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 글
2. 통일 신라의 말기 그리고 후삼국 시대의 형성과 통일
3. 신라 사회의 폐쇄성
4. 후삼국 시대의 신분제 변동
1) 골품제를 탈피한 인재 등용
2) 지역차별에서 벗어난 인재등용
3) 성주의 자립
5. 후삼국 시대의 의의
6. 나오는 말
2. 통일 신라의 말기 그리고 후삼국 시대의 형성과 통일
3. 신라 사회의 폐쇄성
4. 후삼국 시대의 신분제 변동
1) 골품제를 탈피한 인재 등용
2) 지역차별에서 벗어난 인재등용
3) 성주의 자립
5. 후삼국 시대의 의의
6. 나오는 말
본문내용
.
5. 후삼국 시대의 의의
앞에서도 설명하였지만 신라 사회는 골품제를 기반으로 하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하지만 통일 신라 말기와 후삼국 시대는 신라의 통치력이 많이 상실되어 있었기에 지방에는 호족들이 난립하였다. 이렇게 신라가 혼란한 시대였기 때문에 신라 사회의 골품제는 예전처럼 힘을 발휘 할 수 없었다. 농민 출신이 장군이나 성주가 되었으며, 6두품 출신이 최고 관직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출신 신분, 출신 지역을 떠나 오로지 능력만을 중시하는 사회로 자의든 타의든 변한 것이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후삼국 각국의 중앙 정부에는 지방의 세력가였던 호족들이 많이 진출하였다. 경주의 진골 귀족 중심이었던 신라사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즉, 후삼국 시대에 경주 진골 중심의 사회였던 신라의 골품제 사회가 종말을 고하고 능력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지배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 광종(光宗)대에 이르러 ‘과거제도(科擧制度)’라는 제도적 확립이 되었다. 신분과는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과거는 제술과(製述科), 명경과(明經科), 잡과(雜科)로 나뉘어 치러졌는데, 천민이나 승려 자식을 제외한 일반 양인들까지 응시할 수 있었다. 일반 양인들도 과거를 보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과거제도에 지방의 향리 계층이 응시할 수 있어 지방 세력이 고위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이기백, 앞의 책, pp.131~140
6. 나오는 글
지금까지 신라 말 후삼국으로 분열되게 된 요인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았다. 또한 분열된 이후의 사회변화에 대해서 신분제 변동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신라 말 후삼국이 분열된 1차적 요인은 중앙집권 귀족간의 권력 다툼 때문이었다. 권력 다툼으로 이미 나라가 혼란해진 상황에서 진성여왕의 실정과 그로 인한 조세독촉 때문에 전국에서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둘째 표면적으로 중앙집권 귀족간의 권력 다툼이 후삼국으로 분열된 요인이지만, 폐쇄되어 있는 신라 사회, 특히 골품제의 폐단 때문에 6두품 계층과 지방호족들의 반발 또한 요인이 되었다.
셋째, 하지만 후삼국 분열 이후 기존의 골품제와 지배층은 무너지게 되며, 능력위주의 인재등용으로 인한 새로운 지배체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출신성분과 상관없이 가장 높은 관직에도 진출 할 수 있었으며, 지방 호족 세력이 중앙정부로 진출하여 새로운 지배체제로 등장하였다.
넷째 후삼국 통일의 의의는 경주 진골 중심의 사회였던 신라의 골품제 사회가 종말을 고하고 후삼국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지배체제가 자리 잡았다는 것에 있다. 신라는 모든 면에서 골품에 따라 차별을 받는 사회였다. 그러나 후삼국 시대를 거친 고려사회에서는 과거(科擧)가 실행되어 능력이 있으면 여기에 합격하여 지배세력이 될 수 있었다. 이제는 수도의 백성들 뿐 아니라 지방민들도 능력에 따라 중앙의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신라의 붕괴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새로운 지배체제의 등장이라는 커다란 결과를 나타나게 하였다. 첫 번째 삼국통일이 기존체제 안에서의 통일이라면, 후삼국통일은 새로운 체제의 전환과 함께 이루어진 통일인 것이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1 -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서울 탐구당문화사, 1996,
이기백,『한국사 신론』, 서울 일조각, 1999
김기흥,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서울 역사비평사, 1993,
삼국사기 권 제 50(열전 제10)
5. 후삼국 시대의 의의
앞에서도 설명하였지만 신라 사회는 골품제를 기반으로 하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하지만 통일 신라 말기와 후삼국 시대는 신라의 통치력이 많이 상실되어 있었기에 지방에는 호족들이 난립하였다. 이렇게 신라가 혼란한 시대였기 때문에 신라 사회의 골품제는 예전처럼 힘을 발휘 할 수 없었다. 농민 출신이 장군이나 성주가 되었으며, 6두품 출신이 최고 관직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출신 신분, 출신 지역을 떠나 오로지 능력만을 중시하는 사회로 자의든 타의든 변한 것이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후삼국 각국의 중앙 정부에는 지방의 세력가였던 호족들이 많이 진출하였다. 경주의 진골 귀족 중심이었던 신라사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즉, 후삼국 시대에 경주 진골 중심의 사회였던 신라의 골품제 사회가 종말을 고하고 능력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지배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 광종(光宗)대에 이르러 ‘과거제도(科擧制度)’라는 제도적 확립이 되었다. 신분과는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과거는 제술과(製述科), 명경과(明經科), 잡과(雜科)로 나뉘어 치러졌는데, 천민이나 승려 자식을 제외한 일반 양인들까지 응시할 수 있었다. 일반 양인들도 과거를 보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과거제도에 지방의 향리 계층이 응시할 수 있어 지방 세력이 고위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이기백, 앞의 책, pp.131~140
6. 나오는 글
지금까지 신라 말 후삼국으로 분열되게 된 요인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았다. 또한 분열된 이후의 사회변화에 대해서 신분제 변동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신라 말 후삼국이 분열된 1차적 요인은 중앙집권 귀족간의 권력 다툼 때문이었다. 권력 다툼으로 이미 나라가 혼란해진 상황에서 진성여왕의 실정과 그로 인한 조세독촉 때문에 전국에서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둘째 표면적으로 중앙집권 귀족간의 권력 다툼이 후삼국으로 분열된 요인이지만, 폐쇄되어 있는 신라 사회, 특히 골품제의 폐단 때문에 6두품 계층과 지방호족들의 반발 또한 요인이 되었다.
셋째, 하지만 후삼국 분열 이후 기존의 골품제와 지배층은 무너지게 되며, 능력위주의 인재등용으로 인한 새로운 지배체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출신성분과 상관없이 가장 높은 관직에도 진출 할 수 있었으며, 지방 호족 세력이 중앙정부로 진출하여 새로운 지배체제로 등장하였다.
넷째 후삼국 통일의 의의는 경주 진골 중심의 사회였던 신라의 골품제 사회가 종말을 고하고 후삼국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지배체제가 자리 잡았다는 것에 있다. 신라는 모든 면에서 골품에 따라 차별을 받는 사회였다. 그러나 후삼국 시대를 거친 고려사회에서는 과거(科擧)가 실행되어 능력이 있으면 여기에 합격하여 지배세력이 될 수 있었다. 이제는 수도의 백성들 뿐 아니라 지방민들도 능력에 따라 중앙의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신라의 붕괴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새로운 지배체제의 등장이라는 커다란 결과를 나타나게 하였다. 첫 번째 삼국통일이 기존체제 안에서의 통일이라면, 후삼국통일은 새로운 체제의 전환과 함께 이루어진 통일인 것이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1 -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서울 탐구당문화사, 1996,
이기백,『한국사 신론』, 서울 일조각, 1999
김기흥,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서울 역사비평사, 1993,
삼국사기 권 제 50(열전 제10)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