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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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선조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곤도가 처형당한 후 히지카타는 막부군 간부로서 전쟁을 계속하며 북으로 간다. 최후엔 하코다테 고료가쿠까지 가 항쟁했다. 결국 막부군이 항복할 기세가 짙어지자 혼자서 적지에 뛰어들어 복부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여기서 항복해선 지하에 있는 곤도를 볼 면목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막부군 간부 중에서 죽은 것은 그 혼자였다. 곤도의 죽음으로부터 약 1년 후의 일이었다.
참모 이토 가시타로 덴포6년(1835)~게이오3년(1867) 11월 18일 / 32세
신선조 참모. 원래는 낭인으로, 후카가와 사카쵸(深川 佐賀町)에서 도장을 관장하는 북진일도류의 달인. 이토는 검객으로도 유명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국학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면식이 있던 8번대 대장 토도의 소개로 신선조 입대 후로는 문학 사범도 겸하며 점차 부대 안에서 자신의 파벌을 확립하여 후에 자신의 일파를 데리고 신선조에서 분리. 11월18일, 곤도 이사미의 초청에 따라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신선조 부대 병사들에게 습격당해 암살된다.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 덴포4년(1833)~겐지2년(1865) 2월 23일 / 32세
신선조 총장. 북진일도류를 배웠으나 곤도 이사미의 인품에 반해 천연이심류에 입문해 제자가 되었다. 결국 시위관 동료들과 함께 교토에 상경한다. 국장인 곤도와 부장인 히지카타 사이에 있는 지위인 총장에 있으면서 두 사람의 사이에 낄 수 없는 것에 고립감을 느끼며 같은 근왕이라도 좌막의 선봉인 신선조의 사고방식에 의문을 품었던 듯 하다. 이케다야 사건 다음해 2월 신선조를 탈주하지만 오오츠에서 잡혀 할복을 명받는다. 카이샤쿠는 오키타로 훌륭한 할복이었다고 한다.
초기필두국장 세리자와 카모 분세이 10년(1827)(?)~분큐3년(1863) 9월 18일 / 34~5세?
미토 낭사로 천구당 일원이었다고 전해지는 신선조 결성 당시 초기필두국장. 체구가 크고 신도무념류의 달인이었다. 언제나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흉폭해졌다고 한다. 너무나 난폭했던 탓에 아이즈번으로부터 지시받아 토시조들이 숙청했다고 한다.
Ⅱ. 이케다야 사건
겐지원년(1864) 6월.
8.18정변으로 조정으로부터 멀어진 죠슈는, 교토의 명물 기온마츠리에 맞추어 교토에 불을 지르고 천황을 죠슈로 옹립한다는 교토 대방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계획이 유신지사들 사이에서 퍼지게 되며 도사의 낭인들이 합세하게 되었다.
6월 5일 이른 아침. 상인 후루타카
  • 가격1,2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6.06.03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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