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연안문예강화」의 역사적 배경 - 정풍운동
♠ 연안 문예 좌담회와 모택동의 연설
☞결론부
♠「연안문예강화」의 해방구 전파와 발전방향
♠「연안문예강화」의 의의
♠ 연안 문예 좌담회와 모택동의 연설
☞결론부
♠「연안문예강화」의 해방구 전파와 발전방향
♠「연안문예강화」의 의의
본문내용
전개되도록 촉진시킴으로써, 부대내의 정치사상공작의 일익이 되었다. 해방전쟁이 날로 승리함에 따라 부대문예활동 역시 더욱 활발해졌다. 그들은 생활 및 실제 투쟁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노래 부르고 연극을 연출하며 그림을 그리고 벽신문을 만들고 구락부를 세우며, '창간시(槍杆詩)', '쾌판시(快板詩)', '화선전단(火線傳單)'과 '화선화보(火線畵報)'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노동자의 문예활동 - 노동자의 문예활동은 역사적 조건의 제한으로 인하여 규모의 성과 면에서 농촌이나 부대만큼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해방전쟁이 시작되어 대도시와 중소도시가 잇달아 해방되자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공장, 철도와 광산에서는 생산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앙가대, 가영대(歌 隊), 연극대, 회화조와 창작조 등이 속속 만들어졌다. 이상에서 살펴본 공농병의 문예활동과 창작은 초보적인 발전단계에 처해 있었으므로 유치한 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진정으로 새로운 민중의 문예로서 건강한 혁명정신이 넘쳐흐르는, 건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전문적인 문예공작자의 사상과 창작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문예공작자들은 「문예강화」와 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개조하고 당의 문예노선을 관철하며 풍부한 창작원천을 획득하기 위하여 농촌과 공장 및 부대로 들어가 공농병의 생활속으로 파고들어 대중에게서 학습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문예공작자 사상감정에는 두드러진 변화가 일어났으며, 창작에서도 참신한 기상과 면모를 보여주었다. 즉 새로운 주제,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언어형식의 작품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질적 비약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54이래 혁명문학창작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변모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작품을 주제와 형식면에서 살펴봄으로써 당시 해방구의 새로운 인민문예의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주제 면에서는 민족투쟁과 계급투쟁 및 노동생산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 압도적이다. 주제뿐만 아니라 해방구 문예작품 속에 드러나는 인물형상 역시 새롭다. 사회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공농병은 작품 내에서도 주인공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지식분자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모든 인민해방사업중의 각 방면의 공작 간부로, 그리고 육체노동자와 결합한 정신노동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들에게서 지난날의 감상적이고 고독하며 자포자기적인 정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작품의 표현형식과 언어 면에서도 창조와 혁신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민간문예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생동감 넘치는 대중언어를 학습함과 아울러,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작품 속에 유기적으로 결합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54 이래 일부 문학작품에 나타나던 지식분자의 어투와 서구화된 언어형식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점차 새로운 예술특색을 형성하게 되었다.
♠「연안문예강화」의 의의
대륙에서 간행된 대부분의 중국현대문학사서들은 모택동의 「문예강화」를 시기구분의 준거로 삼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문예에 대한 정책상의 지침 혹은 문예강령에 해당되는 이 문건이 가지는 의미는 이러한 시기구분의 분기점으로도 드러나는 데, 그 시기구분의 실제적 근거는 어떠한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에서 간행된 최초의 문학사서라 할 수 있는 『중국신문학사고』에서 저자인 왕요(王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항전 8년(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 이래 1945년 일제의 패퇴까지)을 한 시기로 잡지 않고 「연안문예좌담회강화」를 분기의 획으로 잡는 것은 이 「강화」가 실제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며, 신문학운동 이래 허다한 무제를 해결함으로써 문학운동과 작가의 실천으로 하여금 명확한 방향을 가지게 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 「강화」의 정확성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미 노동자농민병사를 위해 복무하는 작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문학발전의 발전방향에 관한 문제이며, 또한 '좌련'이 문예대중화를 제창한 이래 진보적 작가들이 전력하여 해결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이러한 지적에는 실로 많은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중국현대문학사의 발전과정에서 제기되어왔던 숱한 문제점들이 「문예강화」라는 호수로 유입되어 거기서 새로운 물줄기로 흘러나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54문학혁명'이래 「문예강화」의 발표 시점까지 중국의 문예운동은 반제반봉건의 신민주주의혁명에 '기본적으로' 복무해왔다고 할 수 있다. '문학혁명'의 반제반봉건이라는 기본정신은 중국좌익작가연맹의 활동 기간 중 이른바 왕명의 좌익기회주의 노선에 침윤되었던 몇몇 시기를 제외하고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럼에도 사상의 물질적 힘이라 일컬어지는 대중획득의 면에서는 여전히 요원한 지경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물론 문예활동가들이 마음껏 대중과 접촉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라는 조건이 부재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해방구정권이 합법화됨에 따라 1930년대 중반까지 상해지구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통치지구에서 자행된 물리적 탄압이라는 것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지식인 혹은 문예활동가들은 프롤레타리아권력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도 아래 대중들과 동심일체가 되어 대중들로부터 학습하고 대중들에게 올바른 문예를 전파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것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제 남겨진 문제는 문예활동가 작가들이 올바른 세계관을 학습하는 한편 일방적으로 대중의 교사? ?되겠다는 작풍을 일소하여 먼저대중으로부터 학습하겠다는 자세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택동이 「문예강화」에서 "누구를 위할 것인가" "어떻게 위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다음 가장 힘주어 강조한 것이 바로 문예활동가의 대중으로부터의 학습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모택동의 대중노선이 문예부문에서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문예는 이른바 '노동자농민병사'라는 방향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중국 현대 문학의 이해 / 한길사/ 김하림 외 2명
중국 현대 문학사 / 청년사
중국 현대문학 발전사 /범우사
☞노동자의 문예활동 - 노동자의 문예활동은 역사적 조건의 제한으로 인하여 규모의 성과 면에서 농촌이나 부대만큼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해방전쟁이 시작되어 대도시와 중소도시가 잇달아 해방되자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공장, 철도와 광산에서는 생산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앙가대, 가영대(歌 隊), 연극대, 회화조와 창작조 등이 속속 만들어졌다. 이상에서 살펴본 공농병의 문예활동과 창작은 초보적인 발전단계에 처해 있었으므로 유치한 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진정으로 새로운 민중의 문예로서 건강한 혁명정신이 넘쳐흐르는, 건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전문적인 문예공작자의 사상과 창작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문예공작자들은 「문예강화」와 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개조하고 당의 문예노선을 관철하며 풍부한 창작원천을 획득하기 위하여 농촌과 공장 및 부대로 들어가 공농병의 생활속으로 파고들어 대중에게서 학습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문예공작자 사상감정에는 두드러진 변화가 일어났으며, 창작에서도 참신한 기상과 면모를 보여주었다. 즉 새로운 주제,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언어형식의 작품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질적 비약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54이래 혁명문학창작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변모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작품을 주제와 형식면에서 살펴봄으로써 당시 해방구의 새로운 인민문예의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주제 면에서는 민족투쟁과 계급투쟁 및 노동생산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 압도적이다. 주제뿐만 아니라 해방구 문예작품 속에 드러나는 인물형상 역시 새롭다. 사회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공농병은 작품 내에서도 주인공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지식분자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모든 인민해방사업중의 각 방면의 공작 간부로, 그리고 육체노동자와 결합한 정신노동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들에게서 지난날의 감상적이고 고독하며 자포자기적인 정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작품의 표현형식과 언어 면에서도 창조와 혁신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민간문예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생동감 넘치는 대중언어를 학습함과 아울러,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작품 속에 유기적으로 결합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54 이래 일부 문학작품에 나타나던 지식분자의 어투와 서구화된 언어형식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점차 새로운 예술특색을 형성하게 되었다.
♠「연안문예강화」의 의의
대륙에서 간행된 대부분의 중국현대문학사서들은 모택동의 「문예강화」를 시기구분의 준거로 삼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문예에 대한 정책상의 지침 혹은 문예강령에 해당되는 이 문건이 가지는 의미는 이러한 시기구분의 분기점으로도 드러나는 데, 그 시기구분의 실제적 근거는 어떠한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에서 간행된 최초의 문학사서라 할 수 있는 『중국신문학사고』에서 저자인 왕요(王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항전 8년(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 이래 1945년 일제의 패퇴까지)을 한 시기로 잡지 않고 「연안문예좌담회강화」를 분기의 획으로 잡는 것은 이 「강화」가 실제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며, 신문학운동 이래 허다한 무제를 해결함으로써 문학운동과 작가의 실천으로 하여금 명확한 방향을 가지게 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 「강화」의 정확성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미 노동자농민병사를 위해 복무하는 작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문학발전의 발전방향에 관한 문제이며, 또한 '좌련'이 문예대중화를 제창한 이래 진보적 작가들이 전력하여 해결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이러한 지적에는 실로 많은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중국현대문학사의 발전과정에서 제기되어왔던 숱한 문제점들이 「문예강화」라는 호수로 유입되어 거기서 새로운 물줄기로 흘러나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54문학혁명'이래 「문예강화」의 발표 시점까지 중국의 문예운동은 반제반봉건의 신민주주의혁명에 '기본적으로' 복무해왔다고 할 수 있다. '문학혁명'의 반제반봉건이라는 기본정신은 중국좌익작가연맹의 활동 기간 중 이른바 왕명의 좌익기회주의 노선에 침윤되었던 몇몇 시기를 제외하고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럼에도 사상의 물질적 힘이라 일컬어지는 대중획득의 면에서는 여전히 요원한 지경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물론 문예활동가들이 마음껏 대중과 접촉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라는 조건이 부재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해방구정권이 합법화됨에 따라 1930년대 중반까지 상해지구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통치지구에서 자행된 물리적 탄압이라는 것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지식인 혹은 문예활동가들은 프롤레타리아권력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도 아래 대중들과 동심일체가 되어 대중들로부터 학습하고 대중들에게 올바른 문예를 전파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것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제 남겨진 문제는 문예활동가 작가들이 올바른 세계관을 학습하는 한편 일방적으로 대중의 교사? ?되겠다는 작풍을 일소하여 먼저대중으로부터 학습하겠다는 자세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택동이 「문예강화」에서 "누구를 위할 것인가" "어떻게 위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다음 가장 힘주어 강조한 것이 바로 문예활동가의 대중으로부터의 학습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모택동의 대중노선이 문예부문에서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문예는 이른바 '노동자농민병사'라는 방향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중국 현대 문학의 이해 / 한길사/ 김하림 외 2명
중국 현대 문학사 / 청년사
중국 현대문학 발전사 /범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