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김춘수 시론
ⅰ. 시적 순수성의 옹호
ⅱ. 의미에서 무의미로
ⅲ. 절대언어와 무의미 시
2. 이승훈 시론
ⅰ. 해체주의 논의
ⅱ. 비대상의 세계
ⅲ. 시와 비시, 미학과 반 미학 사이
Ⅲ. 결론
Ⅱ. 본론
1. 김춘수 시론
ⅰ. 시적 순수성의 옹호
ⅱ. 의미에서 무의미로
ⅲ. 절대언어와 무의미 시
2. 이승훈 시론
ⅰ. 해체주의 논의
ⅱ. 비대상의 세계
ⅲ. 시와 비시, 미학과 반 미학 사이
Ⅲ. 결론
본문내용
것 흘러가는 것 그러므로 가을 오후 시청 앞 사람들도 시다 모두가 시다 시는 없으므로 이 시들을 사랑해야 하리 간판도 거리에 시를 쓰고 마네킹도 유리창에 시를 쓰고 이 저녁도 시를 쓴다 시를 쓰며 한 세상 산다 시는 없으므로
- 「모두가 시다」전문
세상 만물이 모두 자율성, 절대성 이른바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있고 의타기가 있다는 논리는 이 시에서도 적용된다. 시 자체의 고유한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비시와의 관계에서 시가 있다는 것, 일체가 의타기성이라는 것, 그러므로 ‘새기고, 쓰고, 사라지는’ 모든 것, 예컨대 낙서나 햇살, 낙엽, 포말은 물론이고 가을 시청 앞 사람들까지도 시가 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인식은 시라는 대상뿐만 아니라 시를 쓰는 주체인 시인 자신까지도 변화시킨다. 간판도 시인이고 마네킹도 시인이고 저녁도 시인이고 한 세상도 시인이다. 이 모든 것은 시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 "시는 없으므로", "모두 시다" 는 언술은 이 시의 맨 처음과 끝에 위치하면서 전체 뼈대를 형성하고, 그 안의 언술들은 모두 세부적인 살이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자시의 시적 견해를 밝힌 시론이면서 일종의 메타시라 할 수 있다. 여기서도 물론 시론과 존재론, 일상의 무게가 균등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시가 특이한 것은 선이 성취하는 세계관이나 관념을 직접적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선적 사유의 틀 속에서 자신의 일상과 시론과 무의식을 노래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 시를 통해 보여주는 "시는 없으므로", "모두 시다"는, 그의 시론은 선에서 말하는 일종의 충격요법, 다시 말해 파열이나 정신과도 맥이 닿아 있다. 결국 엉뚱한 궤변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철학적 성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승훈의 시는 아마도 선(禪)의 세계와 만나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승훈의 시가 모더니즘 경향과 해체적 양상을 거쳐 선으로 들어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론 <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시의 고유성이나 본질성이라 일컬어지는 시의 법에 대한 부정이다. 시라는 실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시는 고유의 자성이 없다는 것, 단지 의타기성에 의해 시가 산출된다는 것이다. 자성이 아니라 의타기성, 고유성이 아니라 상호성, 본질이 아니라 허구, 허구가 본질이고 본질이 허구인 세계가 실제 세계의 모습이라는 인식은 선적 사유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그가 실험하고 있는 시들은 결국 그의 선적 세계를 글쓰기를 통해 실천하는 하나의 양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굳이 선의 이론이나 선의 구체적 사상 체계를 시 속에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가 선의 실천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선'이나 '불교'를 노래하는 여타의 다른 시인들과 구별된다. 이승훈은 선적 사유를 통해 일상을 노래한 것으로 시 속에 선적 사유가 침윤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그의 시 속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섣부른 초월이나 동화를 꿈꾸지 않는다.
Ⅲ. 결론
김춘수의 ‘무의미’와 이승훈의 ‘비대상’을 파고들어 보니 오히려 시가 너무 공허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단순히 시나 문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에 던져져야 할 질문이고, 우리의 삶에 던져져야 할 질문이고, 나아가 세계와 우주에 던져져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삶을 '이것 이다' 라고 자신 있게 한정지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존재 하겠는가? 우리의 삶 또한 자성이 아니라 의타기성에 의해 이루어질 따름이다. 결국 우리 인생 또한 공(空)한 것이며, 공하면서도 어렴풋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 시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가 아니라 시의 죽음, 미학이 아니라 미학의 죽음이다. 새로운 미학은 새로운 대상과 함께 어우러질 때라야만 산출할 수 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문학 이론과 실제의 작품 해석이 따로 노는, 분리와 불일치로 특징지어지는 학문적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별적인 작품해설이 없는 이론은 추상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절제의 기법화, 의미의 무화, 대상의 존재화 등은 묘사주의에서 비롯된 특징이다. 또한 통사적 질서를 깨뜨리는 실험을 극단화하면서 의미 해체와 통사 해체로 나아가는 것은 무의미시가 산출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시에서 삶의 모방적 차원을 철저히 배격하고 통사와 의미 해체라는 기법을 통해 무의미시에 이르는 실험을 통해 그들은 시에서 현실이나 인간적 음영을 거세하려는 비인간화라는 예술관의 인식과 시학을 집약한다. 이러한 방법적 구조를 통해 자신들의 시를 인용하고 비평함으로써 자기 시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새롭게 드러내고, 더 나아가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라기보다 결국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것일 뿐이라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우리 시가 보여주는 순수성은 시대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의 내면세계를 노래한 것은 미적 모더니즘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미적 모더니즘의 대부' 역할을 한 김춘수와 그의 계보를 이어받은 이승훈. 일상적 의미에 대한 미적 비판이라는 의미를 띠는 무의 세계를 표현하고, 시적 언어에 대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탐구는 한국 현대시 역사에 있어 위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이룩하고 발전시킨 무의 세계와 모더니즘, 해체주의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생성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과제를 통하여 김춘수와 김수영의 시 시계에 대하여 피상적이나마 이해하게 된 만큼, 앞으로도 그들의 시를 많이 알고 배워나감으로써 더 깊이 성찰해 나가야겠다.
※ 참고문헌 ※
리토피아(계간), 리파토리아, 2004년 봄호.
상허학회, 새로 쓰는 한국시인론, 백년글사랑, 2003.
이승훈,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집문당, 2003,.
이승훈, 한국 모더니즘 시사, 태학사, 2000.
이승훈, 한국현대대표시론, 문예출판사, 2000.
이윤택, 해체, 실천, 그 이후, 청하, 1988.
이은정, 현대시학의 두 구도 金春洙와 金洙暎, 소명출판, 1999.
- 「모두가 시다」전문
세상 만물이 모두 자율성, 절대성 이른바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있고 의타기가 있다는 논리는 이 시에서도 적용된다. 시 자체의 고유한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비시와의 관계에서 시가 있다는 것, 일체가 의타기성이라는 것, 그러므로 ‘새기고, 쓰고, 사라지는’ 모든 것, 예컨대 낙서나 햇살, 낙엽, 포말은 물론이고 가을 시청 앞 사람들까지도 시가 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인식은 시라는 대상뿐만 아니라 시를 쓰는 주체인 시인 자신까지도 변화시킨다. 간판도 시인이고 마네킹도 시인이고 저녁도 시인이고 한 세상도 시인이다. 이 모든 것은 시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 "시는 없으므로", "모두 시다" 는 언술은 이 시의 맨 처음과 끝에 위치하면서 전체 뼈대를 형성하고, 그 안의 언술들은 모두 세부적인 살이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자시의 시적 견해를 밝힌 시론이면서 일종의 메타시라 할 수 있다. 여기서도 물론 시론과 존재론, 일상의 무게가 균등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시가 특이한 것은 선이 성취하는 세계관이나 관념을 직접적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선적 사유의 틀 속에서 자신의 일상과 시론과 무의식을 노래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 시를 통해 보여주는 "시는 없으므로", "모두 시다"는, 그의 시론은 선에서 말하는 일종의 충격요법, 다시 말해 파열이나 정신과도 맥이 닿아 있다. 결국 엉뚱한 궤변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철학적 성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승훈의 시는 아마도 선(禪)의 세계와 만나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승훈의 시가 모더니즘 경향과 해체적 양상을 거쳐 선으로 들어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론 <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시의 고유성이나 본질성이라 일컬어지는 시의 법에 대한 부정이다. 시라는 실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시는 고유의 자성이 없다는 것, 단지 의타기성에 의해 시가 산출된다는 것이다. 자성이 아니라 의타기성, 고유성이 아니라 상호성, 본질이 아니라 허구, 허구가 본질이고 본질이 허구인 세계가 실제 세계의 모습이라는 인식은 선적 사유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그가 실험하고 있는 시들은 결국 그의 선적 세계를 글쓰기를 통해 실천하는 하나의 양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굳이 선의 이론이나 선의 구체적 사상 체계를 시 속에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가 선의 실천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선'이나 '불교'를 노래하는 여타의 다른 시인들과 구별된다. 이승훈은 선적 사유를 통해 일상을 노래한 것으로 시 속에 선적 사유가 침윤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그의 시 속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섣부른 초월이나 동화를 꿈꾸지 않는다.
Ⅲ. 결론
김춘수의 ‘무의미’와 이승훈의 ‘비대상’을 파고들어 보니 오히려 시가 너무 공허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단순히 시나 문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에 던져져야 할 질문이고, 우리의 삶에 던져져야 할 질문이고, 나아가 세계와 우주에 던져져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삶을 '이것 이다' 라고 자신 있게 한정지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존재 하겠는가? 우리의 삶 또한 자성이 아니라 의타기성에 의해 이루어질 따름이다. 결국 우리 인생 또한 공(空)한 것이며, 공하면서도 어렴풋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 시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가 아니라 시의 죽음, 미학이 아니라 미학의 죽음이다. 새로운 미학은 새로운 대상과 함께 어우러질 때라야만 산출할 수 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문학 이론과 실제의 작품 해석이 따로 노는, 분리와 불일치로 특징지어지는 학문적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별적인 작품해설이 없는 이론은 추상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절제의 기법화, 의미의 무화, 대상의 존재화 등은 묘사주의에서 비롯된 특징이다. 또한 통사적 질서를 깨뜨리는 실험을 극단화하면서 의미 해체와 통사 해체로 나아가는 것은 무의미시가 산출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시에서 삶의 모방적 차원을 철저히 배격하고 통사와 의미 해체라는 기법을 통해 무의미시에 이르는 실험을 통해 그들은 시에서 현실이나 인간적 음영을 거세하려는 비인간화라는 예술관의 인식과 시학을 집약한다. 이러한 방법적 구조를 통해 자신들의 시를 인용하고 비평함으로써 자기 시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새롭게 드러내고, 더 나아가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라기보다 결국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것일 뿐이라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우리 시가 보여주는 순수성은 시대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의 내면세계를 노래한 것은 미적 모더니즘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미적 모더니즘의 대부' 역할을 한 김춘수와 그의 계보를 이어받은 이승훈. 일상적 의미에 대한 미적 비판이라는 의미를 띠는 무의 세계를 표현하고, 시적 언어에 대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탐구는 한국 현대시 역사에 있어 위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이룩하고 발전시킨 무의 세계와 모더니즘, 해체주의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생성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과제를 통하여 김춘수와 김수영의 시 시계에 대하여 피상적이나마 이해하게 된 만큼, 앞으로도 그들의 시를 많이 알고 배워나감으로써 더 깊이 성찰해 나가야겠다.
※ 참고문헌 ※
리토피아(계간), 리파토리아, 2004년 봄호.
상허학회, 새로 쓰는 한국시인론, 백년글사랑, 2003.
이승훈,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집문당, 2003,.
이승훈, 한국 모더니즘 시사, 태학사, 2000.
이승훈, 한국현대대표시론, 문예출판사, 2000.
이윤택, 해체, 실천, 그 이후, 청하, 1988.
이은정, 현대시학의 두 구도 金春洙와 金洙暎, 소명출판, 1999.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