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에 관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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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도에 관한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독도의 환 경
가. 지리적 위치
나. 독도의 지형과 지질
다. 해저자원의 보고 독도

3. 역사속의 독도분쟁
가. 조선시대
나. 근 세
다. 광복이후

4. 일본과 우리의 입장
<일본의 주장>
가. 일본의 독도 영유권주장 논거
나. 일본 주장의 허구성
<우리의 주장>
가. 우리 정부의 입장
나. 우리의 주장 및 논거
지정학적 근거
역사적 근거
국제법상 근거
카이로 선언
국제사회 상황과 우리의 입장

5. 맺음말 : 우리의 자세

본문내용

형성된 화산암.
- 동해의 해저 지각활동에 의해 솟구친 용암이 오랜 세월동안 굳어지면서 생긴 화산성 해산. (실제로 2000M가 넘는 거대한 산봉우리)
- 해저산의 생성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세계적인 지질 유적.
다. 해저자원의 보고 독도
(1) 청정수역으로 황금어장 형성.
(2) 기상, 해양예보, 지구환경연구의 최적의 요지 및 군사적 요충지
(3) 천연가스, 석유 매장가능성 내포 (하이드레이트 발견)
※ 하이드레이트(Hydrates) : 석유, 천연가스층의 뚜껑역할을 하는 물질.
-하이드레이트(Gas Hydrate)란 천연가스의 주성분인 메탄이 얼음과 유사한 고체 상태로 매장된 것으로 수심 300m 이하 저온 고압상태의 심해 환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대체 에너지원.
- 석탄, 석유 등 화석에너지에 포함된 것 두 배 이상 많은 탄소함유.
- 하이드레이트의 매장량은 현재 천연가스 매장량의 100배 이상.
- 일본은 2001년부터 매년 100억엔 이상을 투입 재 30~40개의 담사장을 뚫는 단계. (하이드레이트의 중요성 인식 → 독도의 영유권 주장과 관계)
- 우리나라는 1996년 기초연구에 착수하여 2000년부터 동해지역에서 탐사를 시작해 광범위한 하이드레이트 매장을 간접 확인.
3. 역사속의 독도분쟁
※우리가 보통 역사 속에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안용복과 독도의용수비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이들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지배를 막은 역사속의 유일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중요성을 인지해야 함.
가. 조선시대
○ 1403년(태종3년)에 울릉도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수토정책」시행
○ 1407년 일본은 대마도인을 울릉도에 이주시켜 거주하게해서 대마도주인 자신이 통솔하게 해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이를 거절함
○ 임진왜란(1592~1597)을 틈타 울릉도는 일본인들에게 노략질을 당함
○ 1614년(광해군6년) 6월에 대마도주는 조선동래부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죽도를 탐사하려고 하는데 길안내를 부탁하였으나 이를 거절함.
○ 1615년 일본 배 2척이 와서 전년도 죽도와는 다른 섬인 의죽도라는 이름을 쓰면서 이 섬의 지형을 탐험하러 간다고 하였으나 또 거절함.
○ 조선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꾸가와 막부는 조선정부와 아무런 협의도 없이 1618년 오다니 가문과 무라까와 가문에 울릉도 도해면허를 주지만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조선정부는 별로 항의를 제기하지 않음은 물론 공도정책 으로 울릉도에 조선인이 거주하지도 않음을 기회로 두 가문의 배들은 거리낌 없이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와서 어로활동과 벌목활동을 벌임
○ 1656년경 오다니 가는 독도의 도해면허까지 획득
○ 1696년 안용복의 활동으로 도해가 금지되기까지 일본은 역사적 근거로는 78년 동안 불법어로, 벌목을 하며 울릉도, 독도에 무단으로 침입함.
○ 안용복의 1차 도일 : 1693(숙종19)년 울릉도에 어로 및 농사 활동을 하던 안용복은 오다니가의 어부들과 충돌하여 오끼도(현 오끼시마)까지 납치당하여, 돗토리성의 호끼슈 태수에게 이송되어지나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여 서계를 받아 에도, 나가사끼, 대마도를 거쳐 본국으로 보내어지게 됨. 이 과정에 나가사끼에서 서계를 빼앗기고 대마도에서는 50일 동안 가두었다가 동래 왜관으로 호송하였음 동래왜관에서 40일, 동래부로 인계되어 90일간 옥살이(도일행위)
○ 1차 안용복의 도일 때 일본이 보내온 문서
『“귀역의 바닷가 고기잡는 백성들이 해마도 본국의 죽도에 배를 타고 왔으므로, 우리의 지방관리가 나라에서 금하고 있음과 다시 와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렸는데도 올봄에 어민 40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으므로, 지방관리가 그중 2인을 잡아두고서 한때의 증거 인질로 삼으려고 했는데,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했으니 지금부터는 저 섬에 결단코 배를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더욱 금지령을 공고히 하여 두 나라 사이에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 이에 조선 정부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구조 속에서 강경 대응론과 온건 대응론으로 대립, 노론의 득세로 일본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대응책을 택하여 다음과 같은 나약하고 애매모한 답서를 보내게 됩니다.
『“아국에서 어민을 금지 단속하여 먼 바다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비록 우리나라의 울릉도라 하더라도 아득히 멀리 있는 이유로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하물며 그 밖의 섬이겠습니까? 지금 우리어선이 감히 귀국의 죽도에 들어가서 호송하는 번잡함에 이르고 멀리 서찰까지 보내게 했으니....... (생략)......난잡하게 고기를 잡는 것은 법으로써 마땅히 엄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므로 범인들을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과하고, 이후에는 연해 등지에 규칙을 엄격하게 시달 하여 이를 엄수토록 하겠습니다.”』
○ 1694년 갑술옥사로 소론정권이 들어서자 이에 대해 강경 대응책을 국왕에게 건의하여 다음과 같은 회서를 다시 보내게 된다.
『“우리나라 해변의 어민들이 이 섬에 갔는데, 의외에도 귀국사람들이 멋대로 침범해와 맞부딪히게 되자 도리어 우리나라 사람들을 에도까지 붙잡아 갔습니다......(생략)......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채하던 땅은 본시 울릉도로서 대나무가 생산되기 때문에 죽도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곧 하나의 섬을 두 가지로 부른 것입니다......(생략) 귀국 해안 사람들을 거듭 단속하여 울릉도에 오가며 다시 말썽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서로 좋게 지내는 의리에 있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 1694(숙종20)년9월 장한상이 울릉도 실태를 조사하여 독도의 위치를 정확히 하여 보고하였지만 백성을 이주시키지 않는 대신 1,2년에 한 번씩 순찰하는 정책시행.
○ 안용복의 2차도일 : 동래부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안용복은 자신의 1차도일의 결과를 증명하기위해 제2차 도일시도. 전라도 순천 송경사의 뇌헌 스님을 만나 울릉도에 출어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설득하여 배를 마련한 후에 그 배에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라는 깃발을 달고 당산관 관복인 남색 철릭과 흑포갓까지 준비하여 울릉도에서 어로작업중인 일본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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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7.04
  • 저작시기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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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57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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