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 머 리 말
2. 본 론 - 송 나 라 ( 서기 960 ~ 1279 )
Ⅰ - 1. 송의 사회적 배경
Ⅰ- 2. 송의 시대적 특징
Ⅰ- 3. 송의 경제 <장원경제의 쇠퇴와 상품경제의 발달>
Ⅰ- 4. 송의 사회 <시민 사회>
Ⅰ- 5. 송의 문화 <자유 문화>
Ⅰ- 6. 송나라의 예술
가. 대성 아악
나. 교방악
다. 사악
Ⅰ- 7. 송의 대외관계
가. 송과 고려의 대외관계
Ⅰ- 8. 송의 멸망
Ⅱ. 고려 시대
Ⅱ- 1. 고려의 시대적 배경
가. 고려의 귀족적 성격
나. 고려의 신분 사회적 성격
다. 고려의 불교적 성격
라. 고려의 대외적 성격
Ⅱ - 2. 고려의 문화
가. 연등회와 팔관회
나. 나례와 산대잡희
다. 무속
Ⅱ- 3. 고려의 예술
가. 음악 - 향악
나. 음악 - 당악
다. 음악 - 아악
라. 고려의 음악 기관
마. 고려 음악의 특징
바. 고려의 무용 - 정재무
사. 정재무의 내용
아. 일무
Ⅱ - 4. 고려의 멸망
3. 결론
Ⅲ.송나라와 고려와의 연계성
Ⅳ. 과제 후기
Ⅴ. 참고 문헌
2. 본 론 - 송 나 라 ( 서기 960 ~ 1279 )
Ⅰ - 1. 송의 사회적 배경
Ⅰ- 2. 송의 시대적 특징
Ⅰ- 3. 송의 경제 <장원경제의 쇠퇴와 상품경제의 발달>
Ⅰ- 4. 송의 사회 <시민 사회>
Ⅰ- 5. 송의 문화 <자유 문화>
Ⅰ- 6. 송나라의 예술
가. 대성 아악
나. 교방악
다. 사악
Ⅰ- 7. 송의 대외관계
가. 송과 고려의 대외관계
Ⅰ- 8. 송의 멸망
Ⅱ. 고려 시대
Ⅱ- 1. 고려의 시대적 배경
가. 고려의 귀족적 성격
나. 고려의 신분 사회적 성격
다. 고려의 불교적 성격
라. 고려의 대외적 성격
Ⅱ - 2. 고려의 문화
가. 연등회와 팔관회
나. 나례와 산대잡희
다. 무속
Ⅱ- 3. 고려의 예술
가. 음악 - 향악
나. 음악 - 당악
다. 음악 - 아악
라. 고려의 음악 기관
마. 고려 음악의 특징
바. 고려의 무용 - 정재무
사. 정재무의 내용
아. 일무
Ⅱ - 4. 고려의 멸망
3. 결론
Ⅲ.송나라와 고려와의 연계성
Ⅳ. 과제 후기
Ⅴ. 참고 문헌
본문내용
관계되어 붙인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또 당악이나 향악이라 말할 때 음악 뿐 아니라 춤과 악기를 모두 합친 뜻을 가진다.
고려 때 들어온 송나라의 음악은 교방악과 사악 두 형식의 음악이다. 11대 문종 27년에 포구락, 구장기별기, 왕모대가 들어왔으며, 1078 ~ 1085년 사이에 송나라에서 음악인을 초청하여 송나라 음악을 가르치게 하였다. 송에서 들어온 포구락과 구장기별기는 1073년 팔관회에서 공연되었고, 1077년 연등회에서 왕모대가 공연될 만큼 교방악이 큰 행사에 쓰였다. 고려 때의 교방악에는 포구락, 왕모대, 헌선도, 수연장, 연화대, 구장기별기, 오양선 이 있다.
다. 음악 - 아악
제 16대 예종 8년(1114년) 사신 안직숭이 귀국할 때 송나라 휘종이 신악기와 악보 및 지결도를 보냈는데, 악기에는 철방향, 석방향, 비파, 오현, 쌍현, 쟁, 공후, 피리, 적, 지, 소, 포생, 훈, 대고, 장구, 박판이 있고 악보와 지결도 각 10권을 보냈는데 이 악기 중에서 훈, 지, 소는 아악기이고 나머지는 속악기로서 당악에 편성되는 악기들이다. 이 악기들은 신악기, 음악을 신악이라 하였고 1114년 10월 태묘 제례에 그 동안 연주해왔던 향악과 함께 사용하였으며, 신악기는 점차 당악기로 사용되었다. 신악기를 보내준 데 대한 하례사로 가있던 추밀원지주 왕자지와 호부낭중 문공미가 예종 11년(1116년) 6월에 귀국하는 길에 송의 휘종이 대성아악을 보냈다. 이것이 중국의 아악이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사레로서 대성악 또는 대성신악이라고 한다. 대성악기는 등가악기와 헌가 악기로 나뉜다. 악기 외에도 연주의 시작과 끝냄을 알리는 휘번과 무구, 의물, 의관, 무의 등 대성악 연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어 보냈으며, 고려에 들어온 대성악은 예종 11년 10월에 태묘제사에 연주되었고 예종 다음 임금인 제 17대 인종 12년 1월 적전에 연주되었다. 대성악은 태묘를 비롯하여 원구, 사직과 중간 제사의 선농, 선잠, 문선왕묘 제례때도 편성 연주되었다. 송에서 들어온 대성악은 태묘를 비롯한 궁중의 중요한 제사에 연주되었으나 제 19대 명종 이후 제도가 불완전하게 되어 제례 절차의 아헌, 종헌, 송신에 향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즉 명종 18년 2월에 직업을 바꾸고 도피한 아악연주자들로 하여금 본업으로 돌아오도록 명령을 내릴 만큼 예종, 인종, 의종 약 3대 70년간 지속되어온 악기 편성와 음악 춤의 제도와 절도 등 아악이 부실하고 문란해졌다. 더욱이 송이 금의 침입을 받아 국내라 혼란해지고 의종 말엽에는 유신들이 함부로 제도를 바꾸었으며, 나라의 권력으로 아악 연주자들을 아악 연주에 참여시켰으므로 노래하는 사람은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악보만 외우는 정도였다. 아악이 본래의 제도대로 연주되지 않게 되자 승지 서온을 송나라에 보내 춤을 배워오게 하여 아악의 제도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도 있었으나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제 31대 공민왕 8년(1359)에 홍건적의 난으로 말미암아 서울을 옮긴 후 악공이 각지로 흩어져서 부실하게 이어져 오던 아악은 더욱 문란해졌다. 홍건적이 두 번째로 침입한 1361년 5월에 구실의 신주를 태묘에 다시 모시고 악장을 지었다. 1370년 5월 성준득이 명나라로부터 돌아올 때 명나라의 태조가 편종16틀, 편경 16틀, 생, 소, 금, 슬, 배소 각 1대씩을 보냈으며 7월에는 강사찬을 명에 파견하여 여러 음악에 정통하고 기예가 뛰어난 사람을 초청해서 음악을 전수하도록 하였다.이처럼 공민왕의 아악 복구 열의에도 불구하고 아악은 그 많은 악기와 의물 및 악공들을 법제대로 갖출 수는 없었다. 궁중 제례에 연주되었던 아악이 고려 마지막 임금인 제 34대 공양왕 원년 3월 조회에서 연주되었으며 아악은 고려말에 이르러선 거의 명맥만을 이어왔다.
라. 음악 - 음악 기관
고려의 국가 체계가 점차 잡혀가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그 체제와 이념에 맞는 음악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여기에 적절한 새로운 음악 기관이 설립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수시로 거행하게 되는 궁중의 여러 의식과 행사에는 반드시 음악을 연주하였으므로 국가 기관으로서의 음악 관청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했고 음악인들을 궁중에 상주시켜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인들의 교육과 훈련, 연주와 행정을 관장할 기관의 필요에 따라 신라에서는 음성서, 대악감이 설치되었었는데, 고려의 음악기관은 신라의 유풍을 이어받은 관계로 신라의 음성서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고려가 개국하고 궁중의 여러 의식에 음악이 연주되었기 때문에 음악인들이 궁중에 상주했으나 음악을 관리할 국가기관은 제 7대 목종 때(997~ 1009년) 대악서 설치가 처음이었다.
마. 고려 음악의 특징
중세, 즉 고려 음악의 특징은 아악을 들여와 국가적인 제례를 완비시켰으며 당악이 조회와 연례에 쓰임으로써 고대인 삼국 시대보다 훨씬 다양하고 찬란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러한 이러한 음악 문화는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송나라가 이룩한 것을 수입한 것뿐임으로 시대가 지남에 따라 자연히 소멸 또는 변화되어왔다. 한 편 사대주의의 여파로 천시되었던 향악은 속악으로 또는 우방악으로서 아악과 당악으로 채우지 못한 제례, 조회, 연례의 빈자리나 여밀 정도의 멸시를 받았으나 화려하고 위세가 당당하던 수많은 당악은 사라지고 아악은 쇠퇴하여 각종 제례에 연주되지 못하고 그 형태만을 유지한 채 근세의 조선조로 넘어간다.
바. 고려의 무용 - 정재무
궁중 연례용 춤을 정재무라고 하며, 제례용 춤을 일무라 하며, 정재무는 정재라고도 한다. 정재무는 우리나라 본래의 전통적 향악정재와 중국에서 발생하여 그 영향을 받았거나 개작된 당악정재가 있다.
당악정재는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이 무용수를 인도하여 무대로 나오는데, 향악정재는 죽간자가 없이 무용수가 바로 무대로 나온다. 당악 정재는 한문으로 된 치어와 구호가 춤추기 앞에서와 후에 있는데 반하여, 향악정재는 치어와 구호가 없고 우리말로 된 간단한 노래를 부른다. 또 당악정재는 춤이 끝나면 치어와 구호를 부른 다음 죽간자가 인도하여 퇴장하는데 향악정재는 춤이 끝나면 허리를 굽혀 절하고 뒷걸음으로
고려 때 들어온 송나라의 음악은 교방악과 사악 두 형식의 음악이다. 11대 문종 27년에 포구락, 구장기별기, 왕모대가 들어왔으며, 1078 ~ 1085년 사이에 송나라에서 음악인을 초청하여 송나라 음악을 가르치게 하였다. 송에서 들어온 포구락과 구장기별기는 1073년 팔관회에서 공연되었고, 1077년 연등회에서 왕모대가 공연될 만큼 교방악이 큰 행사에 쓰였다. 고려 때의 교방악에는 포구락, 왕모대, 헌선도, 수연장, 연화대, 구장기별기, 오양선 이 있다.
다. 음악 - 아악
제 16대 예종 8년(1114년) 사신 안직숭이 귀국할 때 송나라 휘종이 신악기와 악보 및 지결도를 보냈는데, 악기에는 철방향, 석방향, 비파, 오현, 쌍현, 쟁, 공후, 피리, 적, 지, 소, 포생, 훈, 대고, 장구, 박판이 있고 악보와 지결도 각 10권을 보냈는데 이 악기 중에서 훈, 지, 소는 아악기이고 나머지는 속악기로서 당악에 편성되는 악기들이다. 이 악기들은 신악기, 음악을 신악이라 하였고 1114년 10월 태묘 제례에 그 동안 연주해왔던 향악과 함께 사용하였으며, 신악기는 점차 당악기로 사용되었다. 신악기를 보내준 데 대한 하례사로 가있던 추밀원지주 왕자지와 호부낭중 문공미가 예종 11년(1116년) 6월에 귀국하는 길에 송의 휘종이 대성아악을 보냈다. 이것이 중국의 아악이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사레로서 대성악 또는 대성신악이라고 한다. 대성악기는 등가악기와 헌가 악기로 나뉜다. 악기 외에도 연주의 시작과 끝냄을 알리는 휘번과 무구, 의물, 의관, 무의 등 대성악 연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어 보냈으며, 고려에 들어온 대성악은 예종 11년 10월에 태묘제사에 연주되었고 예종 다음 임금인 제 17대 인종 12년 1월 적전에 연주되었다. 대성악은 태묘를 비롯하여 원구, 사직과 중간 제사의 선농, 선잠, 문선왕묘 제례때도 편성 연주되었다. 송에서 들어온 대성악은 태묘를 비롯한 궁중의 중요한 제사에 연주되었으나 제 19대 명종 이후 제도가 불완전하게 되어 제례 절차의 아헌, 종헌, 송신에 향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즉 명종 18년 2월에 직업을 바꾸고 도피한 아악연주자들로 하여금 본업으로 돌아오도록 명령을 내릴 만큼 예종, 인종, 의종 약 3대 70년간 지속되어온 악기 편성와 음악 춤의 제도와 절도 등 아악이 부실하고 문란해졌다. 더욱이 송이 금의 침입을 받아 국내라 혼란해지고 의종 말엽에는 유신들이 함부로 제도를 바꾸었으며, 나라의 권력으로 아악 연주자들을 아악 연주에 참여시켰으므로 노래하는 사람은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악보만 외우는 정도였다. 아악이 본래의 제도대로 연주되지 않게 되자 승지 서온을 송나라에 보내 춤을 배워오게 하여 아악의 제도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도 있었으나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제 31대 공민왕 8년(1359)에 홍건적의 난으로 말미암아 서울을 옮긴 후 악공이 각지로 흩어져서 부실하게 이어져 오던 아악은 더욱 문란해졌다. 홍건적이 두 번째로 침입한 1361년 5월에 구실의 신주를 태묘에 다시 모시고 악장을 지었다. 1370년 5월 성준득이 명나라로부터 돌아올 때 명나라의 태조가 편종16틀, 편경 16틀, 생, 소, 금, 슬, 배소 각 1대씩을 보냈으며 7월에는 강사찬을 명에 파견하여 여러 음악에 정통하고 기예가 뛰어난 사람을 초청해서 음악을 전수하도록 하였다.이처럼 공민왕의 아악 복구 열의에도 불구하고 아악은 그 많은 악기와 의물 및 악공들을 법제대로 갖출 수는 없었다. 궁중 제례에 연주되었던 아악이 고려 마지막 임금인 제 34대 공양왕 원년 3월 조회에서 연주되었으며 아악은 고려말에 이르러선 거의 명맥만을 이어왔다.
라. 음악 - 음악 기관
고려의 국가 체계가 점차 잡혀가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그 체제와 이념에 맞는 음악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여기에 적절한 새로운 음악 기관이 설립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수시로 거행하게 되는 궁중의 여러 의식과 행사에는 반드시 음악을 연주하였으므로 국가 기관으로서의 음악 관청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했고 음악인들을 궁중에 상주시켜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인들의 교육과 훈련, 연주와 행정을 관장할 기관의 필요에 따라 신라에서는 음성서, 대악감이 설치되었었는데, 고려의 음악기관은 신라의 유풍을 이어받은 관계로 신라의 음성서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고려가 개국하고 궁중의 여러 의식에 음악이 연주되었기 때문에 음악인들이 궁중에 상주했으나 음악을 관리할 국가기관은 제 7대 목종 때(997~ 1009년) 대악서 설치가 처음이었다.
마. 고려 음악의 특징
중세, 즉 고려 음악의 특징은 아악을 들여와 국가적인 제례를 완비시켰으며 당악이 조회와 연례에 쓰임으로써 고대인 삼국 시대보다 훨씬 다양하고 찬란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러한 이러한 음악 문화는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송나라가 이룩한 것을 수입한 것뿐임으로 시대가 지남에 따라 자연히 소멸 또는 변화되어왔다. 한 편 사대주의의 여파로 천시되었던 향악은 속악으로 또는 우방악으로서 아악과 당악으로 채우지 못한 제례, 조회, 연례의 빈자리나 여밀 정도의 멸시를 받았으나 화려하고 위세가 당당하던 수많은 당악은 사라지고 아악은 쇠퇴하여 각종 제례에 연주되지 못하고 그 형태만을 유지한 채 근세의 조선조로 넘어간다.
바. 고려의 무용 - 정재무
궁중 연례용 춤을 정재무라고 하며, 제례용 춤을 일무라 하며, 정재무는 정재라고도 한다. 정재무는 우리나라 본래의 전통적 향악정재와 중국에서 발생하여 그 영향을 받았거나 개작된 당악정재가 있다.
당악정재는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이 무용수를 인도하여 무대로 나오는데, 향악정재는 죽간자가 없이 무용수가 바로 무대로 나온다. 당악 정재는 한문으로 된 치어와 구호가 춤추기 앞에서와 후에 있는데 반하여, 향악정재는 치어와 구호가 없고 우리말로 된 간단한 노래를 부른다. 또 당악정재는 춤이 끝나면 치어와 구호를 부른 다음 죽간자가 인도하여 퇴장하는데 향악정재는 춤이 끝나면 허리를 굽혀 절하고 뒷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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