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기가 되는 이러한 사건의 의미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휠더린의 싯구에서 그 의미를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이 헛되게도 가장 기쁜 것을 기쁘게 말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그것은 지금의 이 슬픔 속에서 내게 자신을 말해준다.
Manche versuchten umsonst, das Freudigste freudig zu sagen, Hier spricht endlich es mir, hier in der Trauer sich aus.
이는 곧 스스로가 믿음으로써, 예감으로써, 또는 앎으로써, 어떤 찬양할만한 가치있는 지고의 것 속에 뿌리를 내릴때, 예술가는 극단적으로 혼란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한편의 송가를 지어낼 수 있으며, 싸우는 군인들의 함성 속에서 비극적 몰락의 스리의 노래를 들을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생각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 표지를 만들 수 있으며, 단말마의 절규를 그 입술에 올림으로써 선율로 옮길 수 있다는 것-고독 속에서 자기 작품의 형태를 잉태하면서도 예술가는 실상 어디까지나 인간적 공동체 또는 하나의 문화적 모태 속에서 그 생명을 지켜간다는 의미를 일러주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예술작품이란 역사의 모습에 나타내는 인간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항상 새로운 현실화에 의해 산다는 이해, 그리고 현실화가 단절되면 죽어 새로운 부활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최종적인 사멸을 기다리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주장으로써 예술작품의 축제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쿤의 노력은 실상 예술작품에 의해 축제를 설명하는 쪽이 그 역보다 쉽다는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
많은 시사에도 불구하고 <예술작품의 축제성>에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 특히 축제의 해명이 다소 불분명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음인지, 쿤은 그 다음해에 <예술의 존재발생>이라는 장문의 논문에서 축제를 10개 항목에 걸쳐 보다 자세히 논구하고 있다. 매우 요령있게 보여지기 때문에 가급적 충실하게 소개해 본다.
A. 축제는 고유한 시가형식을 가진다. 그형식은 <고양된 여유>(gesteigerte MuBe)로서 일상적으로 일하는 생활가는 뚜렷이 구분된다. 우리는 그러한 시간형식을 환희적 현재라고 부른다. 언제나 계획하면서 미래를 향한 시간의 전진이, 말하자면 정지한 채로 존립하게 된다. ‘말하자면’이라고 표현한 것은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에서이다. 축제 역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축제는 그 진행에 있어 마치 노래나 연극처럼 발단, 절정, 결말의 자연스런 시간형태를 이루면서 시간이 내면화 된다. 그것은 내면화를 해치지 않으면서, 매순간 충만된 시간으로서 전체적으로 현전한다.
B. 축제는 고유한 공간, 곧 축제장소 내지 축제공간을 요구한다. 견실한 축제마당을 설립함으로써 축제공간을 준비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축제 의식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형식을 참작해볼 때, 제도로서의 축제를 다시 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축제가 제도인 것도 아니며, 또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극단적인 경우 축제공간은 개별적인 것 안에 완전히 잘못 놓일 수도 있다.
C. 축제의 핵심은 기분에 있다. 그것은 함께 축제하는 자를 축제 기분 속에 끌어 들임으로써 사회적 실재로서 현실화된다. 축제는 고도의 기분을 통일함으로써 일상적인 삶의 노고를 넘어 자신을 고양시킨다.
D. 축제의 동기는(자연이 봄에 성장하는 것처럼)도화된 어떤 반복되는 사건이거나, 인회적인 사건이다. 양자의 사건방식은 시기적으로 반복되는 제도화된 축제에 동기를 부여할 수 도 있다. 축제의 근원이 일회적인 사건에서 비롯될 경우 그것은 기념제가 되고, 일던 그렇게 생겨난 것은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현존재의 구성요소로서 현제화된다.
많은 사람들이 헛되게도 가장 기쁜 것을 기쁘게 말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그것은 지금의 이 슬픔 속에서 내게 자신을 말해준다.
Manche versuchten umsonst, das Freudigste freudig zu sagen, Hier spricht endlich es mir, hier in der Trauer sich aus.
이는 곧 스스로가 믿음으로써, 예감으로써, 또는 앎으로써, 어떤 찬양할만한 가치있는 지고의 것 속에 뿌리를 내릴때, 예술가는 극단적으로 혼란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한편의 송가를 지어낼 수 있으며, 싸우는 군인들의 함성 속에서 비극적 몰락의 스리의 노래를 들을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생각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 표지를 만들 수 있으며, 단말마의 절규를 그 입술에 올림으로써 선율로 옮길 수 있다는 것-고독 속에서 자기 작품의 형태를 잉태하면서도 예술가는 실상 어디까지나 인간적 공동체 또는 하나의 문화적 모태 속에서 그 생명을 지켜간다는 의미를 일러주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예술작품이란 역사의 모습에 나타내는 인간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항상 새로운 현실화에 의해 산다는 이해, 그리고 현실화가 단절되면 죽어 새로운 부활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최종적인 사멸을 기다리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주장으로써 예술작품의 축제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쿤의 노력은 실상 예술작품에 의해 축제를 설명하는 쪽이 그 역보다 쉽다는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
많은 시사에도 불구하고 <예술작품의 축제성>에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 특히 축제의 해명이 다소 불분명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음인지, 쿤은 그 다음해에 <예술의 존재발생>이라는 장문의 논문에서 축제를 10개 항목에 걸쳐 보다 자세히 논구하고 있다. 매우 요령있게 보여지기 때문에 가급적 충실하게 소개해 본다.
A. 축제는 고유한 시가형식을 가진다. 그형식은 <고양된 여유>(gesteigerte MuBe)로서 일상적으로 일하는 생활가는 뚜렷이 구분된다. 우리는 그러한 시간형식을 환희적 현재라고 부른다. 언제나 계획하면서 미래를 향한 시간의 전진이, 말하자면 정지한 채로 존립하게 된다. ‘말하자면’이라고 표현한 것은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에서이다. 축제 역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축제는 그 진행에 있어 마치 노래나 연극처럼 발단, 절정, 결말의 자연스런 시간형태를 이루면서 시간이 내면화 된다. 그것은 내면화를 해치지 않으면서, 매순간 충만된 시간으로서 전체적으로 현전한다.
B. 축제는 고유한 공간, 곧 축제장소 내지 축제공간을 요구한다. 견실한 축제마당을 설립함으로써 축제공간을 준비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축제 의식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형식을 참작해볼 때, 제도로서의 축제를 다시 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축제가 제도인 것도 아니며, 또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극단적인 경우 축제공간은 개별적인 것 안에 완전히 잘못 놓일 수도 있다.
C. 축제의 핵심은 기분에 있다. 그것은 함께 축제하는 자를 축제 기분 속에 끌어 들임으로써 사회적 실재로서 현실화된다. 축제는 고도의 기분을 통일함으로써 일상적인 삶의 노고를 넘어 자신을 고양시킨다.
D. 축제의 동기는(자연이 봄에 성장하는 것처럼)도화된 어떤 반복되는 사건이거나, 인회적인 사건이다. 양자의 사건방식은 시기적으로 반복되는 제도화된 축제에 동기를 부여할 수 도 있다. 축제의 근원이 일회적인 사건에서 비롯될 경우 그것은 기념제가 되고, 일던 그렇게 생겨난 것은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현존재의 구성요소로서 현제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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