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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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의 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0월 30일부터 12월 6일까지의 국내외 정세 및 갑신정변에 관한 전말을 일기체로 서술한 것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의 저작인 갑신일록은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이 정변을 회고하면서 일기체형식으로 그 전말을 소상하게 기술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변을 연구함에 있어서 갑신일록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헌이 되어 있다.
그런데 근저에 갑신일록을 신빙할 수 없는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즉 그것은 비록 김옥균의 저작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을 검토해 보면 허위와 착오가 많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설을 주장한 사람은 일본의 山邊健太郞씨로 조선학보 제17집에『갑신일록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만약에 山邊씨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갑신일록에 대한 종래의 지견은 상당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山邊씨의 주장은 기왕에 갑신일록을 아무런 批判없이 이용한 데에 대해서 하나의 반성을 일으키게 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는 주장은 근거가 박약하고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갑신일록의 기사 중에는 사건의 날짜가 뒤바뀌었다던가, 혹은 약간의 착오가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내용의 큰 줄거리를 뒤엎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갑신일록을 신빙할 수 없는 저작물이라고 쉽게 단정을 내리기는 곤란할 것이다. 김옥균은 전혀 있지도 않았던 사건이나 동지들 질문에 논의도 되지 않은 말을 함부로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외국공사와의 접견의 한 예만 보아도 그것을 방증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옥균이 후트 미국공사와의 접견에 있어서 갑신일록에는 후트가 김옥균의 집으로 방문한 것이 2회(10월 30일과 11월 14일), 반대로 김옥균이 후트를 방문한 것이 2회(11월5일과 24일)인데, 윤치한 일기에는 후트가 김옥균을 방문한 것이 1회(10월30일) 김옥균이 후트를 방문한 것이 3회(11월6일, 20일, 29일)로 되어 있다. 윤치한 일기가 맞을 것이므로 갑신일록의 기사는 오류를 범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1884년 10월 30일로부터 12월 6일까지 김옥균과 후트가 서로 접견한 것은 갑신일록이나 윤 일기 모두 4회로 되어 있다. 山邊健太郞씨는 그의 논문에서 갑신일록을 믿을 수 없는 저작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김옥균이 미국공사와의 면담은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일을 미국공사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처럼 선전하기 위해서 허위로 쓴 것이라고 하였으나, 위에서 지적한 것을 보아도 그의 주장이 틀렸음을 알 것이다. 더욱이 앞에서 인용한 윤 일기 11월 29일 조에.
是夜 古愚來訪美使 美使勸基廣會有法 靜觀時機 勿爲驟進 反害開化之道 古遇稱是…
라고 있으니, 김옥균은 후트 공사를 찾아가 개화당의 진로에 대해서도 기탄없이 상의하였던 것이다. 山邊씨는 그밖에도 몇 가지 문제를 들고 갑신일록의 내용을 부정하고 있으나, 사소한 오류를 지적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갑신일록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신일록의 저작과 그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면 요컨대 갑신일록은 갑신정변이 있은 지 약 1년이 경과된 1885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 저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저작할 당시의 김옥균은 정변의 실패로 같이 망명한 동지들마저 대부분 미국으로 떠나버려 외로운 처지에 있었다. 집필하게 된 동기는 첫째로 정변을 주도한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느끼어 정변의 전미를 적어두어야 되겠다는 생각과 둘째로는 일본의 배신적 행동을 규탄하려는데 있었다. 김옥균은 본시 집필이 끝나는 대로 신문지상이나 단행본으로 발표하려고 계획하였을 것이지만, 일본정부에서 그를 냉대하고 위험시하였던 관계로 인쇄물로 발표할 없었다. 그리하여 사본으로 널리 내외에 전파케 되었다. 갑신일록의 총 자수는 18,000에 달하는데, 김옥균은 이것을 저작함에 있어서 아무런 메모(비망록)도 갖지 못한 채, 전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썼던 것 같다. 이에 따라 많은 착오를 범하게 되었다. 특히 날자(시일)중에는 뒤바뀐 것이 많다. 그러므로 갑신정록을 사료로 이용하려면 신중한 검계를 요한다.
그러나 오류가 있다 해도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전반적인 내용의 줄거리를 뒤엎는 착오는 아닌 것 같다. 몇 가지의 근본사과와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다. 김옥균은 전연 있지도 않았던 사천이나 논의도 되지 않는 말을 함부로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국 갑신일록은 부분적으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해도, 전반적인 내용은 신뢰할 수 있는 저작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선개혁의견서>는 조선정부개혁방안을 일본 정치가인 고토에게 제시하고, 이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서의 <치심유서>는 그의 망명지인 일본에서 강화유수로 있는 이재원에게 보낸 밀서로서,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재기의 기회를 엿보기 위한 내용의 서한이다.
<여길전청성서 1>는 그가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본국 정부에서 보낸 자객 지운영으로 인하여 일본의 치안을 흐리게 했다는 구실로 일본의 경시총감으로부터 퇴거령을 받은 뒤, 일본의 외무차관이 요시다에게 강제퇴거형의 철회와 이 조처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애용의 서한이다.
<지운영사건규탄상소문>은 1886년 본국 정부로부터 그를 살해하라는 밀지를 받은 자객 지운영이 실패하자, 국왕에게 이 밀지의 사실 여부를 규명함과 아울러 이에 대한 처사가 억울함을 호소한 상소문이다.
<여이홍장서>는 청나라 청치가인 이홍장에게 보낸 서한으로서, 조선정부를 사주하여 자객을 보내는 따위의 야비한 행동을 중비하고 폭넓은 외교정책을 실행할 것을 충고함과 아울러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어달라는 청원의 내용이다.
<여길전청성서 2>는 그가 일본에 망명중 자객 지운영으로 인하여 일본의 치안을 흐리게 했다는 죄목으로 오가사와라섬에 추방된 뒤 일본의 외무차관에게 보낸 서한으로서, 그곳의 고초가 막심하다는 하소연과 아울러 참선수행으로 자위하면서 나날을 지냐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책은 19세기말의 국내외정세, 개화당 요인들의 활약상, 갑신정변의 전말 등을 이해하는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이 책은 고려대학교와 국민대학교 등에 소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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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6.10.26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8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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