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중세사)600년경 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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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중세사)600년경 동양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600년경의 동양, 그 후 300년
1. 중국 - 수의 멸망과 당의 성립
2. 북방유목사회 - 위구르, 돌궐
3. 일본 - 다이카개신과 쇼토쿠태자
4. 우리나라 - 삼국 통일과 발해
5. 인도 - 또다시 분열되다

Ⅲ 맺음말

Ⅳ 참고자료

본문내용

안동도호부를 두었으며, 곳곳의 부흥운동도 실패로 돌아갔다.
(3) 나당전쟁 :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영토로 만든 당나라는 다시 신라까지 넘보았으나, 670년 신라가 먼저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를 공략, 나당전쟁으로 들어갔으며, 671년·675년, 그리고 676년에 군량보급 차단, 매소성전투, 기벌포(伎伐浦)대첩 등으로 당나라를 압박하여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랴오둥으로 옮기게 함으로써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4) 신라의 삼국통일 : 신라의 한반도 통일은 한국 민족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고구려·신라·백제의 분립으로 언어와 풍속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던 것을 통일 이후 같은 민족으로의 융화 위에서 언어·생활·풍속이 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삼아, 융합·단일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비록 고구려의 땅을 거의 잃는 불완전한 통일이었으며 융화정책에도 한계가 있었지만, 한반도의 융합은 후에 단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2) 통일신라
(1)중앙 정치 조직
통일후 왕권의 전제화 과정에서 정치족직의 정비도 이루어져 신문왕때 공장부와 예작부 를 설치함으로써 6전 조직이 완비. 중앙관청중 최고 관청은 집사부로 왕명으로 실제 정무, 특히 국가 기밀 업무를 총괄했고 그 장관이 시중이었다. 통일후의 신라는 왕권이 전제화하는시기이므로 집사부와 시중의 위상이 놓았다. 전제화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교정치 이념을 도입해 국학을 설립한 점이다.
귀족세력을 억압하고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학에 대한 건식이 뛰어난 6두품 집단이 국왕과 손을 잡고 귀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2)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조직
통일신라의 기본적인 골경이 완성되는 신문왕 때에 9주5소경의 지방제도가 완비.(9주의 편성은 민족융합책의 하나) 9주의 장관으로는 총관(나중에는 도독)이 파견되었고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이 파견되었다. 중앙의 14개 관청 중에는 사정부라는 감찰기관이 있었는데 그의 지방 파견 관리를 지방을 의미하는 외(外)를 붙여 외사정이라 불렀다. 관리의 비행을 규찰하는 오늘날의 감사원이 하는 활동을 했다.
통일신라는 중앙집권을 효율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호족(지방세력가)을 서울에 불러 인질로 삼는 \"상수리제도\"와 천민집단인 향부곡제도를 강화했다.
통일신라의 지방군은 10정으로 구성되었다. 9주에 1정씩 재치하고 국경의 대부분 지역이 포함된 한주에는 1정을 추가했다. 중앙군으로는 9서당이 있었다. 9서당에 신라+고구려+백제인도 포함시킨 것은 민족 융합을 위한 신라의 노력으로 이해된다.
(3) 토지제도
귀족들의 녹읍을 폐지하고 대신 관료전을 지급. 녹읍에는 그 토지에 대한 조세 공납 노동력의 모든 수취권이 귀족에 위임되었으나 관료전은 조세와 공물에 대한 수취권만 부여되었다. 중대 절정기인 성덕왕 때에는 정전이라는 민전을 농민에게 지급함으로써 귀족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해 국가의 농민 지배를 강화하고 간접적으로 귀족세력을 견제하는 이중의 목적달성을 도모했던 것이다. 경덕왕 때는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다. 이는 왕권의 약화를 말한다.
하대에는 진골귀족의 무능력과 내분은 골품제 사회의 존재의미를 없애 버려 사회통제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역사 조도세력의 등장을 가능케 한다. 그들이 바로 호족이며 지방의 행정 군사 재정권을 장악하고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는 선종과 국토의 지방 중심재편성을 주장하는 풍수지리설은 이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또한 진골에게 배척되어 반신라적 경향을 보이던 6두품세력과도 정치적으로 결합해 유교정치이념을 정착시킨다.
3) 발해
(1) 발해의 성립
676년 신라에게 패한 당나라가 한반도 이남에서 철수 한 뒤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지역은 신라의 영토였고 당의지배력은 요동지역까지만 미쳤다. 따라서 만주의 중동부와 한반도 북부지역은 주인 없이 텅비게 되었다. 696년에 거란족이당의 압제에 항거하여 발란을 일으키게 되니까 영주는 곧 혼란에 빠진다. 이때에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걸걸중상은 말갈족의 추장 걸사비우와 손을 잡는다.
그때에 당군은 먼저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추적하게 된다. 이에말갈족이 먼저 당군과 싸웠으나 걸사비우가 전사하게 되고 걸걸중상은 남은 말갈족 무리를 이끌고 계속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당군도 역시 계속 추격왔다. 그러나 걸걸중상은 도중에 죽게 되고 아들 대조영이 뒤를 잇게 되고, 대조영은 천문령 싸움에서 당을 물리치고 발해를 건국 하게 된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진이라는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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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1.25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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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76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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