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결론
인터뷰자료
본론
결론
인터뷰자료
본문내용
는 주관적인 기억에 의존하는 것인데 이러한 점은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큰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역사라는 것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의 의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우는가?’ 하는 질문을 하였을 때 흔히 ‘과거 경험의 축척을 통한 미래의 지침서’로써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당시의 사건과 기록을 실증적으로만 연구한다면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국한적일 수밖에 없다. 당시 일들을 경험한 사람들의 주관적인 감정과 기억된 내용들은 우리에게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더욱 가치 있게 할 것이다. 이번 기회로 책에서만 보고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과거의 기록들을 직접 체험 하고 돌아온 듯 하다.
물론 생각해 봐야할 문제는 개인적인 해석이 주관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는 문제이지만 왜곡되어 문제가 된다는 관점 자체가 거시적이고 실증적 시야를 벋어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구술사의 의의를 생각해보고 개인의 기억에 함유된 감정적 해석을 생각한다면 왜곡되었다고 생각되는 구술들 또한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구술사의 역사의 구조에 피가 흐르고 숨을 쉬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본인이 면담을 한 분은 현재 본인이 살고 있는 하숙집의 주인이다. 군대에 있었던 기간을 제외하고 무려 4년의 시간이나 같이 살았던 분이라 개인적으로는 편하게 면담을 할 수 있었으며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구술자는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66세 여성분으로 경기도 시흥에 있는 화정국민학교를 4회로 졸업 하였다. 현재 있는 화정국민하교는 70년대에 새로 설립된 학교이고 당시 학교는 폐교되었다고 한다. 중 고등학교도 경기도 시흥에서 다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6 25전쟁이 시작 되어 4학년 때 학교가 포탄을 맞아 부서져 1년간 움막에서 학교를 대신하였고 후에 재건축되어 학교를 졸업 후 중 고등학교를 거쳐 잠시 취업을 한 후에 결혼을 하게 되어 현재 2남 1녀를 두고 있다. 녹음과 필기를 병행하여 약 40분 2회 진행하였다. 이분의 구술을 기초로 현재 52세 50세 이시며 충청도에서 초중고를 다니신 본인 부모님의 구술을 참고하였다.
2. 본론
1. 해방기의 교육이념의 혼란
교육이념이란 한 사회의 모든 교육정책, 교육제도, 교육내용 등 교육방법등을 포함하는 교육의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신념의 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교육이념은 모든 교육적 행위의 방향을 제시하는 구체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어야 하고 모든 교육적 행위의 결과에 대한 평가의 준거가 되는 사회 윤리적 가치체계를 드러내야한다.
교육이념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 볼 때 해방 후의 한국교육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홍익인간의 건국이상에 기하여 인격이 완전하고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주국가의 공민을 양성함‘ 이라고 하는 교육이념이 미군정하에서 조선 교육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1946년 초에 채택되고 1949년에 제정된 교육법 제 1조에 그대로 반영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홍익인간을 핵심으로 하는 우리의 교육이념은 우선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 교육적 행위나 사회 변화의 방향을 제시해 주거나 교육적 변화에 대한 가치 판단의 구체적 기준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설정된 국가이념의 현실 구속력 약화는 교육정책의 무방향성을 가속화 시켰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사회 구성원 각자는 교육이 지닌 공공성을 인식하기보다는 교육이 지닌 수단 가치만을 추구하는 모순을 가져왔다. 우리의 공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국가 권력은 교육개혁을 단행할 때 마다 사회구성원 모두의 전인적이고 인격적인 발달을 최고의 교육목적으로 강조해왔지만 실제로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국가권력에 의한 교육의 수단화를 오랫동안 경험해왔다. 이렇게 국가 그리고 국가 구성원 각자가 보여주는 교육이념이나 목적과 관련된 이중성은 우리 교육의 성격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이는 민주적 교육이 나 목표의 부재에서 야기된 현상인 동시에 현실적으로 민주적 교육이념의 정립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2. 해방이후의 교육의 양적 성장
한국교육은 해방이후 양적인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해방과 함께 교육기회에 대한 인위적 제한과 차별이 사라지자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폭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들 학교를 보내려도 부모님들이 그랬나요? 글쎄 대부분 초등학교정도는 당연히 가는 거라고 생각 했던 것 같아. 고등학교는 한반에 43명 정도 갔던 것 같은데 못가는 애들도 있으니까 좀 줄었던 것 같아.
그럼 형제들도 학교 다 다니셨나요?
아니 오빠하나 언니둘이 있는데 나이가 무지하게 많아서 학교 안다녔지. 다 시집장가 갔을 때니까. 내가 조카랑 같이 다녔으니까. 지금 80이 넘었지 오빠가
--4학년 때가 625때네요.
전쟁 때 학교가 부서져서 부모들이 움막에 흙벽돌로 만들어서 아 여름에 아주 시원했어.
--그럼 책상은 있었어요?
책상은 없지. 가마때기 깔고 했지.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고 좋아.
거의 취학하지 않았던 시골의 모습에서 길지 않은 기간동안 취학률의 급증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학부모들이 자녀의 교육을 매우 중요시 하여 전시에도 학교는 꼭 보내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쨌든 국가에서는 열악한 국가 경제하에서 이러한 교육열을 수용하기 위한 많은 교육적 임시 조처들이 취해졌다. 2부제 및 3부제 수업 실시, 야간 학교제도의 도입, 공민학교의 설치, 학급당 학생수의 최대화, 단기교사 양성 기관의 확충, 미취학 아동의 초등학교 전원 수용 정책 등이 최저 비용으로 교육열을 최대한 흡수하는 정책들이었다. 국가에 의한 장기교육 구상이나 이를 토대로 한 교육투자의 체계적 확대에 의하기보다는 가계 부문으로부터의 과다한 사교육비 강제에 의해 교육의 양적 확대가 가능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지역에 따라 많은 편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울은 더욱 그러하겠지만 50년대에 거의 대부분 중학교 까지는 당연히 갔다는 구술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실 좀 의아 했는데 그 이유는 본인의 아버지와 전화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현재 53세 이신데도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의 진학률이 50퍼센트 정도 밖에 안
물론 생각해 봐야할 문제는 개인적인 해석이 주관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는 문제이지만 왜곡되어 문제가 된다는 관점 자체가 거시적이고 실증적 시야를 벋어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구술사의 의의를 생각해보고 개인의 기억에 함유된 감정적 해석을 생각한다면 왜곡되었다고 생각되는 구술들 또한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구술사의 역사의 구조에 피가 흐르고 숨을 쉬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본인이 면담을 한 분은 현재 본인이 살고 있는 하숙집의 주인이다. 군대에 있었던 기간을 제외하고 무려 4년의 시간이나 같이 살았던 분이라 개인적으로는 편하게 면담을 할 수 있었으며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구술자는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66세 여성분으로 경기도 시흥에 있는 화정국민학교를 4회로 졸업 하였다. 현재 있는 화정국민하교는 70년대에 새로 설립된 학교이고 당시 학교는 폐교되었다고 한다. 중 고등학교도 경기도 시흥에서 다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6 25전쟁이 시작 되어 4학년 때 학교가 포탄을 맞아 부서져 1년간 움막에서 학교를 대신하였고 후에 재건축되어 학교를 졸업 후 중 고등학교를 거쳐 잠시 취업을 한 후에 결혼을 하게 되어 현재 2남 1녀를 두고 있다. 녹음과 필기를 병행하여 약 40분 2회 진행하였다. 이분의 구술을 기초로 현재 52세 50세 이시며 충청도에서 초중고를 다니신 본인 부모님의 구술을 참고하였다.
2. 본론
1. 해방기의 교육이념의 혼란
교육이념이란 한 사회의 모든 교육정책, 교육제도, 교육내용 등 교육방법등을 포함하는 교육의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신념의 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교육이념은 모든 교육적 행위의 방향을 제시하는 구체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어야 하고 모든 교육적 행위의 결과에 대한 평가의 준거가 되는 사회 윤리적 가치체계를 드러내야한다.
교육이념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 볼 때 해방 후의 한국교육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홍익인간의 건국이상에 기하여 인격이 완전하고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주국가의 공민을 양성함‘ 이라고 하는 교육이념이 미군정하에서 조선 교육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1946년 초에 채택되고 1949년에 제정된 교육법 제 1조에 그대로 반영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홍익인간을 핵심으로 하는 우리의 교육이념은 우선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 교육적 행위나 사회 변화의 방향을 제시해 주거나 교육적 변화에 대한 가치 판단의 구체적 기준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설정된 국가이념의 현실 구속력 약화는 교육정책의 무방향성을 가속화 시켰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사회 구성원 각자는 교육이 지닌 공공성을 인식하기보다는 교육이 지닌 수단 가치만을 추구하는 모순을 가져왔다. 우리의 공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국가 권력은 교육개혁을 단행할 때 마다 사회구성원 모두의 전인적이고 인격적인 발달을 최고의 교육목적으로 강조해왔지만 실제로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국가권력에 의한 교육의 수단화를 오랫동안 경험해왔다. 이렇게 국가 그리고 국가 구성원 각자가 보여주는 교육이념이나 목적과 관련된 이중성은 우리 교육의 성격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이는 민주적 교육이 나 목표의 부재에서 야기된 현상인 동시에 현실적으로 민주적 교육이념의 정립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2. 해방이후의 교육의 양적 성장
한국교육은 해방이후 양적인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해방과 함께 교육기회에 대한 인위적 제한과 차별이 사라지자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폭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들 학교를 보내려도 부모님들이 그랬나요? 글쎄 대부분 초등학교정도는 당연히 가는 거라고 생각 했던 것 같아. 고등학교는 한반에 43명 정도 갔던 것 같은데 못가는 애들도 있으니까 좀 줄었던 것 같아.
그럼 형제들도 학교 다 다니셨나요?
아니 오빠하나 언니둘이 있는데 나이가 무지하게 많아서 학교 안다녔지. 다 시집장가 갔을 때니까. 내가 조카랑 같이 다녔으니까. 지금 80이 넘었지 오빠가
--4학년 때가 625때네요.
전쟁 때 학교가 부서져서 부모들이 움막에 흙벽돌로 만들어서 아 여름에 아주 시원했어.
--그럼 책상은 있었어요?
책상은 없지. 가마때기 깔고 했지.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고 좋아.
거의 취학하지 않았던 시골의 모습에서 길지 않은 기간동안 취학률의 급증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학부모들이 자녀의 교육을 매우 중요시 하여 전시에도 학교는 꼭 보내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쨌든 국가에서는 열악한 국가 경제하에서 이러한 교육열을 수용하기 위한 많은 교육적 임시 조처들이 취해졌다. 2부제 및 3부제 수업 실시, 야간 학교제도의 도입, 공민학교의 설치, 학급당 학생수의 최대화, 단기교사 양성 기관의 확충, 미취학 아동의 초등학교 전원 수용 정책 등이 최저 비용으로 교육열을 최대한 흡수하는 정책들이었다. 국가에 의한 장기교육 구상이나 이를 토대로 한 교육투자의 체계적 확대에 의하기보다는 가계 부문으로부터의 과다한 사교육비 강제에 의해 교육의 양적 확대가 가능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지역에 따라 많은 편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울은 더욱 그러하겠지만 50년대에 거의 대부분 중학교 까지는 당연히 갔다는 구술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실 좀 의아 했는데 그 이유는 본인의 아버지와 전화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현재 53세 이신데도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의 진학률이 50퍼센트 정도 밖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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