하지만 후금은 여러 명분을 들어 조선을 자극하였고 이에 병자호란이 일게 되었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 관계를 맺자며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교과서에서는 명이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맺자며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략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군신관계를 맺자며 전쟁을 일으켰다기 보다는 청에서 제의한 군신관계를 인조가 후금 사신의 겹전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을 내려 후금과 결전할 의사를 굳혔기 때문이다.
★ 그 후, 후금은 세력을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쳤다. 이후 청에서는 사신을 통해 조선에 군신관계 제의를 해왔으나 조선에서는 대명의리론을 제기하며 군신관계에 대해 거절의사를 표명하며 결전의사를 굳혔기에 청에서는 대군을 이끌고 사대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입하기에 이른다.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북벌론이 일반 백성 모두의 의식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다. 북벌론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가 강했던 의식으로 주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계층 위주의 것이었다. 또한 북벌론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의 염원을 담고 효종대에 처음 추진되었다. 북벌론에는 이러한 사실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민감한 정치적 이유가 들어 있었다.인조반정의 명분과 북벌론을 앞서 주장했던 효종 자신의 왕위 승계 명분, 조선 후기에 변화된 왕권의 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효종은 인조대 이래 추구해 온 ‘승명반청’의식과 인조대의 외교 노선을 지키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북벌론을 전제로 한 대외정책을 내세웠다. 북벌론이 본래 효종의 정통성과 같은 민감한 사항과 관련되어 있어서 북벌에 대한 시책도 현실적으로

키워드

조선,   전기,   정치
  • 가격2,0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11.10.31
  • 저작시기2011.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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