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신여성의 변화된 성관념과 가정생활
● 연애와 결혼에서의 자유
● 가족관의 변화와 가정 생활
2. 인텔리 전문직 신여성의 사회생활
● 양식 외모에 성과 이름도 미국식
● 의사, 교사, 기자 등 전문직 신여성
3.서비스 여성직과 제조업 여공의 삶
● 서비스 여성직의 고충
● 제조업 생산직 여공의 희생
4. 여성 농어민 등 하층여성의 삶
● 여성 농민의 강도 높은 노동생활
● 여성 어민의 강인한 삶
● 자영업과 행상 여성의 고달픔
결론
본론
1.신여성의 변화된 성관념과 가정생활
● 연애와 결혼에서의 자유
● 가족관의 변화와 가정 생활
2. 인텔리 전문직 신여성의 사회생활
● 양식 외모에 성과 이름도 미국식
● 의사, 교사, 기자 등 전문직 신여성
3.서비스 여성직과 제조업 여공의 삶
● 서비스 여성직의 고충
● 제조업 생산직 여공의 희생
4. 여성 농어민 등 하층여성의 삶
● 여성 농민의 강도 높은 노동생활
● 여성 어민의 강인한 삶
● 자영업과 행상 여성의 고달픔
결론
본문내용
가 어려워졌다. 제주도의 해녀는 원산 근해에서 소라, 전복, 기타 해초를 채취하여 하루 평균 높은 수입을 보이기도 하였다. 임신기의 제주 해녀들을 보호하기위해 만들어진 제주해녀어업조합이 창설되었는데 이는 오히려 해녀활동을 여러 가지로 점점 제약하게 되어 해녀들의 원성과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1927년에는 해녀 어업을 총독부에서 해초 채취업 허가제로 제한하고, 해초 번식과 보호를 위한 채취 어업세가 크게 인상되어 경남, 전남, 제주 해녀들은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전남 무안군 태도(苔島)에서 해녀조합이 생기이후, 제주 해녀의 계속되는 침입 방지와 극심한 저임금 철회를 요청하며 주민들이 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무안 해녀 170여 명이 파업하였고, 그 밖에 여수군 지역의 출가한 제주도 해녀와 지원(地元)어업조합 소속 일본 어민이 출가료를 둘러싸고 분규하였다.
또한 고래 남획방지와 번식을 위해 1931년 5월 경북 도령 지방에 대해 만 3년간 포획을 엄금하자 고래 통조림 공장에서는 해녀 수를 제한하였고, 잠수선은 단속 때문에 적기를 내걸었다고 한다.
이렇듯 어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험난한 바다를 드나들며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희생을 마지 않았으며 일제의 일본인의 독점권과 착취에 대항하여 그들의 생존권을 위한 ‘제주해녀항일투쟁’ 제주해녀 항일운동은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세화리.종달리. 우도면.성산포등지의 해녀들이 일제의 수탈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항일운동으로서 지역청년,일반농민들도 함께 합세하여 일제의수탈정책에 항거하여일어났던 항일운동입니다. 일제의어업조합에서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 일본상인에게 독점판매와 유통 가격조정등의 특혜를주고 육지부 출가증명서발급 수수료징수등 엄청난 수탈을 자행 1931년11월 제주도사에게 9개항의 시정사항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하자 1932년 1월 7일도사순시에 맞추어일어났던항일투쟁
과 같은 집단 항일 투쟁 운동을 하며 그들의 삶을 보장 받고자 하였다.
● 자영업과 행상 여성의 고달픔
1909년 서울의 부인들이 모여 주조와 재봉 등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였고, 1910년 대구애국부인회에서는 여성실업의 필요함을 강조하고 염직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외에도 ‘부인경제회’(1909), ‘부인실업상회’(1910)등을 조직하여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들의 연대를 도모하였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스스로 회사를 경영하고, 여성에게 고용 기회를 제공하는 등 독자적인 경제활동을 시도하였다.
자영업을 하는 여성들은 스스로 영업 기술을 익히고 유통 과정을 파악하여 자기 상점을 독자적으로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체적인 경제활동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수입은 그들의 적극적인 사업 수완과 경영 능력에 따라 좌우되었으며, 고급 상점에 속하는 부인양복점에서부터 수산물 판매상점이나 포목상점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영업을 하는 여성도 있었다.
특히 이준 이준(1859~1907) :순국열사, 애국계몽운동가
열사의 부인 이일정의 안국동 상점에 이어 동아부인상회, 경성소비조합의 구판장 설치, 여성 노동운동의 성과로 나온 여성직공조합의 공장 설립, 조신성 중심의 평양근우회에서 여성 실업회사 기획등이 여성 기업인의 싹을 보였다.
1938년 당시 자본금 60만원의 주식회사 천향각호텔 사장 김옥교의 경우, 기녀출생이라는 신분에서 요리점, 그리고 호텔까지 세워 성공을 이룬 인물이다. 그러나 일제 시기 여성 실업으로는 성공한 사례는 아주 드물다.
또한 일제의 무모한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많은 여성들은 특별한 기술이나 자본이 없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보따리 장사와 광주리 장사로 나설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여성들의 숫자는 늘어갔지만 남성 중심의 영업세계에서 여성들은 여러 가지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결론
이상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 여성들의 변화된 삶을 전문교육을 받은 신여성들과 전문직 여성들 그리고 산업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희생되어진 여성 노동자들과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 속에서 변화된 모습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일단 그들은 새로운 여성 해방사상에 접하고 자신들의 생활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원하든 아니든 직업 전선에 내몰리기도 하고 경쟁에 맞부딪혀 싸워나가야 했다.
여성들은 집안 살림이 여성에게 떠맡겨진 상황에서 남편의 부재와 집안 생계유지를 위해 선택한 일자리 등에서도 고충을 겪는 이중 삼중의 부담을 져야 했다. 또한 직업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앞에서 살펴 보았던 여러 직업 속의 여성들 중 남성들에게 시달렸던 전화 교환수나 사치와 문람함의 대명사로 인식 받았던 기생이나 여급들 그리고 환자 및 남자 의사의 오만함을 견뎌야 했던 간호사등 직업 여성에 대한 차별문제는 끝이 없었다. 여성이 직업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들 여성 노동자들의 직업은 대부분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임시직이 많았다. 보다 산업화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생산의 침체와 인구 증가로 인해 직장을 가진 여성들도 항상 실업의 위기에 노출되었다. 그로 인해 여성들은 사회 일선으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라 단순한 생계 보조자로 인식이 되어 최저 생존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에다가 12시간 이상 장시간의 노동 착취를 당하였지만 대다수 여성들은 이런 취업조차 용이하지 않은 현실이었다.
근대 이후 여성이 경제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원인은 가난을 벗어나고자하는 각자의 경제적 압박 속에서 혹은 일제의 전시체제에 동원되기 위한 물자를 공급하는 공장에서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유에서였다. 동시에 소수의 전문 교육을 받은 전문직 여성뿐만 아니라 하위 생산직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여성 모두 다 기존의 사회적 관념에서 오는 사회적 편견과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오는 어려움을 감수 하여야만 했다. 또 일제 시기 후반 그들은 더욱 열악한 사회적 조건 속에 전시체제의 후방 여성으로 총동원체제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일제 식민지 하에서 우리의 여성들은 자신을 둘러싼 식민지 가부장제의 굴레를 극복하기 어려웠고 민족적계급적성적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중첩된 억압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하는 현실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전남 무안군 태도(苔島)에서 해녀조합이 생기이후, 제주 해녀의 계속되는 침입 방지와 극심한 저임금 철회를 요청하며 주민들이 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무안 해녀 170여 명이 파업하였고, 그 밖에 여수군 지역의 출가한 제주도 해녀와 지원(地元)어업조합 소속 일본 어민이 출가료를 둘러싸고 분규하였다.
또한 고래 남획방지와 번식을 위해 1931년 5월 경북 도령 지방에 대해 만 3년간 포획을 엄금하자 고래 통조림 공장에서는 해녀 수를 제한하였고, 잠수선은 단속 때문에 적기를 내걸었다고 한다.
이렇듯 어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험난한 바다를 드나들며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희생을 마지 않았으며 일제의 일본인의 독점권과 착취에 대항하여 그들의 생존권을 위한 ‘제주해녀항일투쟁’ 제주해녀 항일운동은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세화리.종달리. 우도면.성산포등지의 해녀들이 일제의 수탈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항일운동으로서 지역청년,일반농민들도 함께 합세하여 일제의수탈정책에 항거하여일어났던 항일운동입니다. 일제의어업조합에서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 일본상인에게 독점판매와 유통 가격조정등의 특혜를주고 육지부 출가증명서발급 수수료징수등 엄청난 수탈을 자행 1931년11월 제주도사에게 9개항의 시정사항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하자 1932년 1월 7일도사순시에 맞추어일어났던항일투쟁
과 같은 집단 항일 투쟁 운동을 하며 그들의 삶을 보장 받고자 하였다.
● 자영업과 행상 여성의 고달픔
1909년 서울의 부인들이 모여 주조와 재봉 등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였고, 1910년 대구애국부인회에서는 여성실업의 필요함을 강조하고 염직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외에도 ‘부인경제회’(1909), ‘부인실업상회’(1910)등을 조직하여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들의 연대를 도모하였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스스로 회사를 경영하고, 여성에게 고용 기회를 제공하는 등 독자적인 경제활동을 시도하였다.
자영업을 하는 여성들은 스스로 영업 기술을 익히고 유통 과정을 파악하여 자기 상점을 독자적으로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체적인 경제활동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수입은 그들의 적극적인 사업 수완과 경영 능력에 따라 좌우되었으며, 고급 상점에 속하는 부인양복점에서부터 수산물 판매상점이나 포목상점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영업을 하는 여성도 있었다.
특히 이준 이준(1859~1907) :순국열사, 애국계몽운동가
열사의 부인 이일정의 안국동 상점에 이어 동아부인상회, 경성소비조합의 구판장 설치, 여성 노동운동의 성과로 나온 여성직공조합의 공장 설립, 조신성 중심의 평양근우회에서 여성 실업회사 기획등이 여성 기업인의 싹을 보였다.
1938년 당시 자본금 60만원의 주식회사 천향각호텔 사장 김옥교의 경우, 기녀출생이라는 신분에서 요리점, 그리고 호텔까지 세워 성공을 이룬 인물이다. 그러나 일제 시기 여성 실업으로는 성공한 사례는 아주 드물다.
또한 일제의 무모한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많은 여성들은 특별한 기술이나 자본이 없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보따리 장사와 광주리 장사로 나설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여성들의 숫자는 늘어갔지만 남성 중심의 영업세계에서 여성들은 여러 가지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결론
이상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 여성들의 변화된 삶을 전문교육을 받은 신여성들과 전문직 여성들 그리고 산업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희생되어진 여성 노동자들과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 속에서 변화된 모습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일단 그들은 새로운 여성 해방사상에 접하고 자신들의 생활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원하든 아니든 직업 전선에 내몰리기도 하고 경쟁에 맞부딪혀 싸워나가야 했다.
여성들은 집안 살림이 여성에게 떠맡겨진 상황에서 남편의 부재와 집안 생계유지를 위해 선택한 일자리 등에서도 고충을 겪는 이중 삼중의 부담을 져야 했다. 또한 직업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앞에서 살펴 보았던 여러 직업 속의 여성들 중 남성들에게 시달렸던 전화 교환수나 사치와 문람함의 대명사로 인식 받았던 기생이나 여급들 그리고 환자 및 남자 의사의 오만함을 견뎌야 했던 간호사등 직업 여성에 대한 차별문제는 끝이 없었다. 여성이 직업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들 여성 노동자들의 직업은 대부분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임시직이 많았다. 보다 산업화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생산의 침체와 인구 증가로 인해 직장을 가진 여성들도 항상 실업의 위기에 노출되었다. 그로 인해 여성들은 사회 일선으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라 단순한 생계 보조자로 인식이 되어 최저 생존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에다가 12시간 이상 장시간의 노동 착취를 당하였지만 대다수 여성들은 이런 취업조차 용이하지 않은 현실이었다.
근대 이후 여성이 경제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원인은 가난을 벗어나고자하는 각자의 경제적 압박 속에서 혹은 일제의 전시체제에 동원되기 위한 물자를 공급하는 공장에서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유에서였다. 동시에 소수의 전문 교육을 받은 전문직 여성뿐만 아니라 하위 생산직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여성 모두 다 기존의 사회적 관념에서 오는 사회적 편견과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오는 어려움을 감수 하여야만 했다. 또 일제 시기 후반 그들은 더욱 열악한 사회적 조건 속에 전시체제의 후방 여성으로 총동원체제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일제 식민지 하에서 우리의 여성들은 자신을 둘러싼 식민지 가부장제의 굴레를 극복하기 어려웠고 민족적계급적성적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중첩된 억압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하는 현실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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