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1) 90년대 페미니즘 시각의 등장
2) 페미니즘 vs. 반페미니즘
3)「선택」 논쟁의 시작
2. 논쟁
1) ‘양식 선택' 과 설득력 유무의 문제
-권영민, 「개인적 운명 또는 삶의 <선택>」
2)이문열의 여성성, 모성성, 모성확대 개념에 대한 문제
-이선옥,「반여성주의의 도그마, 이문열」
-강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이문열 - ‘시대와의 간통’을 저지른 ‘문화권력’」
3. 맺음말
4. 참고문헌
1) 90년대 페미니즘 시각의 등장
2) 페미니즘 vs. 반페미니즘
3)「선택」 논쟁의 시작
2. 논쟁
1) ‘양식 선택' 과 설득력 유무의 문제
-권영민, 「개인적 운명 또는 삶의 <선택>」
2)이문열의 여성성, 모성성, 모성확대 개념에 대한 문제
-이선옥,「반여성주의의 도그마, 이문열」
-강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이문열 - ‘시대와의 간통’을 저지른 ‘문화권력’」
3. 맺음말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얻고자 한다.
강준만 교수는 이문열에 대해 거칠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소설가가 아닌 저널리스트 활동을 하며, 문화 ‘산업’의 ‘권력’을 휘두르고, ‘시대와의 불화’를 겪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시대와의 은밀한 간통을 저질렀고 그 간통으로 인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을 보면 이문열이 보인다, 라고 하며 ‘선택’을 논하였다. 그는 전여옥과 김정란등 여성논자들의 비판에 동의와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는 400년 전 장씨부인의 선택은 사회의 선택이지 장씨부인의 선택이 아니며, 지금의 여성들이 따라야 할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현대 여성의 현실기반을 고려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도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는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수 십 년간 길들여진 사람이라 자신의 허물을 덮어주는 ‘선택’에 꽤 공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이문열의 터무니없는 소설 ‘선택’은 비판받아 마땅한 글이라는 평을 하였다. 그중 내가 가장 속 시원한 부분을 인용하면
[『선택』은 이씨의 선의가 무엇이건 간에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소설이다. 한국 여성의 정관계 진출은 말할 것도 없고 전반적인 사회 진출은 전 세계에서 최 하위권에 속해 있다. 여성의원의 비율은 3%로 세게107개국 중 94위를 기록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태아 성감별을 해 딸이면 죽이고 아들이면 살리는 천인공노할 작태가 한국처럼 극성스럽게 저질러지는 나라도 이 지구상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이건 우리 모두 치욕스럽게 생각해야 할 사실이다. 그런데 이씨는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질 않은가. -p30]
자기비판적인 성찰 좋아하시네! 여성을 차별하는 우리의 기막힌 현실에 대해선 티끌만큼의 성찰도 하는 않는 이문열씨가 무슨 성찰을 제시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 문화가 혼돈 상태에 빠져 있는 것과 페미니즘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전통? 왜 양반 상놈 따지는 전통은 안 찾는가? 만민평등사상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인가? 도무지 말 같아야 말을 하지. -p33
솔직히 순수하게 이 책을 읽었던 나의 의견은 이문열의 반페미니즘이 여실히 드러난 글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 흐름과는 맞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여성은 현모양처로 사는 것이 최고이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짐이니 반항하지 말고 지고 가라했다.
아직까지 현모양처를 바라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가정에서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남성에 비해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짐이라는 것에는 동의 할 수 없다. 이제 남성들은 부당한 혜택을 조금씩이지만 양보하고 있고, 여성들은 그 동안 누리지 못 했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사회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대통령이 나타날 수 있다. 여자를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대한다면 자연스레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보며, 빠른 시일 내에 강금실 법무부 장관 때와 같은 논란이 우리사회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문열의 ‘선택’은 빈체제를 내놓는 것이었다. 권력의 단맛을 양보할 수 없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발전한 사회를 회귀하려고 했던 빈체제 말이다. 현대 여성이 400년 전의 현모양처인 장씨 부인을 닮아야 한다는 이문열의 발상은 빈체제가 7월 혁명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혁명을 불렀듯, 족보에 사로잡힌 망령을 잡기위해 문화여성계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예측 가능한, 아니 당연한 결과였다. 400년 전에는 숱한 여성들이 주체적 여성이기를 포기하게 하였던, 희생적 모성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확보하며 일생을 살아 내었다. 그러나 이미 사회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산하고 양육하는 여성’으로서만 살 것을 거부하고 있다.
주어진 환경이 잘못되고 개선의 필요가 있으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부조리에 순응하는 인간은 그가 한 어떤 ‘선택’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고 적극적이라 할 수 없다. 물론 정부인 장씨의 ‘선택’마저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그 사회적 배경이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스스로 신장하는 여권에 대하여 인식하는 바가 크고 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하여 다분히 노력하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진보된 결과를 낳아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여성들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와 같은 노력은 여성들만이 하기에는 힘들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남성들이 ‘선택’할 차례이다. 그들은 여성과 인류의 동반자로서 함께 나아가기를 ‘선택’할 때가 왔다.
3. 맺음말
작가 이문열이 말하고자 한 요지는 대충 파악이 가능하다. 요즈음의 극단적인 페미니즘으로 인하여 이전부터 소중히 지켜온 가치가 가벼이 여겨지는 세태를 꾸짖고자 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극단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작가 이문열의 글 솜씨는 우리를 설득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훌륭하다. 때문에 혹자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과거의 여인들은 자신 스스로의 ‘선택’으로 종속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녀들은 학문적인 소양을 갈고 닦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얻는 일보다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기르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달콤한 말로 포장한들 그녀들의 선택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필연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선택>을 읽으면서 수 십 가지의 선택이 가능한 현재에 감사했다. 누군가가 정해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길을 찾을 수 있음에 말이다.
4. 참고문헌
1. 이문열 「선택」
2. 김복순, 「<선택> 논쟁의 비평사적 의미」
3. 권영민, 「개인적 운명 또는 삶의 <선택>」-세계의 문학 1997년 여름호
4. 이선옥, 「반여성주의의 도그마, 이문열」-실천문학 1997년 가을호
5. 강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이문열 - ‘시대와의 간통’을 저지른 ‘문화권력’」
-인물과 사상 3권 1997년 8월호
강준만 교수는 이문열에 대해 거칠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소설가가 아닌 저널리스트 활동을 하며, 문화 ‘산업’의 ‘권력’을 휘두르고, ‘시대와의 불화’를 겪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시대와의 은밀한 간통을 저질렀고 그 간통으로 인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을 보면 이문열이 보인다, 라고 하며 ‘선택’을 논하였다. 그는 전여옥과 김정란등 여성논자들의 비판에 동의와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는 400년 전 장씨부인의 선택은 사회의 선택이지 장씨부인의 선택이 아니며, 지금의 여성들이 따라야 할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현대 여성의 현실기반을 고려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도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는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수 십 년간 길들여진 사람이라 자신의 허물을 덮어주는 ‘선택’에 꽤 공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이문열의 터무니없는 소설 ‘선택’은 비판받아 마땅한 글이라는 평을 하였다. 그중 내가 가장 속 시원한 부분을 인용하면
[『선택』은 이씨의 선의가 무엇이건 간에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소설이다. 한국 여성의 정관계 진출은 말할 것도 없고 전반적인 사회 진출은 전 세계에서 최 하위권에 속해 있다. 여성의원의 비율은 3%로 세게107개국 중 94위를 기록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태아 성감별을 해 딸이면 죽이고 아들이면 살리는 천인공노할 작태가 한국처럼 극성스럽게 저질러지는 나라도 이 지구상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이건 우리 모두 치욕스럽게 생각해야 할 사실이다. 그런데 이씨는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질 않은가. -p30]
자기비판적인 성찰 좋아하시네! 여성을 차별하는 우리의 기막힌 현실에 대해선 티끌만큼의 성찰도 하는 않는 이문열씨가 무슨 성찰을 제시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 문화가 혼돈 상태에 빠져 있는 것과 페미니즘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전통? 왜 양반 상놈 따지는 전통은 안 찾는가? 만민평등사상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인가? 도무지 말 같아야 말을 하지. -p33
솔직히 순수하게 이 책을 읽었던 나의 의견은 이문열의 반페미니즘이 여실히 드러난 글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 흐름과는 맞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여성은 현모양처로 사는 것이 최고이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짐이니 반항하지 말고 지고 가라했다.
아직까지 현모양처를 바라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가정에서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남성에 비해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짐이라는 것에는 동의 할 수 없다. 이제 남성들은 부당한 혜택을 조금씩이지만 양보하고 있고, 여성들은 그 동안 누리지 못 했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사회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대통령이 나타날 수 있다. 여자를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대한다면 자연스레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보며, 빠른 시일 내에 강금실 법무부 장관 때와 같은 논란이 우리사회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문열의 ‘선택’은 빈체제를 내놓는 것이었다. 권력의 단맛을 양보할 수 없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발전한 사회를 회귀하려고 했던 빈체제 말이다. 현대 여성이 400년 전의 현모양처인 장씨 부인을 닮아야 한다는 이문열의 발상은 빈체제가 7월 혁명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혁명을 불렀듯, 족보에 사로잡힌 망령을 잡기위해 문화여성계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예측 가능한, 아니 당연한 결과였다. 400년 전에는 숱한 여성들이 주체적 여성이기를 포기하게 하였던, 희생적 모성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확보하며 일생을 살아 내었다. 그러나 이미 사회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산하고 양육하는 여성’으로서만 살 것을 거부하고 있다.
주어진 환경이 잘못되고 개선의 필요가 있으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부조리에 순응하는 인간은 그가 한 어떤 ‘선택’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고 적극적이라 할 수 없다. 물론 정부인 장씨의 ‘선택’마저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그 사회적 배경이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스스로 신장하는 여권에 대하여 인식하는 바가 크고 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하여 다분히 노력하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진보된 결과를 낳아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여성들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와 같은 노력은 여성들만이 하기에는 힘들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남성들이 ‘선택’할 차례이다. 그들은 여성과 인류의 동반자로서 함께 나아가기를 ‘선택’할 때가 왔다.
3. 맺음말
작가 이문열이 말하고자 한 요지는 대충 파악이 가능하다. 요즈음의 극단적인 페미니즘으로 인하여 이전부터 소중히 지켜온 가치가 가벼이 여겨지는 세태를 꾸짖고자 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극단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작가 이문열의 글 솜씨는 우리를 설득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훌륭하다. 때문에 혹자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과거의 여인들은 자신 스스로의 ‘선택’으로 종속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녀들은 학문적인 소양을 갈고 닦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얻는 일보다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기르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달콤한 말로 포장한들 그녀들의 선택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필연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선택>을 읽으면서 수 십 가지의 선택이 가능한 현재에 감사했다. 누군가가 정해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길을 찾을 수 있음에 말이다.
4. 참고문헌
1. 이문열 「선택」
2. 김복순, 「<선택> 논쟁의 비평사적 의미」
3. 권영민, 「개인적 운명 또는 삶의 <선택>」-세계의 문학 1997년 여름호
4. 이선옥, 「반여성주의의 도그마, 이문열」-실천문학 1997년 가을호
5. 강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이문열 - ‘시대와의 간통’을 저지른 ‘문화권력’」
-인물과 사상 3권 199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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