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종교개혁
ⅰ. 루터의 종교 개혁
ⅱ. 칼뱅의 종교개혁
ⅲ. 교황의 반격- 반동 종교개혁
Ⅲ. 불관용의 시대
ⅰ. 종교전쟁의 시작 -슈말칼덴 전쟁
ⅱ. 프랑스의 종교전쟁
ⅲ. 최후의 결전 - 30년 전쟁
Ⅳ. 이미지 전쟁의 시작
ⅰ. 유용하게 사용된 이미지
ⅱ. 회화 속의 대립 - 미술 사조를 통해서
Ⅴ. 결 론
□ 참고문헌
Ⅱ. 종교개혁
ⅰ. 루터의 종교 개혁
ⅱ. 칼뱅의 종교개혁
ⅲ. 교황의 반격- 반동 종교개혁
Ⅲ. 불관용의 시대
ⅰ. 종교전쟁의 시작 -슈말칼덴 전쟁
ⅱ. 프랑스의 종교전쟁
ⅲ. 최후의 결전 - 30년 전쟁
Ⅳ. 이미지 전쟁의 시작
ⅰ. 유용하게 사용된 이미지
ⅱ. 회화 속의 대립 - 미술 사조를 통해서
Ⅴ. 결 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호소력과 설득시키는 힘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미술의 경향은 종교전쟁 속에 있는 신교와 구교의 대립적 관계를 잘 표현 해 주는 것이다. 바로크 시대의 미술이 정치적 목적이나 종교 분파간의 분쟁에 이용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서, 이 시대의 걸작들 대다수는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스티븐 리틀, 『손에 잡히는 미술 사조』, 예경, 2005, p48.
물론 이러한 바로크의 양식은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사용되는데 가톨릭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렇듯 바로크 양식에 미술작품자체가 신앙심을 가시화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건주의 경건주의는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위협에 대항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위의 책 p50.
라 한다. 이는 또한 종파주의로도 불리 우는데, 가톨릭 측에서는 성인의 유물과 성목에 대한 숭배가 장려되었으며 가시적이고 의례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이에 반해 신교가 우세한 지역에서의 미술은 사적인 차원에서 종교체험과 성경공부를 강조했고, 성인과 유물숭배, 마리아 숭배를 우상숭배라 하며 이를 탄압했다. 그들은 미술을 진리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으며 진리의 일부로서 숭배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을 경계했다. 위의 책, p52.
이미지를 구현한 미술에 있어서도 각 측의 강한 영향아래 제작 되었으며, 제작된 이미지는 신교와 구교의 각각의 종교성을 나타내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것이다.
Ⅴ. 결 론
유럽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래 베스트팔렌 조약이 성립하기 까지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리고 서야 종교적 관용을 허용하게 된다. 종교의 이름으로 시작된 전쟁은 진행 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쟁탈하기 위한 성격을 띠게 된다. 즉 종교 전쟁은 로마교회의 타락에 대한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종교적 이유뿐아니라, 중앙 집권화를 이뤄가는 세속권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나뉘어 싸운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의 붕괴는 단일한 공동체의 붕괴를 가져 왔으며 각 지역의 세력의 활거를 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중앙집권화를 이뤄가는 유럽의 각국의 세속 권력은 로마교회로부터 권력을 하나하나 빼앗아온다. 하지만 로마교회도 여전히 힘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당시는 오늘날처럼 민족국가의 개념이 희박하기에 종교만큼 자신의 왕국을 통일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존재 하지 않던 시기였다. 세속권력은 그들의 집단적 통일을 종교를 통해 이뤄야 했으며, 이는 누구든 신교와 구교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돼는 상황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한쪽으로 힘이 쏠린 것이 아닌, 균형을 이뤘기에 계속된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필수 불가결의 과정으로 종교전쟁을 이해할 수 있다. 중세의 봉건사회의 해체 속에서 중앙집권화를 이루며, 권력 투쟁 속에서 구교와 신교라는 선택이 강요 되었으며, 각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구교, 신교로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군주에 따라 종교가 정해지는 모습으로 관용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로는 부족 했으며 다시금 전쟁 속으로 들어간 유럽은 많은 피를 흘리고 서야 서로의 종교를 관용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 하게 된 것이다. 30년 전쟁의 양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의 종교적 차이가 후반에는 무의미 해지고 로마교회를 신봉하는 프랑스가 서로 같은 에스파냐를 정치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신교를 후원하여 싸운 것처럼, 종교적 의미가 빠져 나간 것 을 볼 수 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이미지 텍스트는 자신들의 종교의 당위성과 명분을 알리는데 유용하게 사용된 것이다. 이미지가 갖는 함축성, 쉬운 해독력, 빠른 전달성 등 문자 텍스트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 혹은 상승작용을 통하여 대부분이 문맹인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이민호, 『새독일사』, 까치, 2003.
메리 풀브룩,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개마고원, 2001.
로저 프라이스, 『혁명과 반동의 프랑스사』, 개마고원, 2001.
스티븐 리틀, 『손에 잡히는 미술 사조』, 예경, 2005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Ⅰ』, 책세상, 1995.
올리비에 크리스텡, 『종교개혁』, 시공사, 1998.
E.M.번즈 R. 러너 S.미첨, 『서양 문명의 역사 Ⅲ』, 소나무, 1994
E.M.번즈R. 러너 S.미첨, 『서양 문명의 역사 Ⅱ』, 소나무, 1994.
에디드 시몬, 『종교개혁(라이프 인간세계사)』, 타임 라이프 북스, 1990.
배영수편, 『서양사 강의』, 한울, 2000.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 브리테니커, 2004.
물론 이러한 바로크의 양식은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사용되는데 가톨릭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렇듯 바로크 양식에 미술작품자체가 신앙심을 가시화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건주의 경건주의는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위협에 대항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위의 책 p50.
라 한다. 이는 또한 종파주의로도 불리 우는데, 가톨릭 측에서는 성인의 유물과 성목에 대한 숭배가 장려되었으며 가시적이고 의례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이에 반해 신교가 우세한 지역에서의 미술은 사적인 차원에서 종교체험과 성경공부를 강조했고, 성인과 유물숭배, 마리아 숭배를 우상숭배라 하며 이를 탄압했다. 그들은 미술을 진리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으며 진리의 일부로서 숭배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을 경계했다. 위의 책, p52.
이미지를 구현한 미술에 있어서도 각 측의 강한 영향아래 제작 되었으며, 제작된 이미지는 신교와 구교의 각각의 종교성을 나타내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것이다.
Ⅴ. 결 론
유럽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래 베스트팔렌 조약이 성립하기 까지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리고 서야 종교적 관용을 허용하게 된다. 종교의 이름으로 시작된 전쟁은 진행 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쟁탈하기 위한 성격을 띠게 된다. 즉 종교 전쟁은 로마교회의 타락에 대한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종교적 이유뿐아니라, 중앙 집권화를 이뤄가는 세속권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나뉘어 싸운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의 붕괴는 단일한 공동체의 붕괴를 가져 왔으며 각 지역의 세력의 활거를 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중앙집권화를 이뤄가는 유럽의 각국의 세속 권력은 로마교회로부터 권력을 하나하나 빼앗아온다. 하지만 로마교회도 여전히 힘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당시는 오늘날처럼 민족국가의 개념이 희박하기에 종교만큼 자신의 왕국을 통일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존재 하지 않던 시기였다. 세속권력은 그들의 집단적 통일을 종교를 통해 이뤄야 했으며, 이는 누구든 신교와 구교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돼는 상황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한쪽으로 힘이 쏠린 것이 아닌, 균형을 이뤘기에 계속된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필수 불가결의 과정으로 종교전쟁을 이해할 수 있다. 중세의 봉건사회의 해체 속에서 중앙집권화를 이루며, 권력 투쟁 속에서 구교와 신교라는 선택이 강요 되었으며, 각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구교, 신교로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군주에 따라 종교가 정해지는 모습으로 관용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로는 부족 했으며 다시금 전쟁 속으로 들어간 유럽은 많은 피를 흘리고 서야 서로의 종교를 관용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 하게 된 것이다. 30년 전쟁의 양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의 종교적 차이가 후반에는 무의미 해지고 로마교회를 신봉하는 프랑스가 서로 같은 에스파냐를 정치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신교를 후원하여 싸운 것처럼, 종교적 의미가 빠져 나간 것 을 볼 수 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이미지 텍스트는 자신들의 종교의 당위성과 명분을 알리는데 유용하게 사용된 것이다. 이미지가 갖는 함축성, 쉬운 해독력, 빠른 전달성 등 문자 텍스트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 혹은 상승작용을 통하여 대부분이 문맹인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이민호, 『새독일사』, 까치, 2003.
메리 풀브룩,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개마고원, 2001.
로저 프라이스, 『혁명과 반동의 프랑스사』, 개마고원, 2001.
스티븐 리틀, 『손에 잡히는 미술 사조』, 예경, 2005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Ⅰ』, 책세상, 1995.
올리비에 크리스텡, 『종교개혁』, 시공사, 1998.
E.M.번즈 R. 러너 S.미첨, 『서양 문명의 역사 Ⅲ』, 소나무, 1994
E.M.번즈R. 러너 S.미첨, 『서양 문명의 역사 Ⅱ』, 소나무, 1994.
에디드 시몬, 『종교개혁(라이프 인간세계사)』, 타임 라이프 북스, 1990.
배영수편, 『서양사 강의』, 한울, 2000.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 브리테니커, 2004.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