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선정 개화운동가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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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인물 선정 개화운동가 김옥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생애 및 업적

2. 사상

3. 김옥균의 긍정적 측면

4. 김옥균의 한계

5. 나의 느낌

본문내용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고문이 되어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수신사 일행을 먼저 귀국시키고 서광범과 함께 더 체류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유학생들을 선발해 보내도록 하여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다음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 체류하는 동안 「치도약론」을 저술하였다. 그 후 1883년 6월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제3차로 일보넹 건너가 국채를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뮐렌도르프와 명성황후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김옥균이 휴대한 조선 국왕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에 허위 보고하여 방해함으로써, 국채모집은 완전히 실패하고 1884년 4월 귀국하였다.
그는 세차례에 걸친 도일과정에서 일본 명치유신의 성과를 견문하고 닥쳐올 나라의 위기를 급박하게 느껴 더욱 초조해졌으며, 그가 개화정책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청국 및 명성황후 수구파와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더욱 첨예하게 되었다. 이에 김옥균은 정변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한 다음, 그의 개화사상과 주장을 실천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보색하게 되었다.
청국과 프랑스가 인남문제를 둘러싸고 청 불 전쟁의 조짐을 보이자, 1884년 5월 조선에 주둔시킨 3천여명의 청군 병력 중에서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에 청군은 1,500명만 남께 되었으며, 1884년 8월 마침내 청 불전쟁이 일어나 청국은 연전연패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1884년 9월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에 가다가 그 해 10월 30일 서울에 귀임하여 종래의 개화당에 대한 적대정책을 바꾸어 개화당에 접근하면서 추파를 던져오자, 김옥균은 정변에 대한 청군의 무력개입을 막는데 이용하기 위하여 조선군 천 명 이외에 일본공사관 오휘용의 일본군 150명을 정변에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 삼일천하와 개혁실패
그리하여 1884년 양력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마침내 갑신정변을 단행하여 그날 밤으로 명성황후 수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처단하고, 12월 5일 이재원을 영의정으로, 홍영식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김옥균은 신정부에서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재정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정변과 신정부를 모두 지휘하였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자 12월 5일 저녁부터 6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열어서 김옥균의 주도하에 혁신정강을 제정하여 6일 오전 9시경에 국왕의 전교형식을 빌려 공포하였으며, 이날 오우 3시에는 국왕도 이를 추인하여 대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려서 국정전반의 대개혁이 이루어질듯 하였다.
그러나 청군 1,500명은 이날 오후 3시부터 갑신정변을 붕괴시키기 위한 무력개입을 시작하여 불법으로 궁궐에 침입하면서 공격해 들어왔다. 외위를 담당했던 조선군이 청국침략군에 저항하다가 패퇴하자, 중위를 맡았던 일본군은 개화당이 사태를 수습할 사이도 없이 도망하고 철수해버렸다.
이에 개화당은 청군의 무력공격을 방어하지 못하여 갑신정변을 실패하고, 김옥균 등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망명한 김옥균을 박해하여 1886년 8월 오가사와라섬에 귀양을 보냈으며, 또한 1888년 북해도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
그 뒤 동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1894년 3월 청국의 상해로 망명하였으나, 명성황후 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상해 동화양행 객실에서 암살당하였다. 청국과 명성황후 수구파 정부는 야합하여 시체를 서울 양화진에 실어다가 능지처참하였다.
4개월 뒤에 갑오경장으로 개화파정부가 수립되자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에 의하여 그의 죄가 사면, 복권되었으며 1910년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달이다.
4. 나의 느낌
김옥균은 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과제를 하려고 시작했을 때, 김옥균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국사 공부 열심히 했었는데, 역사 공부의 의무가 사라져 버리고 나니까 점점 역사의 지식과는 멀어졌던 것 같다. 이번 과제를 하면서 새록새록 기억나는 부분도 있었고, 틈틈이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있어서 자극제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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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21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89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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