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로마 시대의 기본 의상
2. 로마인의 음식 문화
3. 로마인의 건축
4. 로마인의 결혼생활
5. 로마인의 성 생활
Ⅲ. 결 론
Ⅱ. 본 론
1. 로마 시대의 기본 의상
2. 로마인의 음식 문화
3. 로마인의 건축
4. 로마인의 결혼생활
5. 로마인의 성 생활
Ⅲ. 결 론
본문내용
재판정에 나타나야 했던 변호사들이 파에눌라를 입고 나타났
다고 한다. 파에눌라는 결국 카줄라라는 이름으로 성직자들의 예복이 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의 미사복으로 사용되고 있다.
라체르나는 클라미스처럼 군인들에게서 유래하였다. 라체르나는 루쿨루스가 아시아에서 로마로 가져왔던 것이었다.
5) 달마티카
남자들의 겉옷으로 마지막으로 달마티카가 있었다. 이것의 모양은 튜니카와 비슷하였는데, 튜니카 보다 소매가 더 넓고 짧으며 허리띠를 매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났다. 달마티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시대에 로마에 등장하여 거리에서 입고 다니게 되었다.
바지는 로마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이었고 북쪽의 야만인들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바지는 그 기원 때문에 처음에는 경멸 시 되었지만, 그것이 가진 장점들은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2~3세기 이후 점차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처음에 바지는 무릎까지만 내려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이내 길어졌음에 틀림없다. 람프리디우스는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에 대해 기록하기를, 황제는 전임자들처럼 진홍색 바지를 입지 않고 흰색의 바지를 입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지가 튜니카 아래까지 내려왔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여자들이 집에서 입은 옷으로서의 튜니카와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이 옷을 좀더 길게 입었을 뿐이었다. 여자들은 튜니카를 복사뼈까지 내려오게 입었고 가슴아래다 띠를 묶었다. 소매 모양에서도 여성용 튜니카는 남성용을 따랐다. 4세기 이후부터 비로소 소매의 형태가 매우 넓게 되었다.
여자들이 외출할 때에는 망토로서 머리 위까지 팔라를 둘렀다.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그밖에도 두건이나 배일을 사용했다. 이렇게 머리카락을 가리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다. 기독교도 여자들은 기도할 때 머리를 완전히 가려야 했다.
옷의 색깔은 천의 원료인 양모의 자연 색과 같은 누르스름한 색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부가 증가하게 되자 이러한 단순한 색에 머물지 않았다. 튜니카는 목에서부터 끝단까지 이어지는 두 줄의 자주색 띠로 특징 지워졌다. 클라부스라고 불리는 이 장식이 좁을 경우에는 기사 신분의 표시였고, 반대로 넓은 장식은 원로원 의원들의 특권이었다. 튜니카를 입을 때에는 이 클라부스가 똑바르고 나란히 되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4세기에는 클라부스가 짧아져서 겨우 가슴 아래까지 이어졌다. 그 대신에 풍부한 장식들이 대용물로서 등장하였다. 3세기부터는 튜니카의 단과 목둘레와 소매에 밴드 모양의 띠를 붙이기 시작하였으며, 1세기 후에는 원모양의 자주색무늬가 나타났다. 이러한 장식욕은 모든 의상에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통치기 이후 옷에서 사치가 심해졌다. 천이 금으로 수놓아져서 두꺼워지고 보석으로 치장해 호화로워지다 보니, 더 이상 주름이 잡히지 않게 됐다. 트리움팔토가를 입은 사람은 마치 신상처럼 뻣뻣하게 서 있어야 했다. 이러한 예복들은 동양의 견직물이 서양에 전해져서 즉시 매우 애호받게 된 이후 점점 더 값비싸졌으며, 점점 더 무거워지고 뻣뻣해졌다. 특히 이러한 사치는 비잔티움의 동로마 제국 황제의 궁저에서 촉진되었다.
견직물은 대개 양식화된 동물 모양의 문양이 있었다. 이 영향으로 새로운 형태의 예복들이 생겨났는데, 특히 여성의 예복에서 그러하였다. 새로운 형태의 예복은 어깨 둘레에 넓은 깃이 달려 있는데, 그 깃에서부터 끝단 가까이까지 앞뒤에 두 줄의 띠가 대어져 있었다. 두 줄의 띠는 대략 무릎 부근에서 같은 넓이의 가로 띠와 서로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띠 구조는 진주와 보 석을 달기 위한 것이었다. 천히 두꺼울수록 보석들을 장식하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6) 검소한 게르만족의 의상
제정시대 로마의 의상은, 비잔티움으로부터는 뻣뻣한 나머지 신체의 형태를 완전히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까지 감추는 식의 모양을 받아들였던 반면에, 서쪽에서는 침입한 게르만족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되었다. 이것에서 유럽의 일반적인 로마 이후의 의상이 유래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의상은 검소하였다. 청동기 시대에 남자들은 어깨 위에서 고정시키는 무릎 길이의 좁은 랩스커트를 입었으며, 여자들은 소매 끝부분이 트여 있고 머리 위로 끼워 입는 블라우스와 발목 길이의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다.
로마의 율물들, 특히 트라야누스 기념주의 부조는 철기시대의 의상을 재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남자들 역시 모직과 리넨으로 된 소매 달린 상의를 입고 있는데, 로마의 튜니카와 별반 드
다고 한다. 파에눌라는 결국 카줄라라는 이름으로 성직자들의 예복이 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의 미사복으로 사용되고 있다.
라체르나는 클라미스처럼 군인들에게서 유래하였다. 라체르나는 루쿨루스가 아시아에서 로마로 가져왔던 것이었다.
5) 달마티카
남자들의 겉옷으로 마지막으로 달마티카가 있었다. 이것의 모양은 튜니카와 비슷하였는데, 튜니카 보다 소매가 더 넓고 짧으며 허리띠를 매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났다. 달마티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시대에 로마에 등장하여 거리에서 입고 다니게 되었다.
바지는 로마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이었고 북쪽의 야만인들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바지는 그 기원 때문에 처음에는 경멸 시 되었지만, 그것이 가진 장점들은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2~3세기 이후 점차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처음에 바지는 무릎까지만 내려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이내 길어졌음에 틀림없다. 람프리디우스는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에 대해 기록하기를, 황제는 전임자들처럼 진홍색 바지를 입지 않고 흰색의 바지를 입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지가 튜니카 아래까지 내려왔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여자들이 집에서 입은 옷으로서의 튜니카와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이 옷을 좀더 길게 입었을 뿐이었다. 여자들은 튜니카를 복사뼈까지 내려오게 입었고 가슴아래다 띠를 묶었다. 소매 모양에서도 여성용 튜니카는 남성용을 따랐다. 4세기 이후부터 비로소 소매의 형태가 매우 넓게 되었다.
여자들이 외출할 때에는 망토로서 머리 위까지 팔라를 둘렀다.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그밖에도 두건이나 배일을 사용했다. 이렇게 머리카락을 가리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다. 기독교도 여자들은 기도할 때 머리를 완전히 가려야 했다.
옷의 색깔은 천의 원료인 양모의 자연 색과 같은 누르스름한 색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부가 증가하게 되자 이러한 단순한 색에 머물지 않았다. 튜니카는 목에서부터 끝단까지 이어지는 두 줄의 자주색 띠로 특징 지워졌다. 클라부스라고 불리는 이 장식이 좁을 경우에는 기사 신분의 표시였고, 반대로 넓은 장식은 원로원 의원들의 특권이었다. 튜니카를 입을 때에는 이 클라부스가 똑바르고 나란히 되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4세기에는 클라부스가 짧아져서 겨우 가슴 아래까지 이어졌다. 그 대신에 풍부한 장식들이 대용물로서 등장하였다. 3세기부터는 튜니카의 단과 목둘레와 소매에 밴드 모양의 띠를 붙이기 시작하였으며, 1세기 후에는 원모양의 자주색무늬가 나타났다. 이러한 장식욕은 모든 의상에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통치기 이후 옷에서 사치가 심해졌다. 천이 금으로 수놓아져서 두꺼워지고 보석으로 치장해 호화로워지다 보니, 더 이상 주름이 잡히지 않게 됐다. 트리움팔토가를 입은 사람은 마치 신상처럼 뻣뻣하게 서 있어야 했다. 이러한 예복들은 동양의 견직물이 서양에 전해져서 즉시 매우 애호받게 된 이후 점점 더 값비싸졌으며, 점점 더 무거워지고 뻣뻣해졌다. 특히 이러한 사치는 비잔티움의 동로마 제국 황제의 궁저에서 촉진되었다.
견직물은 대개 양식화된 동물 모양의 문양이 있었다. 이 영향으로 새로운 형태의 예복들이 생겨났는데, 특히 여성의 예복에서 그러하였다. 새로운 형태의 예복은 어깨 둘레에 넓은 깃이 달려 있는데, 그 깃에서부터 끝단 가까이까지 앞뒤에 두 줄의 띠가 대어져 있었다. 두 줄의 띠는 대략 무릎 부근에서 같은 넓이의 가로 띠와 서로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띠 구조는 진주와 보 석을 달기 위한 것이었다. 천히 두꺼울수록 보석들을 장식하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6) 검소한 게르만족의 의상
제정시대 로마의 의상은, 비잔티움으로부터는 뻣뻣한 나머지 신체의 형태를 완전히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까지 감추는 식의 모양을 받아들였던 반면에, 서쪽에서는 침입한 게르만족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되었다. 이것에서 유럽의 일반적인 로마 이후의 의상이 유래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의상은 검소하였다. 청동기 시대에 남자들은 어깨 위에서 고정시키는 무릎 길이의 좁은 랩스커트를 입었으며, 여자들은 소매 끝부분이 트여 있고 머리 위로 끼워 입는 블라우스와 발목 길이의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다.
로마의 율물들, 특히 트라야누스 기념주의 부조는 철기시대의 의상을 재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남자들 역시 모직과 리넨으로 된 소매 달린 상의를 입고 있는데, 로마의 튜니카와 별반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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