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 철학 조사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 54
  • 55
  • 56
  • 57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실천 철학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재적인 차이는 이 점에 있지 않다. 차이는 외적 신체의 본성을 포함하는 신체의 변용들과, 관념들, 그리고 작용역량을 증가 혹은 감소시키는 것을 포함하는 정서 간에 있다. 신체와 정신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affectio는 촉발된 신체의 상태를 가리키며 촉발시키는 신체의 현존을 함축하지만, affectus는 촉발시킨 신체들의 상관적인 변이를 고려하면서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감정 정서들이 특수한 유형의 관념들 혹은 변용들로서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이마주 변용들 혹은 관념(ideas)들과, 감정 정서들(feeling affects)간에는 본성상 차이가 있다. \"나는 정서를 그것에 의해 신체의 작용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시키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들로 이해한다....\"(Ⅲ, 정의 3). \"정신의 정념[수동상태 - 역자]이라고 불리는 정서는 혼동된 관념인데, 그것에 의하여 정신은 자신의 신체나 신체의 일부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아지게 하는 실존하는 힘을 긍정한다....\"(Ⅲ, 정서에 대한 일반적 정의). 정서가 이마주나 관념을 함축한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원인으로부터 그러하듯 후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확실하다(Ⅱ, 공리 3). 그러나 정서는 이마주나 관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서는 두 상태의 차이를 포함하는 생생한 지속 안에서 경험되기 때문에 순전히 일시적이며, 지시적이거나 표상적인 것과는 상이한 본성을 갖는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정서는 관념들의 비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이유이며, 그리하여 어떠한 지성주의적 해석도 거부하는 이유이다: \"이전보다 크거나 작아진 실존하는 힘이라고 말할 때, 나는 정신이 신체의 현재적 구성을 과거의 구성과 비교한다고 이해하지 않는다. 정서의 형상[형식?]을 구성하는 관념은 전보다 커지거나 작아진 실재성을 실질적으로 포함하는 신체의 어떤 것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Ⅲ, 정서에 관한 일반적 정의).
존재하는 양태는 촉발될 수 있는 몇몇 능력에 의해 정의된다(Ⅲ, 요청 1과 2). 그것이 다른 양태와 조우하게 되었을 때, 이 다른 양태가 그것과 구성하게 될 때 이 양태에 \"좋을\" 수가 있다. 반대로 그 양태를 분해할 때, 그 양태에 \"나쁠\" 수가 있다. 첫 번째 경우 존재하는 양태는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두 번째 경우는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이에 따라, 다른 양태의 역량이 그것에 추가되거나 또는 반대로 그것으로부터 역량을 박탈시켜 유동성을 빼앗고 억제하기 때문에, 작용역량이나 존재력이 증가되거나 감소된다고 말할 수 있다(Ⅳ 정리 18의 증명). 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나 작용역량의 증가는 기쁨의 정서, 혹은 감정이라 불린다. 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나 작용역량의 감소는 슬픔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작용역량은 촉발될 수 있는 능력과 동일하게 외부적 원인에 따라 변한다. 감정 정서(기쁨 또는 슬픔)는 그것이 전제하는 이마주 변용이나 관념(우리들의 것과 일치하는 혹은 일치하지 않는 신체의 관념)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정서가 그것을 나오게 한 관념으로 복귀할 때 기쁨은 사랑이 되고, 슬픔은 증오가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변용과 정서의 상이한 계열들은 연속적으로, 그러나 가변적인 조건하에서,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을 충만하게 된다(제3부 정리56).
우리들의 감정 또는 정서들이 존재의 다른 양태들과의 외적인 조우로부터 도출되는 한, 그것들은 촉발시키는 신체의 본성에 의해 그리고 우리 상태에 있어서 혼란된 이마주인 그 신체에 대한 필연적으로 부적합한 관념으로 설명된다. 그러한 정서들은 수동(passions)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정서들의 적합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Ⅲ 정의 2). 심지어 작용역량의 증대라고 정의되는 기쁨에 기초하는 정서들도 수동들이다. 기쁨은 \"어떤 인간의 작용능력이 그가 자신과 자신의 행동들을 충전되게 인식하는 지점까지 증가되지 않는 한에서\"(Ⅳ 정리59 증명) 여전히 수동이다. 심지어 우리의 작용능력이 질료적으로는 증대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형상적으로 통제하지 못할 때에는 수동적인 상태로, 우리의 역량과 분리된 채로 남아 있다. 이것이 정서들의 관점에서 슬픈 정념들과 기쁜 정념들이라는 두 종류의 정념들간의 기본적인 구별이 수동과 능동(passions and actions) 간의 매우 상이한 구별을 예비하는 이유이다. 변용(affectio)의 관념은 항상 정서들을 야기한다. 그러나 만약 그 관념이 혼란된 이마주가 아닌 적합한 것이라면, 그 관념이 간접적으로 우리 자신의 상태를 포함하는 대신에 촉발시키는 물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면, 그 관념이 내적인 변용(affectio)의 관념 또는 우리의 본질, 타자의 본질들 그리고 신의 본질의 내적인 일치를 명시하는(세 번째 종류의 지식) 자기변용이라면, 그것으로부터 도출되는 정서들은 그 자체 작용들이다(제3부 정리1). 이러한 정서들 혹은 느낌들은 기쁨들 혹은 사랑들이어야 할뿐만 아니라(제3부 정리58과 59), 매우 특별한 기쁨들이자 사랑들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러한 정서들은 더 이상 우리의 작용역량이나 완전함의 증대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역량 혹은 완전함의 충만되고 형상적인 소유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은총받음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능동적 기쁨들을 위해 보존되어야 한다. 능동적 기쁨들은 수동적 기쁨처럼 지속 안에서 자신들을 확장하고 지속을 정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능동적 기쁨들은 영원하며 더 이상 지속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능동적 기쁨들은 더 이상 이행들과 경과들을 함축하지 않고,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서로를 그것들이 나오는 적합한 관념들과 함께 영원한 양태 안에서 표현한다(제5부 정리31-33).
AFFIRMATION(긍정). 부정을 참조.
ANALOGY(유비). 탁월을 참조.
APPETITE. 권력/역량을 참조.
ATTRIBUTE(속성)
\"지성이 실체에 관하여 그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고 지각하는 것\"(≪에티카≫, Ⅰ, 명제 4) 속성들은 지성이 보유하고 있는 것을 보는 방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적 지성은 단지 있는 것만을 지각하기
  • 가격3,000
  • 페이지수57페이지
  • 등록일2006.09.20
  • 저작시기2006.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463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