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 원문과 배경 설화,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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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향가 원문과 배경 설화, 해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은 용자로 태어나서 고난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영웅 설화의 공식적인 과정을 밟는다. 영웅의 일생은 결혼에 의해 성공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 ‘서동요’는 이런 성공의 기능을 제시하고 있다.
제 목 : 안민가(安民歌)
원문
<<老子道>>德經等 大王備禮受之 王(35代 경덕왕:742-765)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負櫻筒(一作荷)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 君隱父也(君은 어비여) / 臣隱愛賜尸母史也(臣은 샬 어여) /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民 얼아고 샬디) / 民是愛尸知古如(民이 알고다) / 窟理叱大生以所音物生(구믈ㅅ다히 살손 物生) / 此惡支治良羅(이흘 머기 다라) / 此地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이 리곡 어듸갈뎌 디) / 國惡支持以知古如( 나라악 디니디 알고다) /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아으 君다이 臣다이 民다이 ) / 國惡太平恨音叱如 (나라악 太平니다) >>
해석
이 노래는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조에 다음과 같은 유래와 함께 실려 있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 문루 위에 거동하여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능히 길에 나가 훌륭하게 차린 승려를 데리고 올 수 있겠는가.\"
이때 마침 차림새와 거동이 깨끗한 승려 한 사람이 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려오니 왕이 말하였다.
\"내가 말한 훌륭하게 차린 승려가 아니다.\"
신하들이 다시 찾아보니 어떤 승려 한 사람이 장삼을 입고 벗나무로 만든 통(삼태기라고도 함)을 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면서 문루 위로 맞아 들여 통 속을 보니 차 다리는 도구만 가득 담겨 있었다. 왕이 말하였다.
\"네가 누구냐.\"
\"충담입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저는 매양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다려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드립니다. 오늘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도 한 잔의 차를 마실 연분이 있는가.\"
승려가 이에 차를 다려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 안에서 희한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왕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대사가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그러하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를 위하여 백성들을 다스려 편안하게 할 노래를 지어 주시오.\"
승려는 그 자리에서 명을 받들어 \'안민가\'를 지어 바쳤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기고 왕사로 봉하였으나 승려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였다.
君은 아비요 / 臣은 사랑하실 어미요, / 民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진대 / 民이 사랑을 알 것입니다. / 꾸물대면서 사는 백성들 / 이를 먹여 다스려져 /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할지면 / 나라 안이 보전할 것을 알 것입니다. / 아, 君답게 臣답게 民답게 할 것이면 /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감상
안민가는 다른 향가와 달리 그 내용이 유교적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다른 대부분의 작품들은 주로 불교적이었다는 점에서 안민가가 유교적이라는 내용을 가지고 국태안민의 이념을 밝힌 것은 특이하다. 개인적 서정보다는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고자 한 현실적인 노래로, 유교사상과 불교의 정법 사상이 복합되어 있다. 아무래도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교적인 이념보다는 유교적 충효사상이 더 타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경덕왕 때에는 사회적으로는 천재지변이 잦아 농사가 어려웠고 정치적으로는 김양상의 도전에 의해 왕권이 위협당하는 심각한 국가적 위기가 있었다. 이에 굶주려 유민이 된 백성들이 신라를 떠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등 민심이 동요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유교적 정치 이념이 대안으로써 자리 잡아 가던 시기였다. 향가를 지은 신라 사람들은 당시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에는 불교가 귀족 불교로서 각광을 받았고, 화랑도를 통한 심신 연마를 중요시했던 만큼, 향가를 지은 사람들은 주로 불교의 승려와 화랑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향가 작품이 불교를 배경 사상으로 삼은 데 비해, 이 작품만이 유일하게 민본주의(民本主義)라는 유교적 통치 이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승려가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유교적인 이상 정치에 대해 노래했다는 점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씌어질 당시에는 각종 천재지변이 민생(民生)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의 도전으로 왕권이 위협받는 등 정치적으로도 위기 상황이었다. 그래서 경덕왕은 충담사로 하여금 향가를 짓도록 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따라서 예술성보다는 교훈성이 강한 작품이 되었다.
질문
① 유가적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안민가에서 불교의 사상적 기저는 찾을 수 없는가?
② 충담사는 역사적 실존 인물인가? 설화문맥에서 비롯된 가공인물인가? 혹은 설화적 인물이지만 그 이면에 실제로 역사적 작자가 존재했는가?
제 목 : 원가(怨歌)
원문
忠與二友相約 掛冠入南岳 再徵不就 落髮爲沙門 爲王創斷俗寺居焉 願終身丘壑 以奉福大王 王許之 留眞在金堂後壁是也 南有村名俗休 今訛云小花里(按三和尙傳 有信忠奉聖寺 與此相混 然計其神文之世 距景德已百餘年 況神文與信忠乃宿世之事 則非此信忠明矣 宜詳之) 又別記云 景德王代有直長李俊(高僧傳作李純) 早曾發願 年至知命 須出家創佛寺 天寶七年戊子 年登五十矣 改創槽淵小寺爲大刹 名斷俗寺 身亦削髮 法名孔宏長老 住寺二十年乃卒 與前三國史所載不同 兩存之闕疑 讚曰 功名未已先霜 君寵雖多百歲忙 隔岸有山頻入夢 逝將香火祝吾皇 (三國遺事 卷第五 避隱第八 信忠掛冠條) <<物叱好支栢史( 자시) / 秋察尸不冬爾屋墮米( 안 이우리 디매) / 汝於多行齊敎因隱(너 엇뎨 니저 이신) /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울월던 치 겨샤온) / 月羅理影古理因淵之叱(그림제

키워드

향가,   원문,   해석,   배경설화
  • 가격1,700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6.12.10
  • 저작시기2006.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8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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