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 재평가- 광해군과 인목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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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 속 인물 재평가- 광해군과 인목대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임진왜란, 그 혼란기의 광해군과 인목대비

2. 광해군과 인목대비

3. 광해군의 즉위와 계축옥사의 시작

4. 계축옥사와 영창대군의 폐서인, 인목대비의 폐모논의

5. 영창대군의 죽음

6.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폐위

7.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관계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사능리에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PP. 295~296
(2) 인목대비 1584(선조 17)~1632(인조 10)
조선 선조의 계비. 연안김씨로, 연흥 부원군 제남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때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은 적통론에 입각하여 적출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을 제서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했다. 또한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패륜행위는 결국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으로써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에 친필로 쓴 ‘보문경’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 첩이 남아 있다. 존호는 소성정의명렬이고, 휘호는 광숙장정이며, 능은 목릉으로 양주에 있다. 상게서. P.464
(3) 주변 인물들-
이분들 조사해야 하는데 심신이 피로함~ ㅋㅋ
유영경
정인홍
이이첨
3. 광해군의 즉위와 계축옥사의 시작
선조는 임란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왕위에 오른 지 20여년이 되었는데도 본처 소생의 아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도 세자책봉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급하게 공빈 김씨에게서 태어난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인원왕후 박씨가 아무런 자식도 남기지 못하고 죽자, 선조는 후처를 맞이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인목대비이다. 혼인할 당시 광해군은 이미 28살이었고 인목대비는 19살에 불과 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어머니로써 인목대비를 모실 수밖에 없었다.
인목대비는 선조와 사이에서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로써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嫡子)가 되었으며 이것으로 정실부인의 자식이자 후계자로서의 하자가 없는 아들을 얻게 된 선조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태도는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당시 선조의 신임을 받고 영의정까지 오른 유영경은 이러한 선조의 의중을 일찌감치 눈치 채고 영창대군을 다음 왕위로 올리기 위해 힘썼다. 이는 그간 왜란을 겪으면서 정치적인 활동을 해오며 기반을 쌓아온 광해군에게는 자신의 위치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는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뜻밖의 순간에 선조가 죽으면서 광해군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던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의 몰락을 알리는 것이며 또한 광해군을 지지했던 정인홍,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왕으로써 이들 당파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했던 광해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대북파와 나머지 정파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고, 대북파는 어떻게 하면 권력을 더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을지 골몰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계축옥사’는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4. 계축옥사와 영창대군의 폐서인, 인목대비의 폐모논의
613년, 광해군 5년 4월, 박응서, 서양갑, 심우경, 박치의, 허홍인, 김평손, 김경손 등은 모두 명문가의 서자들로서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고 자부함에도 불구하고 서얼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 불만을 품었던 자들이다. 이들은 벼슬길을 열어달라고 조정에 요청했다가 거부당하자 여강 근처에 모여 살면서 병란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무리를 모아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 이들은 거사를 꾀하기 위하여 자금을 모으려 했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과 동래의 왜관을 왕래하던 상인을 습격하여 은을 빼앗았다.
이 사건은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강도사건의 범인 중 한사람인 박응서의 자백이 그 불길의 시작이 된다. 박응서는 모은 자금을 이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으며, 역모사건을 총괄적으로 지휘한 우두머리는 영창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라고 자백했다.『광해군 일기』에는 박응서 등이 저지른 ‘은상살해사건’이 역모사건으로 비화된 것이 이이첨의 사주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이이첨이 포도대장 한희길을 통해 박응서를 회유하여 역모사건으로 자백하라고 사주했다는 것이다. 이는『광해군일기』5년 4월 25일의 기록에 상세히 나와 있다.
○사건이 발각되었을 때 박응서만 혼자 집에 있다가 체포되어 맨 먼저 자복하였다. 그리하여 형조로 이송한 다음 정형(正刑)에 처할 예정으로 있었는데, 응서가 옥중에서 상소하여 고하기를 “우리들은 천한 도적들이 아니다. 은화(銀貨)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 하였다.”고 하였다.【응서가 처음 갇히게 되었을 때 사대부들 가운데 혹 “이 사람들은 모두 명가의 자제들인 만큼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하며 구해 주려는 자들이 많이 있었고, 대장(大將) 한희길(韓希吉)도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이공(南以恭)과 박이서(朴彛읫) 등이 마침 은상(銀商)의 집안과 친하게 지내었으므로 그 실제 자취를 탐지한 다음 희길에게 성옥(成獄)하여 입계하라고 강력히 권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이 이를 듣고 희길을 불러 묻기를 “자네가 큰 도적을 잡았다고 들었는데 그 실상이 어떠한가?” 하니, 희길이 공초(供招)받은 사연을 모조리 알려 주었다. 이에 이첨이 마침내 희길 및 문생(門生) 김개 등과 비밀히 의논한 다음 몰래 사람을 들여보내 응서를 유도하였다. 그때 응서는 양갑 등보다 먼저 도적질한 사실을 자복한 데 대해 한창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던 데다가 또 죽게 된 상황에서 살아보고 싶은 욕심에 이첨의 사주를 받고 마침내 상변(上變)했던 것인데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와 많이 전파되었다. 그 격문(檄文) 수십 구(句)라는 것도 모두 변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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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17
  • 저작시기2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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