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About Dan Brown
▲ 초대형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
▲ <다빈치 코드>의 열풍의 비결
▲ <다빈치 코드>의 줄거리와 핵심주장
▲ 남부 프랑스 지방에서 나타나는 막달라 마리아의 흔적
▲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 다빈치 코드에 대한 교회의 반응
▲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초대형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
▲ <다빈치 코드>의 열풍의 비결
▲ <다빈치 코드>의 줄거리와 핵심주장
▲ 남부 프랑스 지방에서 나타나는 막달라 마리아의 흔적
▲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 다빈치 코드에 대한 교회의 반응
▲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본문내용
지나서야 뒤늦게 공식대응에 나선 것은 이 소설의 놀라운 성공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성서 대신 ‘다빈치 코드’를 기독교 역사 안내서로 사용하는 것에 경악했다고 한다.
- 이에 따라 이탈리아 제노바를 시작으로 <다빈치 코드>의 허구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를 시작하였고.
- 다빈치의 고향인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 빈치시에서는 소설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모의재판이 예술전문가와 가톨릭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기도 했다.
2) 개신교계의 반응
예상외로 소설이 메가톤급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교계의 드러나는 대응은 없다. 교계 미디어에서 산발적으로 비평이 나오고 있는데, 신학적으로 아예 무시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난해한 해설로 비판하거나 신자들의 신앙적 양심에 의존하는 대응양상을 보이고 있다.
1. 무시 - 사탄의 준동
- <다빈치 코드> 는 말세에 횡행하는 사탄의 권세가 역사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최선이 대응은 그저 무시하는 것이라는 것에 기반.
- 사랑의 교회 청년부의 청년회보 기사가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 이러한 무시전략의 일환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간 보수 기독교가 일반 사회의 문화에 대해 가졌던 대응방식 - 예컨대 출판사에 압력을 넣거나 불매운동을 전개하는 따위의 - 은 나타나지 않는다.
2. 대중적 코드를 무시한 현학적 해설 혹은 지극히 신앙적인 대응.
- 그리고 '다빈치 코드'를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학자가 아니며 신학에는 대개 관심이 없다. 그러나 많은 '대응서적'과 비평글들은 언제나 대다수 신앙적 회의감을 갖는 사람들은 읽지도 않을 형식으로 신학적 사실성만 강조하며 설득하려는 한계.
- '다빈치 코드'식으로 전통적인 신앙관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는 대중서적은 최근만 해도 많이 출간되었다.「예수는 없다」(오강남, 2001년),「예수는 신화다」(티모시 프리크, 2002년) 이런 책들에 대응한다고 곧 바로 「예수는 있다」(이국진, 2003년),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 2002년)와 같은 책들이 잇따라 출간. 이처럼 '코드'를 제압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l처고 「다 빈치 코드 깨기」(어윈 루처/이하 '깨기')와 「다빈치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행크 헤네크라프)라는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었지만 효과는 의문.
- '다빈치 코드'가 한 대형서점 2004년 12월 1~3주까지 종합순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동안 「다 빈치 코드 깨기」와 「다 빈치 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는 같은 서점, 같은 기간 동안 종합이 아닌 종교부문에서만 '15위, 9위, 12위' 그리고 '23위, 25위, 13위'에 기록에 머물렀다.
- 한편 지극히 개인의 신앙차원에서만 대응하는 방식이 있다.
**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를 미혹하는 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남을 잊지 말고 주님의 능력을 붙들라.
** 다빈치 코드 따위를 반박하기 위해 골몰하는 것은 단지 시간낭비일 뿐이다.
등이 이런류에 해당한다.
▲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1) 무시는 상책이 아니다.
- 이런 식의 단순 적대감은 오히려 맹목적 반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 신앙에 대항하는 최대의 힘은 다른 관점이나 이론이라기보다 오히려 무대응 일 수 있다.
- 더군다나 <다빈치 코드>의 많은 독자들은 비기독교인 들이다. <다빈치 코드>의 성공이 사탄의 역사라면 그 역사아래 놓여있는 수많은 이들을 그저 방치하자는 건가?
2) 대중적 코드를 존중해야 한다.
- '다빈치 코드'와 같은 책들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의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관심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라은성 교수와 차동엽 신부가 공동으로 출간한 <다빈치 코드의 족보>(동인). 대중들과 쉽게 만나기 위해 소설적 형식으로 쓰여진 것이다.
3) 성찰적 접근과 이중적 귀기울임의 수고.
- 우리는 텍스트에 대한 시시비비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를 둘러싼 배경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필요.
- 그것은 다빈치의 열풍현상이 기독교에 질식해가는 우리 사회의 소리 없는 반란이기도 하며, 정통 교회가 역사 속에서 완전 배제할 수 없었던 반대 세력에 대한 박해와 배타적 독단에 대한 염증도 일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다빈치 코드>의 성공속에서 오늘날 교회에 대해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 한편 우리는 존스토트가 지적했던 이중적 귀기울임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무시하고 마는것과 지나치게 난해한 신학적 비평방식 등은 모두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을 오로지 교회 안으로만 한정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문화적으로 게토화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의 커뮤니케이션은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상밖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4) 발상을 전환하면 <다빈치 코드>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 영화 <사랑과 영혼>의 뉴에이적 경향이 당시 교회의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a많은 비기독교인들에 영혼과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다빈치 코드>를 본 많은 비기독인 독자들은 예수와 성경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다.
- 교계는 이러한 분위기를 기회로 인식할 수 있는 안목과 이것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안목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참고자료>
<단행본>
다빈치코드 / 댄 브라운 / 베델스만
다빈치코드 사전편, 해설편
<동영상 자료>
SBS 백만불 미스터리 / <다빈치 코드, 예수의 성배 막달라 마리아>
Cracking the Davinci Code / 사이먼 콕스
KBS다큐. Unlocking Davinci code
<다빈치 코드, 그 감춰신 진실> / NGC
*목 차
▲ About Dan Brown
▲ 초대형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
▲ <다빈치 코드>의 열풍의 비결
▲ <다빈치 코드>의 줄거리와 핵심주장
▲ 남부 프랑스 지방에서 나타나는 막달라 마리아의 흔적
▲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 다빈치 코드에 대한 교회의 반응
▲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이에 따라 이탈리아 제노바를 시작으로 <다빈치 코드>의 허구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를 시작하였고.
- 다빈치의 고향인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 빈치시에서는 소설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모의재판이 예술전문가와 가톨릭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기도 했다.
2) 개신교계의 반응
예상외로 소설이 메가톤급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교계의 드러나는 대응은 없다. 교계 미디어에서 산발적으로 비평이 나오고 있는데, 신학적으로 아예 무시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난해한 해설로 비판하거나 신자들의 신앙적 양심에 의존하는 대응양상을 보이고 있다.
1. 무시 - 사탄의 준동
- <다빈치 코드> 는 말세에 횡행하는 사탄의 권세가 역사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최선이 대응은 그저 무시하는 것이라는 것에 기반.
- 사랑의 교회 청년부의 청년회보 기사가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 이러한 무시전략의 일환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간 보수 기독교가 일반 사회의 문화에 대해 가졌던 대응방식 - 예컨대 출판사에 압력을 넣거나 불매운동을 전개하는 따위의 - 은 나타나지 않는다.
2. 대중적 코드를 무시한 현학적 해설 혹은 지극히 신앙적인 대응.
- 그리고 '다빈치 코드'를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학자가 아니며 신학에는 대개 관심이 없다. 그러나 많은 '대응서적'과 비평글들은 언제나 대다수 신앙적 회의감을 갖는 사람들은 읽지도 않을 형식으로 신학적 사실성만 강조하며 설득하려는 한계.
- '다빈치 코드'식으로 전통적인 신앙관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는 대중서적은 최근만 해도 많이 출간되었다.「예수는 없다」(오강남, 2001년),「예수는 신화다」(티모시 프리크, 2002년) 이런 책들에 대응한다고 곧 바로 「예수는 있다」(이국진, 2003년),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 2002년)와 같은 책들이 잇따라 출간. 이처럼 '코드'를 제압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l처고 「다 빈치 코드 깨기」(어윈 루처/이하 '깨기')와 「다빈치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행크 헤네크라프)라는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었지만 효과는 의문.
- '다빈치 코드'가 한 대형서점 2004년 12월 1~3주까지 종합순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동안 「다 빈치 코드 깨기」와 「다 빈치 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는 같은 서점, 같은 기간 동안 종합이 아닌 종교부문에서만 '15위, 9위, 12위' 그리고 '23위, 25위, 13위'에 기록에 머물렀다.
- 한편 지극히 개인의 신앙차원에서만 대응하는 방식이 있다.
**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를 미혹하는 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남을 잊지 말고 주님의 능력을 붙들라.
** 다빈치 코드 따위를 반박하기 위해 골몰하는 것은 단지 시간낭비일 뿐이다.
등이 이런류에 해당한다.
▲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1) 무시는 상책이 아니다.
- 이런 식의 단순 적대감은 오히려 맹목적 반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 신앙에 대항하는 최대의 힘은 다른 관점이나 이론이라기보다 오히려 무대응 일 수 있다.
- 더군다나 <다빈치 코드>의 많은 독자들은 비기독교인 들이다. <다빈치 코드>의 성공이 사탄의 역사라면 그 역사아래 놓여있는 수많은 이들을 그저 방치하자는 건가?
2) 대중적 코드를 존중해야 한다.
- '다빈치 코드'와 같은 책들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의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관심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라은성 교수와 차동엽 신부가 공동으로 출간한 <다빈치 코드의 족보>(동인). 대중들과 쉽게 만나기 위해 소설적 형식으로 쓰여진 것이다.
3) 성찰적 접근과 이중적 귀기울임의 수고.
- 우리는 텍스트에 대한 시시비비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를 둘러싼 배경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필요.
- 그것은 다빈치의 열풍현상이 기독교에 질식해가는 우리 사회의 소리 없는 반란이기도 하며, 정통 교회가 역사 속에서 완전 배제할 수 없었던 반대 세력에 대한 박해와 배타적 독단에 대한 염증도 일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다빈치 코드>의 성공속에서 오늘날 교회에 대해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 한편 우리는 존스토트가 지적했던 이중적 귀기울임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무시하고 마는것과 지나치게 난해한 신학적 비평방식 등은 모두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을 오로지 교회 안으로만 한정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문화적으로 게토화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의 커뮤니케이션은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상밖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4) 발상을 전환하면 <다빈치 코드>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 영화 <사랑과 영혼>의 뉴에이적 경향이 당시 교회의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a많은 비기독교인들에 영혼과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다빈치 코드>를 본 많은 비기독인 독자들은 예수와 성경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다.
- 교계는 이러한 분위기를 기회로 인식할 수 있는 안목과 이것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안목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참고자료>
<단행본>
다빈치코드 / 댄 브라운 / 베델스만
다빈치코드 사전편, 해설편
<동영상 자료>
SBS 백만불 미스터리 / <다빈치 코드, 예수의 성배 막달라 마리아>
Cracking the Davinci Code / 사이먼 콕스
KBS다큐. Unlocking Davinci code
<다빈치 코드, 그 감춰신 진실> / NGC
*목 차
▲ About Dan Brown
▲ 초대형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
▲ <다빈치 코드>의 열풍의 비결
▲ <다빈치 코드>의 줄거리와 핵심주장
▲ 남부 프랑스 지방에서 나타나는 막달라 마리아의 흔적
▲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 다빈치 코드에 대한 교회의 반응
▲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