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남․북한 역사해석의 차이
1)고대사
2)조선시대사
3)근․현대사
사관이란 무엇인가?
1 역사철학과 사관의 의미
2 사관의 종류
순환론적 역사해석
1 투키디데스의 역사발전론
2 마키야벨리의 덕(virtue) 중심의 역사발전론
3 비코(1668-1744)의 ? ? 형적 순환사관
4.슈팽글러의 문명사관
5. 토인비(toynbee)의 문명사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1)고대사
2)조선시대사
3)근․현대사
사관이란 무엇인가?
1 역사철학과 사관의 의미
2 사관의 종류
순환론적 역사해석
1 투키디데스의 역사발전론
2 마키야벨리의 덕(virtue) 중심의 역사발전론
3 비코(1668-1744)의 ? ? 형적 순환사관
4.슈팽글러의 문명사관
5. 토인비(toynbee)의 문명사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본문내용
시기를 암흑시대, 또는 야만의 시대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중세가 암흑의 시기, 야만 또는 무지의 시기였던가 하면, 자신들의 시대는 재생의 시기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의 이러한 생각을 근거로 하여 17세기에 셀라리우스는 고대의 역사, 중세의 역사, 근세의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문예 분야에서 시작한 이 3분법은 17세기에 이르러 역사학 분야에까지 파급해 나갔다. 계몽사상 시대의 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낭만주의는 계몽사상의 여러 양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낭만주의 역사가들은 중세문화의 특성을 재인식하기 시작했다. 낭만주의파 역사가들의 중세에 대한 재평가는 3분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조한 결과가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중세의 특유한 사회와 문화시대를 주장함으로써 3분법은 확고부동한 역사구분이 되어 버렸다. 결국 휴머니스트 -계몽사상가 - 로만주의자의 3자간의 차이는 중세를 어떻게 평가했는가에 있으며, 역사를 3분했는가에 있지는 않다. 이 3분법에 따르면 그리스로마에서 기독교의 공인을 하게 되는 콘스탄티누스대제(306-337)까지 고대의 역사로 취급하였고, 터어키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점령(1453년), 즉 동로마 멸망까지를 중세로 보았고, 그 이후를 근세로 지칭했다. 그의 구분법은 그 후 점차로 일반화되어 갔다.
그런데 19세기에 와서는 여러 가지 역사교과서들이 3분법을 따르되, 고대와 중세의 경계로서는 서로마제국의 몰락(476)을, 그리고 중세와 근세의 경계로서는 아메리카대륙의 발견(1492), 또는 종교개혁(1517)을 일반적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2. 3분법의 문제점
이 3분법은 사실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그것은 유럽의 역사를 기준으로 했으므로 비유럽지역의 민족들, 문화들의 발전에도 적용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3분법이 생긴 것은 이미 17세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러한 구분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부적당하다는 점이다. 젤라리우스가 의미했던 근세라는 시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이 3분법은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을 특별히 고려하여 18세기까지를 ‘초기근세’라는 개념으로 새로이 표현하면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3. 마르크스의 시대구분 - 19세기에서의 시대구분 -
본래 3분법적 시대구분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창안된 어디까지나 문화적인 개념이다. 사회발전의 역사적 단계를 기준으로 한 3분법적 시대구분은 어떠한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비판」(1858)의 서문에서 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한 생산양식의 차이에 착안하여 인간사회의 발전단계를 아시아적 사회, 고대적 사회, 봉건적 사회, 부르조아적 사회의 네단계로 구분하면서,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 기적으로 옮겨가는 필연적인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정신적 생활과정 전체를 제약한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시대구분에 있어서 ‘아시아적’이란 생산양식을 제외하고는 역시 유럽중심적인 3분법의 시대구분법을 따르고 있다. 그 뒤 엥겔스(1820-1895)가 ‘아시아적 사회’앞에 ‘원시공산사회’를 추가하였다. 엥겔스는 시대구분을 계급이 없는 원시사회, 노예경제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 공산주의사회로 구분했다. 마지막 단계는 이제 곧 도래할 발전단계를 의미했다.
마르크스엥겔스의 이 같은 구분은 기묘하게도 휴머니스트들의 삼분법적 시대구분과 부합되는 측면이 있고, 그 때문에 삼분법적 시대구분은 오히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의해서 매우 강력한 보강을 부여받은 셈이 되었다. 즉 유물사관에서는 고대를 노예제사회, 중세를 봉건제사회 그리고 근대를 자본제사회로 정식화하여 시대구분의 유일한 지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 기본 발상 혹은 근원을 전혀 달리하는 두 개의 사고방식이 쉽사리 하나로 결합된 결과 나타나게 된 시대구분의 문제점에 대해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왔다.
4. 최근세 및 현대
1)최근세
만일 근대가 15세기 경제 시작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하한은 언제가 되겠는가? 근대의 범위가 일정치 않다는 사실은 제 4의 시대구분인 최근세 또는 현대를 추가하는 이유가 된다.
19세기의 여러 가지 경향성을 부가시킨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프랑스혁명으로 잡을 수 있다. 중요한 근거로 19세기의 자유주의민족주의사회주의제국주의 등의 경향성들을 대두시킨 사회구조의 변화를 바로 프랑스혁명 전후의 산업의 등장에서 찾고자 하는 주장이다. 여기에서는 기계의 발명과 생산력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과 생활을 크게 전환시켰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 시대 시민계급은 정치에도 참여했으나 통치의 실권은 전통세력이었다. 19세기의 시민계급은 정치경제문화의 직접적인 담당자가 되었다. 근세 자연과학이 ? 흥한 것도 이 시기였고, 이를 통하여 산업혁명을 통하여 자본제적 경제체제와 공업화를 달성한 것이다. 이 시기의 시민계급에서 중심이 된 것은 산업인이었다.
그리하여 대개 프랑스혁명 이전까지를 3분법의 근세라는 명칭을 변형시켜서 특히 ‘근세 전기’, ‘조기 근세’라고 부르며, 그 이후의 역사를 ‘근세 후기 또는 최근세’(the most recent history)라고 부르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이 최근세가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 오늘날의 현대도 역시 최근세의 연속인지 등의 문제는 또한 어려운 숙제이다.
2) 현대
현대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를 말한다. 이것은 동시대인들이 시기를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특성인 동서냉전, 기술 및 산업의 고도발달과 함께 더욱 굳어져 가는 듯하는 자본주의의 특성,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이 왕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하기 이전인 2차대전 직전까지를 일단은 최근세로 보고, 그 이후의 역사는 현대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1945년경까지만 해도 역사가들은 1870년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보고 그 이후의 역사를 현대사라고 생각했으나 얼마후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914년을 현대사에의 전환점이라고 간주했다. 오늘날은 1945년을 현대사(the contemporary history)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인문주의자들의 이러한 생각을 근거로 하여 17세기에 셀라리우스는 고대의 역사, 중세의 역사, 근세의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문예 분야에서 시작한 이 3분법은 17세기에 이르러 역사학 분야에까지 파급해 나갔다. 계몽사상 시대의 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낭만주의는 계몽사상의 여러 양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낭만주의 역사가들은 중세문화의 특성을 재인식하기 시작했다. 낭만주의파 역사가들의 중세에 대한 재평가는 3분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조한 결과가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중세의 특유한 사회와 문화시대를 주장함으로써 3분법은 확고부동한 역사구분이 되어 버렸다. 결국 휴머니스트 -계몽사상가 - 로만주의자의 3자간의 차이는 중세를 어떻게 평가했는가에 있으며, 역사를 3분했는가에 있지는 않다. 이 3분법에 따르면 그리스로마에서 기독교의 공인을 하게 되는 콘스탄티누스대제(306-337)까지 고대의 역사로 취급하였고, 터어키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점령(1453년), 즉 동로마 멸망까지를 중세로 보았고, 그 이후를 근세로 지칭했다. 그의 구분법은 그 후 점차로 일반화되어 갔다.
그런데 19세기에 와서는 여러 가지 역사교과서들이 3분법을 따르되, 고대와 중세의 경계로서는 서로마제국의 몰락(476)을, 그리고 중세와 근세의 경계로서는 아메리카대륙의 발견(1492), 또는 종교개혁(1517)을 일반적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2. 3분법의 문제점
이 3분법은 사실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그것은 유럽의 역사를 기준으로 했으므로 비유럽지역의 민족들, 문화들의 발전에도 적용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3분법이 생긴 것은 이미 17세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러한 구분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부적당하다는 점이다. 젤라리우스가 의미했던 근세라는 시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이 3분법은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을 특별히 고려하여 18세기까지를 ‘초기근세’라는 개념으로 새로이 표현하면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3. 마르크스의 시대구분 - 19세기에서의 시대구분 -
본래 3분법적 시대구분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창안된 어디까지나 문화적인 개념이다. 사회발전의 역사적 단계를 기준으로 한 3분법적 시대구분은 어떠한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비판」(1858)의 서문에서 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한 생산양식의 차이에 착안하여 인간사회의 발전단계를 아시아적 사회, 고대적 사회, 봉건적 사회, 부르조아적 사회의 네단계로 구분하면서,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 기적으로 옮겨가는 필연적인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정신적 생활과정 전체를 제약한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시대구분에 있어서 ‘아시아적’이란 생산양식을 제외하고는 역시 유럽중심적인 3분법의 시대구분법을 따르고 있다. 그 뒤 엥겔스(1820-1895)가 ‘아시아적 사회’앞에 ‘원시공산사회’를 추가하였다. 엥겔스는 시대구분을 계급이 없는 원시사회, 노예경제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 공산주의사회로 구분했다. 마지막 단계는 이제 곧 도래할 발전단계를 의미했다.
마르크스엥겔스의 이 같은 구분은 기묘하게도 휴머니스트들의 삼분법적 시대구분과 부합되는 측면이 있고, 그 때문에 삼분법적 시대구분은 오히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의해서 매우 강력한 보강을 부여받은 셈이 되었다. 즉 유물사관에서는 고대를 노예제사회, 중세를 봉건제사회 그리고 근대를 자본제사회로 정식화하여 시대구분의 유일한 지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 기본 발상 혹은 근원을 전혀 달리하는 두 개의 사고방식이 쉽사리 하나로 결합된 결과 나타나게 된 시대구분의 문제점에 대해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왔다.
4. 최근세 및 현대
1)최근세
만일 근대가 15세기 경제 시작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하한은 언제가 되겠는가? 근대의 범위가 일정치 않다는 사실은 제 4의 시대구분인 최근세 또는 현대를 추가하는 이유가 된다.
19세기의 여러 가지 경향성을 부가시킨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프랑스혁명으로 잡을 수 있다. 중요한 근거로 19세기의 자유주의민족주의사회주의제국주의 등의 경향성들을 대두시킨 사회구조의 변화를 바로 프랑스혁명 전후의 산업의 등장에서 찾고자 하는 주장이다. 여기에서는 기계의 발명과 생산력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과 생활을 크게 전환시켰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 시대 시민계급은 정치에도 참여했으나 통치의 실권은 전통세력이었다. 19세기의 시민계급은 정치경제문화의 직접적인 담당자가 되었다. 근세 자연과학이 ? 흥한 것도 이 시기였고, 이를 통하여 산업혁명을 통하여 자본제적 경제체제와 공업화를 달성한 것이다. 이 시기의 시민계급에서 중심이 된 것은 산업인이었다.
그리하여 대개 프랑스혁명 이전까지를 3분법의 근세라는 명칭을 변형시켜서 특히 ‘근세 전기’, ‘조기 근세’라고 부르며, 그 이후의 역사를 ‘근세 후기 또는 최근세’(the most recent history)라고 부르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이 최근세가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 오늘날의 현대도 역시 최근세의 연속인지 등의 문제는 또한 어려운 숙제이다.
2) 현대
현대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를 말한다. 이것은 동시대인들이 시기를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특성인 동서냉전, 기술 및 산업의 고도발달과 함께 더욱 굳어져 가는 듯하는 자본주의의 특성,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이 왕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하기 이전인 2차대전 직전까지를 일단은 최근세로 보고, 그 이후의 역사는 현대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1945년경까지만 해도 역사가들은 1870년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보고 그 이후의 역사를 현대사라고 생각했으나 얼마후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914년을 현대사에의 전환점이라고 간주했다. 오늘날은 1945년을 현대사(the contemporary history)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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