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尤庵 宋時烈의 생애
1) 尤庵의 學統
2) 尤庵의 생애
3. 尤庵 宋時烈의 政治思想
1) 君主觀 - 聖學論
2) 王道政治
3) 山林 宰相과 士林政治論
4. 尤庵의 社會․經濟論
1) 奴婢從母從良法
2) 兩半戶布論
3) 大同法論
5. 결 론
# 참고문헌
2. 尤庵 宋時烈의 생애
1) 尤庵의 學統
2) 尤庵의 생애
3. 尤庵 宋時烈의 政治思想
1) 君主觀 - 聖學論
2) 王道政治
3) 山林 宰相과 士林政治論
4. 尤庵의 社會․經濟論
1) 奴婢從母從良法
2) 兩半戶布論
3) 大同法論
5. 결 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士族收布論을 주장하고 있었고, 효종 10년(1671) 병조참지 유계가 군역제 개혁을 위해 양반 호포론을 주장하였다.
尤庵은 유계이유태송준길과 의논하여 군역제 개혁을 위하여 3필 2필 1필 내는 납포제의 차등을 1필로 통일 시키려는 정책을 주친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양반이 호포를 부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서인과 남인의 대결로 여러 환국이 계속 되면서 시행되지 못하다가 노론이 정권을 잡는 영조대에 이르러 균역법으로 시행되었다.
3) 大同法論
尤庵은 경제정책의 기본으로 井田制에 입각한 10분의 1세를 거두어 저축하였다가 재난에 대배한 구휼정책을 하여 이상사회를 이루어갈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기반을 이루는 大同法은 한편으로는 공납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米布로 거두는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이에 대한 전제로 공안개정을 하여 공물을 줄여 10분의 1세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안개정을 전제로 하지 않은 대동법은 오히려 왕실의 사치를 조장하여 농민 부담을 가중시킬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尤庵은 현종 즉위년에 선왕의 지문을 지어 올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기억하건데, 봄에 삼가 대행 대왕의 옥음을 들었는데, ‘호남 산간 고을의 대동법에 대해서 마땅히 가을을 기다려 혁파할 것인가, 그대로 둘 것인가를 의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일을 만약 수행해야 옳다고 여기신다면 비록 장례전이라 하더라도 빨리 처리해야 마땅하니, 분명한 지휘가 있어야 합니다.” 『顯宗改修實錄』권1 顯宗卽位年 9月 辛酉
라고 하여, 효종 말에 호남 산군의 대동법을 가을에 시행할 것인지 논의하기로 하였다고 하여 호남 산군 대동법 시행을 논의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현종 4년 3월 12일 드디어 1결 13두를 거두는 호남 대동법을 시행하였다.그러나 이에 대해 남인들의 반대는 심하였다. 현종 10년 허적은 송시열이 도라지 산삼 등 공물을 줄이고 각사의 공물들을 차례로 줄이니 도성 백성인 공물 주인들이 원망한다고 반박하였다. 이에 대하여 송시열은 공물 주인의 이익은 국가의 해라고 하며 불필요한 공물을 줄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尤庵 송시열이 추구하는 대동법은 율곡 이이가 제시한 것처럼 공안개정을 전제로 하는 대동법이었다. 이는 전세공물요역 모두를 합쳐서 토지에서 10분의 1세를 거두어 복지정책의 구휼을 실현하려는 이상을 위한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5. 결 론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이름이 많이 나온다는 사람이 바로 尤庵 宋時烈이다. 그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서 두 가지 대비되는 시각으로 비추어 진다. 하나는 조선 성리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수주의의 기원이자 사대주의자의 수장으로 파악하는 입장이 있고, 성리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집권당이라고 할 수 있는 노론의 영수로서 조선 후기 사회를 성리학적인 틀 속에서 개혁하려 했던 자주적인 개혁가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어떠한 시각이 옳은 것인지는 각각 자신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조사해 본 것을 토대로 나의 의견을 말한다면 송시열은 개혁적인 성격보다 보수적인 성격이 좀 더 강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유는 그의 모든 사상이 개혁이 ‘주자’와 ‘율곡’ 이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희를 통해 정치의 모델과 자신의 삶의 이상향을 설정하고, 율곡을 통해 사회경제의 변화를 모색했을 뿐 우암만의 독특한 어떤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개혁이, 변화가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다. 특히 전근대 시대의 그것도 왜란과 호란의 양란을 극복해야 하는 경우에는 느린 변화와 발전이 더욱 효과적이고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급격한 변화는 사회의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송시열의 정치사상과 현실개혁이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현실개혁에 있어서는 변화를 수용하지 못할 정도의 보수 즉, 수구는 아니었다.
《참고문헌》
김세봉, 「17 세기후반 산인세력의 동향 - 송시열의 활동을 중심으로」,『사학지』, 단국사학회, 1994.
裵相賢, 「尤庵 宋時烈의 禮學攷」, 『우암 사상 연구논총』, 사문학회, 1992.
지두환, 「송시열 - 이상사회를 실현한 개혁자」, 『한국사 인물열전』2, 돌베게, 2003.
지두환, 「우암 송시열의 사회경제사상」, 『한국사논총』21,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9.
지두환, 「우암 송시열의 정치사상 -효종대를 중심으로」,『한국사논총』23,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1.
尤庵은 유계이유태송준길과 의논하여 군역제 개혁을 위하여 3필 2필 1필 내는 납포제의 차등을 1필로 통일 시키려는 정책을 주친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양반이 호포를 부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서인과 남인의 대결로 여러 환국이 계속 되면서 시행되지 못하다가 노론이 정권을 잡는 영조대에 이르러 균역법으로 시행되었다.
3) 大同法論
尤庵은 경제정책의 기본으로 井田制에 입각한 10분의 1세를 거두어 저축하였다가 재난에 대배한 구휼정책을 하여 이상사회를 이루어갈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기반을 이루는 大同法은 한편으로는 공납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米布로 거두는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이에 대한 전제로 공안개정을 하여 공물을 줄여 10분의 1세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안개정을 전제로 하지 않은 대동법은 오히려 왕실의 사치를 조장하여 농민 부담을 가중시킬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尤庵은 현종 즉위년에 선왕의 지문을 지어 올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기억하건데, 봄에 삼가 대행 대왕의 옥음을 들었는데, ‘호남 산간 고을의 대동법에 대해서 마땅히 가을을 기다려 혁파할 것인가, 그대로 둘 것인가를 의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일을 만약 수행해야 옳다고 여기신다면 비록 장례전이라 하더라도 빨리 처리해야 마땅하니, 분명한 지휘가 있어야 합니다.” 『顯宗改修實錄』권1 顯宗卽位年 9月 辛酉
라고 하여, 효종 말에 호남 산군의 대동법을 가을에 시행할 것인지 논의하기로 하였다고 하여 호남 산군 대동법 시행을 논의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현종 4년 3월 12일 드디어 1결 13두를 거두는 호남 대동법을 시행하였다.그러나 이에 대해 남인들의 반대는 심하였다. 현종 10년 허적은 송시열이 도라지 산삼 등 공물을 줄이고 각사의 공물들을 차례로 줄이니 도성 백성인 공물 주인들이 원망한다고 반박하였다. 이에 대하여 송시열은 공물 주인의 이익은 국가의 해라고 하며 불필요한 공물을 줄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尤庵 송시열이 추구하는 대동법은 율곡 이이가 제시한 것처럼 공안개정을 전제로 하는 대동법이었다. 이는 전세공물요역 모두를 합쳐서 토지에서 10분의 1세를 거두어 복지정책의 구휼을 실현하려는 이상을 위한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5. 결 론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이름이 많이 나온다는 사람이 바로 尤庵 宋時烈이다. 그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서 두 가지 대비되는 시각으로 비추어 진다. 하나는 조선 성리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수주의의 기원이자 사대주의자의 수장으로 파악하는 입장이 있고, 성리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집권당이라고 할 수 있는 노론의 영수로서 조선 후기 사회를 성리학적인 틀 속에서 개혁하려 했던 자주적인 개혁가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어떠한 시각이 옳은 것인지는 각각 자신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조사해 본 것을 토대로 나의 의견을 말한다면 송시열은 개혁적인 성격보다 보수적인 성격이 좀 더 강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유는 그의 모든 사상이 개혁이 ‘주자’와 ‘율곡’ 이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희를 통해 정치의 모델과 자신의 삶의 이상향을 설정하고, 율곡을 통해 사회경제의 변화를 모색했을 뿐 우암만의 독특한 어떤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개혁이, 변화가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다. 특히 전근대 시대의 그것도 왜란과 호란의 양란을 극복해야 하는 경우에는 느린 변화와 발전이 더욱 효과적이고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급격한 변화는 사회의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송시열의 정치사상과 현실개혁이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현실개혁에 있어서는 변화를 수용하지 못할 정도의 보수 즉, 수구는 아니었다.
《참고문헌》
김세봉, 「17 세기후반 산인세력의 동향 - 송시열의 활동을 중심으로」,『사학지』, 단국사학회, 1994.
裵相賢, 「尤庵 宋時烈의 禮學攷」, 『우암 사상 연구논총』, 사문학회, 1992.
지두환, 「송시열 - 이상사회를 실현한 개혁자」, 『한국사 인물열전』2, 돌베게, 2003.
지두환, 「우암 송시열의 사회경제사상」, 『한국사논총』21,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9.
지두환, 「우암 송시열의 정치사상 -효종대를 중심으로」,『한국사논총』23,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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