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에대해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광개토대왕에대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p.3


Ⅱ.본론
1. 광개토 대왕릉비
1)광개토 대왕에 대한 소개 ........................ p.3
2)비의건립과 발견 ................................. p.4
3)비의 형대와 비문의 내용 ....................... p.5
2. 광개토 대왕 비문 연구
1)비문연구의 현 단계 ............................. p.6
2)비문연구의 문제점 .................................... p.7
3. 비문 해석 ................................. p.8


Ⅲ. 결론 ......................................... p.18

▣ 참고문헌 ........................................ p.19

본문내용

토 대왕에 대한 소개
광개토 대왕(374~412)은 고구려 제19 대 왕으로 재위 기간 동안 永樂(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영락 대왕이라고도 불렸다. 본명은 談德(담덕)이고, 고국양왕의 아들로 고국양왕 3년(13세, 386)에 태자로 책봉되고, 18세인 391년에 즉위했다. 그는 소수림왕대의 체제 개혁에 힘입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의 비문에 보이는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란 긴 시호는 그의 영토 확장의 업적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수 많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만주 지방은 물론 한반도 북부 지방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18세의 청년 왕으로 즉위한 광개토 대왕은 백성들의 살림을 챙기는 국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용맹함과 뛰어난 용병술을 갖춘 장수로서 이름을 떨쳤다. 직접 수만 명의 철갑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전쟁터를 누빌 때면 적군은 그 이름만 듣고도 사기가 떨어졌다. 서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후연, 거란, 북부여, 동부여, 숙신, 신라, 가야, 백제에 이르기까지 사방 모든 나라와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광개토 대왕은 고구려를 확고한 동북아 최강국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rhHumanist, p.65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의 대부분이 고구려 땅이 되었다. 특히 요동 지방은 중국과의 대결에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철 산지를 포함하고 있다. 남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확보하였다.
2) 비의 건립과 발견
광개토 대왕릉의 비는 414년에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옛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현) 동북쪽 4.5km에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건립은 同王(동왕)이 돌아간 뒤 그의 아들長壽王(장수왕)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건립 연대는 甲寅年(갑인년) 즉 414년 9월 29일 乙酉(을유)에 왕을安葬(안장)하고 그 증 앞에 비석으로 세웠다고 하므로, 왕이 돌아간 뒤 곧바로 능비 제작에 착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능비는 장수왕이 父王(부왕)의 勳績(훈적)을 기리는 목적으로 세운 것이지만, 한편 동 능비문제에는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에 대한 기사에 못지않게 능을 지키는 묘지기에 대한 기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으로 미루어, 이른바 守墓人烟戶(수묘인연호)를 銘記(명기)하여 장차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당시 고구려의 王都(왕도)였던 鴨綠江(압록강) 北岸(북안) 國內城(국내성) 근교에 세워진 것이지만 현재의 행정구획으로는 中共(중공) 吉林省(길림성) 集安縣(집안현) 太王鄕(태왕향)에 속해 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건립된 지 13년째 되던 427년에 長壽王(장수왕)은 수도를 輯安通溝(집안통치)에서 평양지방으로 옮겼다 고등학교 국사 <교사용 지도서>, 국사편찬위원회국정도서편찬위원회, 교육인적자원부, p.254 고구려는 장수왕이 즉위한 지 15년 뒤인 427년에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동안 ①광개토 대왕 이후 국토가 확장되고 국력이 신장된 점, ②평양은 고조선 이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전된 지역이라는 점, ③대동강은 인적물적인 자원의 보고일 뿐 아니라 평양이 통구 지방에 비해 자연적 조건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점, ④대동강을 이용해 황해를 통한 국제적 활동이 유리한 곳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아울러 386년 건국한 선비족의 북위가 화북 지방을 지배하는 신흥 강국이 되자 북위와 충돌을 피하면서 국가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한 나라의 외교 관계는 국내 정치의 연장이라는 논리에 입각하여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즉 고구려가 남하 정책을 추진하여 백제를 공략한 것은 천도 후 48년이 지난 475년의 일이었고, 패주하던 백제의 추격을 중단한 것은 평양 천도가 남하 정책의 목적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왕권 강화라는 국내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어쨌든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정치, 경제적인 체제의 정비를 가져왔고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한반도의 주도국으로 성장하였으며 고구려가 동아시아 일대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여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 그 이래 집안지방은 고구려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광개토릉비를 비롯한 집안 통구 소재의 갖가지 유적들 여전히 고구려 당국의 보호 대상으로 중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7세기 후반에 고구려가 멸망된 뒤로는 이곳 유적들은 돌보는 사람이 없는 채 세상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차츰 잊혀져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능비가 재발견된 것은1880년대 무렵의 일인데, 발견 당시 능비의 표면은 온통 두꺼운 이끼와 넝쿨로 뒤덮여 있어서 이를 제거한 뒤에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韓國史 市民講座 제3집, 李基東, 一潮閣, p.7 광개토 대왕릉비가 오랜 세월의 망각 속에서 소생하게 된 것은 만주지방이 봉금의 땅에서 해제되면서부터였다. 1860년대 이후 淸朝(청조)의 엄격한 봉금제하에서도 농경지를 찾아서 압록강 방면으로 이주해 오는 중국인 유민수는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지방에 懷仁縣(회인현)(뒤에 輯安縣으로 개칭함)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 능비의 발견 경위는 다소간 모호한데, 일설에는 사람들이 나무를 벌채하다가 이 거대한 비석과 부딪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로는 당시 황폐할 대로 황폐한 고구려시대 고분에서 출토되곤 했던 옛 기왓장을 찾아 나선 사람들에 위해서 능비가 발견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韓國史 市民講座 제3집, 李基東, 一潮閣, p.7
3) 비의 형태와 비문의 내용
광개토 대왕릉비는 호태왕비라고도 불리우며 태왕릉 동쪽 200m 되는 곳에 장엄하게 솟아 있다. 형태는 하나의 거대한 角礫灰岩(각력응회암)으로 높이는 6.39미터이며, 무게로 따진다면 약 37톤이나 된다. 능비의 모양을 보면 불규칙한 長方形(장방형) 기둥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 가격2,0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6.02.03
  • 저작시기2006.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600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