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 문화대혁명의 취지
Ⅱ. 본 론
ⅰ. 문화대혁명의 배경
ⅱ. 문화대혁명의 경과 (제 1, 2, 3단계)
ⅲ. 문화대혁명의 성질과 오류
Ⅲ. 결 론
▷ 문화대혁명의 취지
Ⅱ. 본 론
ⅰ. 문화대혁명의 배경
ⅱ. 문화대혁명의 경과 (제 1, 2, 3단계)
ⅲ. 문화대혁명의 성질과 오류
Ⅲ. 결 론
본문내용
시켰다. 문화대혁명은 명목상으로는 직접 대중에 의거한다고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당 조직을 이탈하였을 뿐 아니라 광대한 대중을 이탈하였다. 운동이 시작된 후 당이 오랫동안 의거해 온 수많은 적극 분자와 기본 대중은 배척받거나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극단적인 무정부 상태하에 투기꾼, 야심가, 음모가들이 상승할 기회를 잡아 각종 음모를 꾸며 당파성을 조장하고 폭력행동을 선동하고 대중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넷째, 문화대혁명이 취한 투쟁 방침과 방법 또한 완전히 오류였다. 당시의 상황은 국내의 착취계급은 이미 소멸하고 격렬한 계급 투쟁은 이미 종결되어, 국내의 일반적, 보편적 모순은 인민 내부의 모순이 된 상황으로서, 이러한 성질의 모순을 해결하려면 다만 모택동이 일관적으로 제창한 ‘단결ㅡ비평ㅡ단결’과 “이전의 과오에서 교훈을 찾으며 질병을 고쳐 인민을 구한다.”라는 정신에 의거해야 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대명 대방, 대자보, 대변론, 대연결 등을 취하여 각종 ‘전투대’ 따위를 만드는 방법을 썼다. 당 내외를 가리지 않고 아래로부터 위로 일률적으로 대중을 동원하여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타도하는 정치 투쟁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투쟁의 목적은 철저하게 공격하여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과 방법을 당시에는 ‘대민주(大民主)’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대적 투쟁에서나 쓰는 방침으로서, 이를 이용해 당내와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의 이러한 잘못된 방침으로 10년에 달하는 어지러운 국면을 조성하고, 당이 장기적으로 배양해 온 바람직한 풍토와 전통을 파괴하였다. 당과 국가의 수많은 중요지도자들과 우수한 간부, 전문가, 학자들이 신체적ㆍ정신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수많은 간부와 대중들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각종 형식을 통해 제지하고 반대하는 투쟁을 진행하였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III. 결 론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에서 뿐 아니라 모택동 자신에게도 하나의 비극이었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에서 범한 오류는 결국 하나의 위대한 무산 계급 혁명가가 범한 오류였다. 모택동은 청년 시절부터 중국 혁명에 헌신하였으며 중국 혁명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당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인민 해방군의 주요 창조자였다. 그는 중국 혁명의 가장 곤란한 시기에 가장 처음으로 혁명의 정확한 노선을 찾아내어 혁명을 패배에서 승리로 이끌었다. 위대한 사회주의 사업을 개창하였고 모택동이 중국 혁명과 건설 과정에서 세운 불멸의 공적과 공헌으로 최고봉이 되었다. 창조적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중국 혁명의 실천에 응용한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위대한 무산 계급 혁명가, 이론가, 전략가로서 중화 민족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족 영웅이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에서 모택동의 잘못된 지도 사상으로 계급투쟁 확대화 오류가 생겨났다. 또한 청년기에는 기존의 체제에 반대하는 혁명정신을 가졌으나, 최고가 되었을 때 그는 오만해져서 실제를 이탈하고 대중을 이탈하며 개인 독재로 치달았다.
현재로는 앞서서 겪은 문화대혁명과 같은 흉악하며 악독한 음모적 수단으로 야심을 발동하여 국가와 인민에게 끼친 재난과 손실은 없어야 한다고 본다.
※ 참 고 문 헌
Spence, Jonathan D., 《현대 중국을 찾아서 2》, 이산, 1999
권중달, 《문화대혁명 전후의 중국 역사 해석》, 집문당, 1991
아마코 사토치, 《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일조각, 2003
조영명. 《중국현대사의 재조명》, 서울:온누리, 1985
신승하, 《중국당대 40년사(1949-1989)》, 고려원, 1993
초효흠 리량지,《중국혁명사3》, 거름, 1990
넷째, 문화대혁명이 취한 투쟁 방침과 방법 또한 완전히 오류였다. 당시의 상황은 국내의 착취계급은 이미 소멸하고 격렬한 계급 투쟁은 이미 종결되어, 국내의 일반적, 보편적 모순은 인민 내부의 모순이 된 상황으로서, 이러한 성질의 모순을 해결하려면 다만 모택동이 일관적으로 제창한 ‘단결ㅡ비평ㅡ단결’과 “이전의 과오에서 교훈을 찾으며 질병을 고쳐 인민을 구한다.”라는 정신에 의거해야 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대명 대방, 대자보, 대변론, 대연결 등을 취하여 각종 ‘전투대’ 따위를 만드는 방법을 썼다. 당 내외를 가리지 않고 아래로부터 위로 일률적으로 대중을 동원하여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타도하는 정치 투쟁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투쟁의 목적은 철저하게 공격하여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과 방법을 당시에는 ‘대민주(大民主)’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대적 투쟁에서나 쓰는 방침으로서, 이를 이용해 당내와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의 이러한 잘못된 방침으로 10년에 달하는 어지러운 국면을 조성하고, 당이 장기적으로 배양해 온 바람직한 풍토와 전통을 파괴하였다. 당과 국가의 수많은 중요지도자들과 우수한 간부, 전문가, 학자들이 신체적ㆍ정신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수많은 간부와 대중들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각종 형식을 통해 제지하고 반대하는 투쟁을 진행하였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III. 결 론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에서 뿐 아니라 모택동 자신에게도 하나의 비극이었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에서 범한 오류는 결국 하나의 위대한 무산 계급 혁명가가 범한 오류였다. 모택동은 청년 시절부터 중국 혁명에 헌신하였으며 중국 혁명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당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인민 해방군의 주요 창조자였다. 그는 중국 혁명의 가장 곤란한 시기에 가장 처음으로 혁명의 정확한 노선을 찾아내어 혁명을 패배에서 승리로 이끌었다. 위대한 사회주의 사업을 개창하였고 모택동이 중국 혁명과 건설 과정에서 세운 불멸의 공적과 공헌으로 최고봉이 되었다. 창조적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중국 혁명의 실천에 응용한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위대한 무산 계급 혁명가, 이론가, 전략가로서 중화 민족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족 영웅이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에서 모택동의 잘못된 지도 사상으로 계급투쟁 확대화 오류가 생겨났다. 또한 청년기에는 기존의 체제에 반대하는 혁명정신을 가졌으나, 최고가 되었을 때 그는 오만해져서 실제를 이탈하고 대중을 이탈하며 개인 독재로 치달았다.
현재로는 앞서서 겪은 문화대혁명과 같은 흉악하며 악독한 음모적 수단으로 야심을 발동하여 국가와 인민에게 끼친 재난과 손실은 없어야 한다고 본다.
※ 참 고 문 헌
Spence, Jonathan D., 《현대 중국을 찾아서 2》, 이산, 1999
권중달, 《문화대혁명 전후의 중국 역사 해석》, 집문당, 1991
아마코 사토치, 《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일조각, 2003
조영명. 《중국현대사의 재조명》, 서울:온누리, 1985
신승하, 《중국당대 40년사(1949-1989)》, 고려원, 1993
초효흠 리량지,《중국혁명사3》, 거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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