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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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라틴아메리카의 건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원주민건축
1) 올메까
2) 아스떼까
3) 마야
4) 잉까

3. 식민지 시대의 바로크 건축
1) 종교 건축
2) 군사 건축
3) 도시계획과 민간 건축

4. 독립시기의 신고전주의 건축

5. 20세기 현대 건축
1) 멕시코
2)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3) 콜롬비아
4) 아르헨티나
5) 브라질
6) 기타국가들

6. 결론

본문내용

양식은 바로크 양식이 더욱 극단화되고 복잡하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중남미에 처음으로 이 양식이 소개된 것은 17세기에 세비야 출신 헤로니모 데 발바스Jeronimo de Balbas가 멕시코 시 대성당의 대제단을 조각하면서 부터이다. 발바스는 사각형 또는 직각의 받침기둥을 나뭇가지와 꽃 모양 등으로 현란하게 장식하며 츄리게라 양식을 도입하였다. 이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멕시코 시 대성당의 감실과 딱스꼬의 산따 쁘리스까 등이 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식민 시대의 멕시코야말로 바로크 건축의 중심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계 8대 바로크 건축물 중 4개가 멕시코에 있다는 것은 그 점을 단적으로 입증해 준다. 멕시코 시 대성당의 감실, 떼뽀쪼뜰란Tepozotlan 의 에수회 학교(1606-1762), 께레따로Queretaro에 있는 산따 로사 수도원 그리고 따스꼬시의 산따 쁘리스까 성당 등이 그것이다.
건축예술의 형식을 좌우하는 것은 예술가의 상상력과 미적 취향 그리고 사용 가능한 건축자재라고 볼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이전에도 이미 건축 전통이 강한 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도입된 유럽의 건축양식은 지역의 특색에 맞게 많은 변화를 겪으며 특히 인디오 건축의 복잡한 장식의 영향을 받는다. 페루 지방에서 유해하였던 안데스 바로크 양식은 바로 이런 특성을 유감 없이 보여주는 예이다.
페루의 경우 해안 지대의 성당과 개인주택은 식민지 시대의 건축미를 형성하지만 정부기관의 건물들 중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건축물이 없다. 페루가 스페인에서 거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당시 정부 관리들은 페루를 항구적으로 머물 곳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레끼빠, 리마, 뜨루히요, 꾸스꼬 등지의 식민지 시대 건축양식은 혼합적 성격을 띠면서 나름대로의 특징을 보여준다.
안데스 바로크 양식은 1651-69년 동안의 꾸스꼬 대성당과 꼼빠니아 교회건축과 함께 시작되며 1657-75년 사이에 건축된 리마의 산 프란시스꼬 교회 건설로 이어진다. 꾸스꼬는 마누엘 데 모이네도 주교(1673-1700)의 재임시에 50개 이상의 교회를 건축하면서 페루 건축의 주도권을 과시한다.
식민지 시대의 리마는 회교도식으로 회반죽된 도시였다. 잘 다듬어 지고 닫혀져 있는 상태의 돌출한 목재 발코니, 정면 장식들이 계속 연결되어 마치 불규칙적인 하나의 거대한 벽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정면 장식은 반질반질하고 단조로운 벽에 5미터 또는 7미터 간격으로 길고 나지막한 창문을 가진 돌출된 현관이 철제봉으로 지탱되어 있다. 내부에는 비와 큰 더위가 없는 리마의 기후에 적합한 그리스 로마 양식으로 건물이 설계되어 있다. 기본 벽은 벽돌로 만들고 부수적인 벽들은 목재벽으로 안쪽으로 수숫대를 대고 진흙을 바른 낀차quincha로 지어졌다. 이 낀차는 철근 콘크리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즉 나무와 수숫대는 철근의 역할을 하고 진흙은 콘크리트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 진흙 콘크리트는 지진을 대비한 최상의 건축자재였다.
한편 안데스 바로크는 1700-40년 사이 리마에 건축된 또레 따글레Torre Tagle 궁과 산 아구스띤 교회와 함께 최성기를 맞는다. 또레 따글레 궁은 식민지 시대의 페루의 국보급 건축물로서 당시 유행했던 츄리게라 건축양식과 아울러 동양적인 요소와 끄리오요(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의 요소를 가미한 무데하르 건축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비대칭적인 정면의 구조는 중국의 탑을 연상케 하는 장식으로서 바로크 양식을 페루식으로 소화해 낸 것이다. 돌출한 아랍식 발코니를 지탱하고 있는 까치발은 중국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문과 내부의 천장은 섬세한 나무로 치장되어 있는데 매우 아름답다. 벽은 중국의 수가 놓여진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바닥은 박달나무와 삼나무로 치장되어 있다.
위에서 본대로 식민지 시대 리마 시의 건축은 부드러움, 우아함 그리고 경쾌함이 고유의 특징을 이룬다. 건축자재의 결핍으로 화려한 내부 장식은 영주의 저택에 한정되었다. 절대적인 가톨릭과 회교의 영향 때문에 시인 호세 산또스 초까노Jose Santos Chocano는 리마 시의 대저택의 반은 기도실 같고 반은 회교도의 후궁 같다고 말한다. 식민지 시대의 리마 시 인구의 10%를 차지하던 성직자들은 두세 블록마다 소성당, 성당 또는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장엄한 면에서 보자면 리마시의 종교 건축물은 끼또나 멕시코 시에 비교될 수 없다. 1746년 지진 이후 돌과 목재가 부족해 원형지붕에 벽돌과 낀차 사용이 의무화되었기 때문에 검소하게 건축되었고 그 보상으로 내부 장식은 화려하게 했다. 도시가 조성된 직후에 건축된 대성당은 1609, 1687, 1746, 1970년 대지진 후에 재건되면서 다양한 건축양식을 취하지만 대표적인 건축 양식은 은세공식 건축 양식이다. 16세기 말에 등장한 뜨루히요 출신의 프란시스꼬 베세라는 당시 남아메리카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로서 리마와 꾸스꼬 등의 중요한 건물들을 지었으며 이는 17, 18세기의 최성기 바로크 건축으로 가는 과도기 역할을 한다.
한편 아레끼빠와 뜨루히요의 민간 건축은 일반적으로 리마의 건축과 비슷해서 내부장식과 문이 덜 화려하지만 돌출한 격자 창이 높게 달려 있다. 뜨루히요의 성당들도 정면을 내부 제단과 설교대와 같이 화려하게 장식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성당은 성가대의 바로크식 조각과 제대의 츄리게라 양식이 예술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중요한 문화재로 꼽히는 까르멘 대성당은 내부 장식이 유명하다. 이 성당은 은으로 조각된 주 제대의 조각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제단이 금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 전체는 페루의 안데스 바로크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8세기는 주지하다시피 부르봉왕가의 전성기로서 프랑스 신고전주의가 유행한 시기이다. 건축에서 신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 작품을 모방했으며 이성, 규율, 조화를 이상으로 삼으면서 바로크 예술의 무절제하고 주관적인 요소를 배격하였다. 그러나 신세계에 신고전주의가 도래한 것은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이며 그 때까지도 바로크 양식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저면 알레호 까르

키워드

라틴,   중남미,   남미,   건축,   문화,   잉카,   마야,   바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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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19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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