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저와 안토니우스의 생애 및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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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아우구스투스 Caesar Augustus (BC 63-AD 14)>

<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 (BC 82/81-30)>

본문내용

한 반란을 주동했다가 실패해 페루시아 전쟁(반란의 중심거점인 페루시아[지금의 페루자]의 이름을 딴 것)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로마령(領) 시리아가 이웃 나라 파르티아의 침입을 받았다. 파르티아의 침공소식을 들었음에도 안토니우스는 먼저 이탈리아로 가서 브룬두시움(브린디시)에서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부인 풀비아가 전쟁중에 죽자 대신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와 유대의 동맹군을 피해 유대에서 달아난 헤로데를 원조하여 유대를 다시 찾고 헤로데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다음해에 그들은 넓은 지중해지역을 장악하고 로마 선박의 약탈을 일삼고 있던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합의해 단기간에 그치기는 했지만 미세눔 조약을 타결지었다. 그뒤 함께 아테네로 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는 술의 신이며 행복과 불멸의 신이기도 한 디오니소스 신에 견주어 새로운 디오니소스로 불리며 열광적인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BC 38년 안토니우스의 부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가 파르티아인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다음해 헤로데는 다시 예루살렘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다. 삼두정을 5년 더 연장한 타렌툼 조약으로 겉보기에는 문제가 해소된 것 같았지만 안토니우스는 다시 동방으로 떠나면서 코르키라(지금의 코르푸 또는 케르키라)에서 옥타비아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고 클레오파트라를 시리아로 불러 자신과 합류하도록 했다. 이후 육상전투에 나갈 때를 제외하고 생애의 남은 7년을 그들은 함께 살았다.
종교적 선전의 일환으로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디오니소스 신으로 불려진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운 이시스 여신 또는 아프로디테 여신이라고 일컬어졌다. 이들은 이집트식으로 결혼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당시 로마 법은 로마인과 외국인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결혼을 했더라도 그것은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았다.
그들이 서로 사랑했다는 점말고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안토니우스가 필요했고(하지만 헤로데가 소유한 유대 땅을 달라는 그녀의 설득은 성공하지 못했음),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공격계획에 소요되는 보급품과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이집트가 필요했다.
BC 36년 그는 파르티아의 동맹세력인 메디아아트로파테네(카스피 해 남서부)를 공격했으나 엄청난 손실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그가 시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클레오파트라는 돈과 보급품을 가지고 가서 그를 만났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기회를 이용해 안토니우스의 실패와 대조적으로 자신 또는 그의 부하 아그리파 제독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거둔 결정적 승리를 과시할 겸 옥타비아에게 부대와 보급품을 딸려 안토니우스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 부대의 병력은 안토니우스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숫자가 적은데다 그것을 받는 것은 동료인 삼두정치가에게 빚을 지는 셈이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에게 로마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내려 장차 두 지도자 사이의 결렬을 불가피한 일로 만들었다.
BC 34년 결렬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발단은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원정의 성공을 자축해 알렉산드리아 시가에서 개선행진을 벌인 데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 행진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개선식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낸 불경스러운 행사라고 보았다. 그 며칠 뒤 안토니우스는 성대한 의식을 열어 클레오파트라를 왕중여왕(王中女王)으로 선포하고 그녀의 아들이며 공동군주인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 또는 카이사리온(클레오파트라는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당시 안토니우스도 동의했음)을 왕중왕으로 선언했으며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난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에게도 각기 거창한 제왕의 칭호를 붙였다. 이러한 칭호부여의 정확한 의미와 내용은 따져볼 점이 있겠지만 당시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그것이 로마인의 영토를 외국인에게 넘겨준다는 뜻을 포함한다고 해석했다.
다음해인 BC 33년 로마 지도자들은 서로에 대해 전에 없이 격렬한 비난을 개시했는데, 그 와중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자기 사후에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자신을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의 진위가 불분명한 유언장을 공개했다. BC 32년 공식적으로 삼두정이 끝났으나 안토니우스는 계속해서 자기 주화에 '삼두정치가'라는 명칭을 썼다.
한편 로마의 콘술 2명은 어쩌다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편에 섰고 그 때문에 옥타비아누스의 위협을 받자 200명이 넘는 로마 원로원 의원을 이끌고 안토니우스의 본거지를 향해 떠났다. 안토니우스가 정식으로 옥타비아와 이혼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공식적으로 안토니우스와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끊고 그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안토니우스는 에페소스(셀추크)와 아테네, 파트라스(파트라이) 등지에 잇달아 사령부를 구축했으며 암브라키아 만에서 주력함대를 지휘했다. 그리스 서해안을 따라서는 더 많은 해군병력이 길다란 방어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부관 아그리파 제독은 이탈리아에서 이오니아 해를 건너 상륙작전을 벌이는 데 성공했으며 아그리파는 방어선의 주요지점을 모두 점령했다.
안토니우스가 점차 거점을 잃어갈수록 그의 참모들과 전투병들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게다가 클레오파트라가 계속 안토니우스의 사령부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사기는 날로 저하되었다. 이러한 내부의 분열과 안토니우스 함대의 미숙함까지 겹쳐 안토니우스는 결전에서 미처 힘을 다해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그것이 바로 BC 31년 9월 2일 암브라키아 만 외곽에서 벌어진 악티움 해전이었다. 안토니우스의 패배는 불가피했으며, 클레오파트라는 배신행위라기보다 미리 예정된 계획에 따라 자신과 안토니우스의 보물을 실은 60척의 자기 선단을 이끌고 적의 공격선을 돌파해 안토니우스와 합류한 뒤 이집트로 달아났다.
그뒤 거의 1년이 지난 뒤에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로 그들을 뒤쫓아왔으며 자신들의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자 BC 30년 8월 안토니우스가, 뒤이어 클레오파트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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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9.30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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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65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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