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김현승 시인에 대하여
II. 김현승 시의 시대구분
1.제1기(1934~1945년)
2. 제2기 (1945~1963년)
3. 제3기 (1963~1973년)
4. 제4기 (1973~1975년)
Ⅲ. 김현승 시의 주제 변모 양상
1. 제1기
2. 제2기
3. 제3기
4. 제4기
II. 김현승 시의 시대구분
1.제1기(1934~1945년)
2. 제2기 (1945~1963년)
3. 제3기 (1963~1973년)
4. 제4기 (1973~1975년)
Ⅲ. 김현승 시의 주제 변모 양상
1. 제1기
2. 제2기
3. 제3기
4. 제4기
본문내용
도
용해되지 않는,
오오, 너의 이름은 모든 애정과 신앙을 떠나
내 마음의 왕국에서 자유와 독립을 열렬히 호소하는구나!
그러면 우리를 고독케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지평선-- 저 풍요하던 창고들인가,
헬렌의 슬픈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준 호우머의 시들인가,
아니면 사랑이 가고 지혜가 오기 전 무성턴 저 무화과나무의 그늘들인가.
비록 그것들에 새로운 시간의 수액을 흐르게 하여,
현재와 미래의 꿈많은 여정을 주어,
시를 산문으로 종합을 분석으로, 결핍을 생산으로
성장케 한들 그것은 또한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책을 덮게 한 고독이여!
비록 우리에게 가브리엘의 성좌와 사탄의 모든 저항을 준다 한들
만들어진 것들은 고독할 뿐이다!
인간은 만들어졌다!
무엇하나 이 우리의 의지 아닌,
이 간곡한 자세-- 이 절망과 이 구원의 두 팔을
어느 곳을 우러러 오늘은 벌려야 할 것인가!
시의 마지막 연, 구원의 두 팔을 어느 곳을 우러러 벌릴 것이냐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고독에 대한 의문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찾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해결점을 제시해 주지 않는 근원적인 고독이다.
이러한 고독을 시적으로 가장 잘 형상화한 작품으로 흔히《견고한 고독》을 든다. 이 시
에서 고독은 고독 그 자체로서 형이상학적인 언어로 남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와는 다른
또 하나의 존재로서 형상화되고 있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결정된 빛의 눈물로 시화됨
으로써 미적 가치를 얻고 있다. 이 시는 휘어져서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목관 악기의
인생을 고독의 견고성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에게 있어 고독은 굳을 대로 굳은 마지막
모습이며 인간의 본질적 생명으로 이해된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 영원의 먼 끝
을 만지게 되었다와 같은《절대 고독》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시의 세계에서
찾으려 했던 영원성을 고독에서 얻게 된다.
그러나 김현승의 고독의 추구에서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무(無)의 세계이다. 그에게
해체의 궁극은 무였던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고독의 끝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동양적인 사유의 세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독의 끝>
거기서
나는
옷을 벗는다.
모든 황혼이 다시는
나를 물들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끝나면서
나의 처음까지도 알게 된다.
신은 무한히 넘치어
내 작은 눈에는 들일 수 없고,
나는 너무 잘아서
신의 눈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무덤에 잠깐 들렀다가,
내게 숨막혀
바람도 따르지 않는
곳으로 떠나면서 떠나면서,
내가 할 일은
거기서 영혼의 옷마저 벗어 버린다.
고독하다는 것은 숨가쁘게 살아온 어느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신의 슬픈 뒷통수를 바라보는 일...
신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나라는 존재
그 어둠 속 모래알 같은 쓸쓸함에
크게 한 번 몸서리치다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막막함에
고개 끄덕이며 아침을 맞이하고
또 밤을 맞이하는, 그러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하루가 고독하려는지
신도 이 겨울밤이 지겨운지
비 무수히 쏟아내리는
쓸쓸한 밤입니다.
그의 고독은 지상적 세계와 천상적 세계의 사이에 남은 본질적 자아에 대한 탐구이며
영원성의 보상이다. 이 시는 무덤이 잠깐 들르는 곳이라는 그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보여 준다. 이 시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성이 동양적 무의 세계로 드러나면서 그의 고독
을 갈 데 없는 절정에 이르게 한 작품이다.
4. 제4기
신앙의 회의로 인하여 각성적 자아 인식의 상태인 고독의 세계를 발견했던 김현승은
고혈압으로 쓰러진 경험을 하고 난 후 신의 세계에 완전히 귀의하여 시적으로 제4기에
이르게 된다. 그에게 있어 인생 본질의 추구나 현실의 규명, 고독의 탐구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절대 신앙으로의 회귀와 참회의 길은 세계관의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만들었
고 그의 시들을 절대 신앙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다.
<마지막 지상에서>
산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해진 지평선을 넘어간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지금까지 그가 수록해왔던 인간 중심의 세계가 아닌 절대신앙으로서의 기독교에로의 귀의와 신을 통한 구원에의 간절한 몸짓이 담겨져 있다. 신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통해 추구하던 고독의 가치가 일시에 허물어진 다음에 쓴 마지막 지상에서라는 시는 경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구원에의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요나의 고기 속에
나를 가둔다.
새 아침 낯선 눈부신 땅에
나를 배앝으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나의 눈을 가리운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곳을
더 멀리 보게 하려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더 멀리 듣게 하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더 깊고 부드러운 품안으로
나를 안아 준다.
이 품속에서 나의 말은
더 달콤한 숨소리로 변하고
나의 사랑은 더 두근거리는
허파가 된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밝음으론 밝음으론 볼 수 없던
나의 눈을 비로소 뜨게 한다!
마치 까아만 비로도 방석 안에서
차갑게 반짝이는 이국의 보석처럼,
마치 고요한 바닷 진흙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
그가 종교에 대해 가졌던 회의와 갈등, 그리고 귀의와 화해의 과정을 표현한 작품이《이
어둠이 내게 와서》이다. 그는 어둠을 통해서 신의 빛 가운데에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결국 그는 자신이 추구했던 영원성은 천상적 신의 세계에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본다.
어둠에서의 탈출로 비유되는 천상적 세계로의 절대적 귀의는 획일적인 신앙시만을 남김
으로써 그가 구축했던 견고한 시적 긴장을 풀어버린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김현승의 시 세계는 작가 자신이 지닌 기독교적 세계관의
변천과 그 맥을 같이한다. 아울러 이러한 시적 방황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삶의
철학을 모색하려 몸부림쳤던 20세기 지성의 그것과 상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의 시적 사상은 한국 시단에서 독자적이고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용해되지 않는,
오오, 너의 이름은 모든 애정과 신앙을 떠나
내 마음의 왕국에서 자유와 독립을 열렬히 호소하는구나!
그러면 우리를 고독케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지평선-- 저 풍요하던 창고들인가,
헬렌의 슬픈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준 호우머의 시들인가,
아니면 사랑이 가고 지혜가 오기 전 무성턴 저 무화과나무의 그늘들인가.
비록 그것들에 새로운 시간의 수액을 흐르게 하여,
현재와 미래의 꿈많은 여정을 주어,
시를 산문으로 종합을 분석으로, 결핍을 생산으로
성장케 한들 그것은 또한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책을 덮게 한 고독이여!
비록 우리에게 가브리엘의 성좌와 사탄의 모든 저항을 준다 한들
만들어진 것들은 고독할 뿐이다!
인간은 만들어졌다!
무엇하나 이 우리의 의지 아닌,
이 간곡한 자세-- 이 절망과 이 구원의 두 팔을
어느 곳을 우러러 오늘은 벌려야 할 것인가!
시의 마지막 연, 구원의 두 팔을 어느 곳을 우러러 벌릴 것이냐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고독에 대한 의문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찾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해결점을 제시해 주지 않는 근원적인 고독이다.
이러한 고독을 시적으로 가장 잘 형상화한 작품으로 흔히《견고한 고독》을 든다. 이 시
에서 고독은 고독 그 자체로서 형이상학적인 언어로 남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와는 다른
또 하나의 존재로서 형상화되고 있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결정된 빛의 눈물로 시화됨
으로써 미적 가치를 얻고 있다. 이 시는 휘어져서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목관 악기의
인생을 고독의 견고성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에게 있어 고독은 굳을 대로 굳은 마지막
모습이며 인간의 본질적 생명으로 이해된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 영원의 먼 끝
을 만지게 되었다와 같은《절대 고독》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시의 세계에서
찾으려 했던 영원성을 고독에서 얻게 된다.
그러나 김현승의 고독의 추구에서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무(無)의 세계이다. 그에게
해체의 궁극은 무였던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고독의 끝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동양적인 사유의 세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독의 끝>
거기서
나는
옷을 벗는다.
모든 황혼이 다시는
나를 물들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끝나면서
나의 처음까지도 알게 된다.
신은 무한히 넘치어
내 작은 눈에는 들일 수 없고,
나는 너무 잘아서
신의 눈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무덤에 잠깐 들렀다가,
내게 숨막혀
바람도 따르지 않는
곳으로 떠나면서 떠나면서,
내가 할 일은
거기서 영혼의 옷마저 벗어 버린다.
고독하다는 것은 숨가쁘게 살아온 어느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신의 슬픈 뒷통수를 바라보는 일...
신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나라는 존재
그 어둠 속 모래알 같은 쓸쓸함에
크게 한 번 몸서리치다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막막함에
고개 끄덕이며 아침을 맞이하고
또 밤을 맞이하는, 그러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하루가 고독하려는지
신도 이 겨울밤이 지겨운지
비 무수히 쏟아내리는
쓸쓸한 밤입니다.
그의 고독은 지상적 세계와 천상적 세계의 사이에 남은 본질적 자아에 대한 탐구이며
영원성의 보상이다. 이 시는 무덤이 잠깐 들르는 곳이라는 그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보여 준다. 이 시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성이 동양적 무의 세계로 드러나면서 그의 고독
을 갈 데 없는 절정에 이르게 한 작품이다.
4. 제4기
신앙의 회의로 인하여 각성적 자아 인식의 상태인 고독의 세계를 발견했던 김현승은
고혈압으로 쓰러진 경험을 하고 난 후 신의 세계에 완전히 귀의하여 시적으로 제4기에
이르게 된다. 그에게 있어 인생 본질의 추구나 현실의 규명, 고독의 탐구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절대 신앙으로의 회귀와 참회의 길은 세계관의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만들었
고 그의 시들을 절대 신앙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다.
<마지막 지상에서>
산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해진 지평선을 넘어간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지금까지 그가 수록해왔던 인간 중심의 세계가 아닌 절대신앙으로서의 기독교에로의 귀의와 신을 통한 구원에의 간절한 몸짓이 담겨져 있다. 신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통해 추구하던 고독의 가치가 일시에 허물어진 다음에 쓴 마지막 지상에서라는 시는 경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구원에의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요나의 고기 속에
나를 가둔다.
새 아침 낯선 눈부신 땅에
나를 배앝으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나의 눈을 가리운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곳을
더 멀리 보게 하려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더 멀리 듣게 하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더 깊고 부드러운 품안으로
나를 안아 준다.
이 품속에서 나의 말은
더 달콤한 숨소리로 변하고
나의 사랑은 더 두근거리는
허파가 된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밝음으론 밝음으론 볼 수 없던
나의 눈을 비로소 뜨게 한다!
마치 까아만 비로도 방석 안에서
차갑게 반짝이는 이국의 보석처럼,
마치 고요한 바닷 진흙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
그가 종교에 대해 가졌던 회의와 갈등, 그리고 귀의와 화해의 과정을 표현한 작품이《이
어둠이 내게 와서》이다. 그는 어둠을 통해서 신의 빛 가운데에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결국 그는 자신이 추구했던 영원성은 천상적 신의 세계에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본다.
어둠에서의 탈출로 비유되는 천상적 세계로의 절대적 귀의는 획일적인 신앙시만을 남김
으로써 그가 구축했던 견고한 시적 긴장을 풀어버린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김현승의 시 세계는 작가 자신이 지닌 기독교적 세계관의
변천과 그 맥을 같이한다. 아울러 이러한 시적 방황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삶의
철학을 모색하려 몸부림쳤던 20세기 지성의 그것과 상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의 시적 사상은 한국 시단에서 독자적이고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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