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아랍연구]강대국의 식민통치 연구-영국과 프랑스의 통치 지역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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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아랍연구]강대국의 식민통치 연구-영국과 프랑스의 통치 지역을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제1차 세계 대전의 유럽과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1) 제 1 차 세계 대전 전의 유럽과 오스만 제국

Ⅲ. 제 1 차 세계 대전 중의 오스만 제국
(1) 대전의 발발
(2) 제 1 차 세계대전 오스만 제국의 5개전선
(3) 제 1 차 세계대전 중의 오스만제국의 비밀 협정

Ⅳ.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협정과 중동 국가 식민 분할 과정
(1) 중동 관련 협정
(2) 식민 분할 과정

Ⅴ. 유럽 강대국의 식민통치 유형
(1) 영국의 유형
→팔레스타인, 이라크, 트란스 요르단, 이집트, 수단
(2) 프랑스의 유형
→시리아, 레바논,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3) 이탈리아의 유형
→리비아

Ⅵ. 결론

본문내용

0년 4월 25일 셍리모협정으로 영국의 위임 통치 방침이 결정되자 민족주의자와 족장층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주로 이라크 지부 맹세(Al-Ahd al-Iraqiya)가 1914년 민족주의 장교들로 비밀리에 조직되었으며, 1920년 3월 다마스커스에서 개최된 전 시리아회의에 참가하여 압둘라를 이라크의 왕으로 옹립한 세력이다.
주동이 되어 대연합국 무력항쟁을 선언하고 이라크인의 성전참전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에 자극 받아 지방부족들과 아랍봉기군 출신 장교들이 반(反)영봉기에 적극 가담하였고 여기에 주민의 다수인 시아파 이슬람교도들도 가담하면서 그 세력이 이라크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바그다드, 바스라, 모술 3개 도시의 영국군 주둔지를 제외한 전 이라크가 대대적인 반영봉기에 돌입하였다. 영국은 두 차례에 걸쳐 실로 엄청난 손실을 감내하며 봉기를 겨우 진압하였다. 영국군의 사망자는 400여명, 부상자는 1,800여명 이었다. 또한 영국의 재정 손실은 4,000만 파운드로 이는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중 아랍 봉기군에 대한 지원의 3배 이상 되는 액수이다.
이 봉기를 제1차 세계대전중의 반오스만 아랍봉기에 이어 제2의 아랍봉기라고 불리 운다. 이라크의 이 봉기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영국의 대이라크, 나아가 대중동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래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영국제국건설을 계획하였으나 이를 포기하게 되었다. 영국은 이후 바그다드의 순니파 수장인 알 가이라니를 수상으로 임명하여 임시국무회의를 구상하였고 각 부서에는 여러 지역의 영향력 있는 가문과 종파에 따라 능력 있는 이라크인을 임명하였다.
영국은 1921년 3월에 열린 카이로회의에서 시리아를 빠져나온 파이살을 국왕에 추대했다. 당시 파이살은 아랍 민족주의의 지도자로 아랍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어서 파이살을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국민들의 반영감정을 유화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파이살은 이라크 정부 및 군부(아랍 반란의 참가자가 섞여 있다)의 찬성을 얻었고, 6월의 국민투표에서 96%라는 절대적인 지원을 받고 8월 23일 국왕에 추대되었다. 파이살은 지적이고 온건한 인품과 경험이 풍부하고 신중한 태도로 시리아 민중의 폭넓은 신뢰를 모아서 초창기의 이라크 건설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이로써 영국의 위임통치하의 이라크 왕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③ 트란스 요르단
트란스요르단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대 오스만터키 아랍봉기에 가담하여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리아와 함께 영국군과 아랍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트란스요르단은 1920년 3월 다마스커스 전시리아회의에서 선포된 대시리아 독립왕국에 포함된 지역이기도하다. 다마스커스 회의에 의하면 북부 암만(Amman)과 알 카락(al-karak)은 시리아 왕국에 귀속되었고 남부의 아카바(aqaba)와 마안(maan)은 헤자즈의 후세인 왕국에 귀속되었다. 서재만, 『제 1차대전 후 강대국의 대 아랍 전후처리에 관한 연구』(중동연구 제 15권 2호,1996) p, 16.
1920년 7월 파이살이 시리아에서 프랑스군에 의해 추방당하게 된 후 트란스 요르단은 무정부상태로 대단히 혼란하게 되었다. 이 때 1920년 4월 셍리모협정에서 결정된 사항에 따라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일부로서 트란스요르단의 위임 통치권을 갖고 같은 해 8월에 사무엘(Sir Herbert Samuel)을 요르단천 지역의 유력자와 회동하여 대표평의회를 제안하게 된다. 하지만 11월에 이라크에서 폐위된 압둘라가 트란스요르단의 남부 지역에서 다마스커스를 회복하기 위해 거병하고 1921년 3월 암만에 도착하였다. 영국은 이를 그냥 지켜보고 있었으나 트란스요르단의 지위권이 영국에 있고 그 지역에서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난다면 영국으로서도 대프랑스 관계가 곤경에 처할 수 있게 될 수 있었다.
이에 영국의 처칠식민상 등 카이로 회담 참석자들 사태에 심각성을 깨달고 예루살렘에서 압둘라와 회담을 하고 압둘라가 시리아로 진격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21년 3월 27일 요르단강 동안지역 즉 트란스요르단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국으로부터 분할하여 압둘라에게 태수직을 부여하고 트란스요르단의 잠정적 지배를 약속하였고, 5월 26일에는 트란스요르단 수장국의 창설을 발표하였다. 압둘라도 실제로 군사력으로 프랑스에 대적할 정도의 힘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수락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정책결정에는 ① 전쟁 중 영국이 하심가에 대한 약속의 일부를 지킴으로써 아랍인의 반영감정을 완화시키고 , ② 아랍군의 요르단을 거점으로 한 대 시리아 무력침공을 발생할 영국-프랑스간의 관계악화 가능성을 배제하게 되었으며 ③ 지중해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육로를 영국의 지배하에 두고 ④ 육로를 하심가 왕자들에게 위탁함으로서 하심가와의 우의를 다지게 되고 ⑤ 이 지역에 대한 제 3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등이 고려되었던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ibid., p. 17.
⑥또한 영국은 트란스요르단의 독립으로 페르시아만에서 아카바만 그리고 지중해를 잇는 지배가 확립되게 되었고 지중해와 페르시아만이 육로로 접속되어, 이곳에 대한 영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분명하게 되었다 유공조 『 중동분쟁사 』(서울 : 서원,1994) p. 111
이에 유대인들은 트란스요르단의 독립에 반대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발포어 선언에서 요르단에도 유대이민이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는데 트란스요르단의 독립으로 유대인의 이주가 요르단에도 적용될 수 있었으나 이를 실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은 팔세스타인 위임통치협정을 새롭게 수정하였다. 그 내용은 요르단천까지의 적용되었던 유대인들에 관한 규정을 삭제 하는 것이었고 이는 1922년 9월 16일 국제연맹 이사회에 각서로 제출되어 승인되었다.
그러나 트란스요르단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에 복속되었고 요르단의 위임통치는 팔레스타인의 사무엘 고등판무관이 겸임하였다.
④ 이집트
이집트는 다른 북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통치의 시대가 지속되지 않았다. 1883년부터 1907년까지 이집트 정부는 사실상 영국의 총영사로 파견된 크로머의 영향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1892년에 타우픽의 뒤를 이은 압바스 2세는 크로머의 독단과

키워드

식민통치,   식민지,   식민지배,   강대국,   열강,   아랍,   문화,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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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8.28
  • 저작시기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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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62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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