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인 아담스(Jane Addams)의 생애
◎제인 아담스 살펴보기
◎제인 아담스(Jane Addams)의 업적
Ⅰ. 제인 아담스의 민주주의
1) 인보관 활동
2) Hull house의 설립배경
Ⅱ. 제인 아담스의 혁신주의
1) Hull House의 설립과 클럽활동
2) 시정개혁운동과 노동문제
3) 교육론과 교육개혁운동
Ⅲ. 제인 아담스의 평화주의
1) 평화주의 사상의 형성
2) 평화운동의 전개
Ⅳ. 제인 아담스의 실천주의
◎제인 아담스(Jane Addams)와 사회복지
◎미국의 사회복지관과 영국의 사회복지관 관점 비교
◎제인 아담스 살펴보기
◎제인 아담스(Jane Addams)의 업적
Ⅰ. 제인 아담스의 민주주의
1) 인보관 활동
2) Hull house의 설립배경
Ⅱ. 제인 아담스의 혁신주의
1) Hull House의 설립과 클럽활동
2) 시정개혁운동과 노동문제
3) 교육론과 교육개혁운동
Ⅲ. 제인 아담스의 평화주의
1) 평화주의 사상의 형성
2) 평화운동의 전개
Ⅳ. 제인 아담스의 실천주의
◎제인 아담스(Jane Addams)와 사회복지
◎미국의 사회복지관과 영국의 사회복지관 관점 비교
본문내용
그리고 그것은 소년 노동이나 빈민주택에 관한 논문을 쓰거나 파업이나 이민가정에 대한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유리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인물 가운데서 대표적인 사람이 어니스트 푸울이었다. 그는 도시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프린스톤 대학에서 유니버시티 사회복지관으로 갔고, 거기서 조사한 것을 몇 권의 소설과 보고서와 논문에 수록하였다. 제인 아담스의 헐하우스는 경우를 보면, 시카고의 빈민가에 관한 자세한 자료를 모아 『헐하우스 지도와 보고서』를 발간함으로써 개혁을 위한 자료로 활용하게 하였다.
두 번째, 인보관 운동은 여성운동, 청소년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후에 여성, 청소년 복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인보 운동이 산업 혁명 이후 발생하였던 사회계층간의 장벽을 깨기 위한 방법으로 출현된 것과는 달리 미국의 인보 운동은 부분적으로 여성 운동의 일환이었으며, 서로 다른 민족의 이민에 의한 인종적, 종교적, 언어적 문제해결로 이 민족의 미국에로의 동화 촉진 방법으로 발전되어갔다. 인보관 사업은 그 후 사회변화에 따라 사업 내용이나 프로그램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면서 발전해 온 것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인보관이 이웃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통한 실제적인 개혁을 행하였던 분위기가 변화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1920년대에는 사회복지관들은 이주민 본래의 민족적 특성을 살리고 보존하는 프로그램을 발전시켰으며, 청소년들의 고용과 정신 위생적인 측면에서 청소년 클럽 활동, 여가 활동이 활발해졌다.
세 번째, ‘사회복지는 지역사회의 주민도 함께 해야 한다’는 아담스의 생각은 당시 실천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이것이 지금의 지역사회복지를 발전하게 해준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에는 인보 운동이 시설 중심화 되어서 시설 내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의 질과 방법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집단 사회사업을 시민 정신의 훈련과 민주적인 의사결정 훈련에 중요한 원리로 보게 됨으로써 집단 사회사업의 발전과 적극적 활용이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는 지역사회 욕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발견으로 지역사회조직(Community Organization)을 강조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빈곤퇴치(War on Poverty)가 국가적 이슈로 새로운 활동을 찾았으며, 이 시기에는 사회복지관이 지역 사회 내 계층 간의 상호 보조적 관계보다는 지역 주민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혜택을 받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네 번째, 아담스가 교육이 사회개혁의 수단이라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 것은 오늘날 빈곤의 대물림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안인 교육 평등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스와 동시대 많은 사회복지가들은 '교육'이 사회개혁의 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교육만이 대학의 학문과 실제사회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생각은 그녀의 저서 「The Subjective Necessity」에 "사회복지관은 교육에 대한 한정된 시각에 대한 항의다."라는 표현에 잘 나타나있다. 그녀의 빈민들을 위한 교육방법 중 한 가지는 바로 탁아소(託兒所)와 유치원(幼稚園)의 개설이었다. 빈민들 중 대부분은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하기 바빴고, 따라서 그들의 자식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런 아이들을 헐 하우스 내(內)의 탁아소에서 미술, 음악 및 창조적인 놀이들을 가르침으로써 전인적 어린이로 양성하려 힘썼다.
(심화내용)
◎미국의 사회복지관과 영국의 사회복지관 관점 비교
첫째로 영국의 사회복지관들은 종교적인 성격을 뚜렷이 하고 종교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데 반해 미국의 그것들은 비종교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다. 영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사회복지관들도 대부분 교회와 종교단체에 의해 세워졌다. 가장 많이 설립한 교단은 회중교회와 장로교회였고, 그 다음으로는 미국성공회와 유니태리안 교회였다. 침례교, 유태교, 카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것도 있었지만 드물었다. 이처럼 미국의 사회복지관들은 대부분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의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경우와는 달리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나타내지도 않았고 또한 선교활동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 미국의 사회복지관등이 활동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주오 카톨릭 교도로 구성된 이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민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예를 들면, 로버트 우즈는 앤도버 신학교의 이름을 따서 보스톤에 세운 앤도버하우스를 나중에 종교적 냄새가 나지 않는 사우스엔드 히우스로 명칭을 바꾸었다. 꼭 같은 이유에서 뉴을리언즈 킹슬리하우스의 책임자인 엘리노어 맥메인은 1900년에 미국성공회와 관계를 끊었다.
둘째로 미국의 사회복지관 사업가들은 자신들을 자선사업가로서 보다는 사회정혁자로서 더 생각했다는 점에서 영국의 동료들과는 달랐다. 미국의 사회복지관 사업가들은 사회개혁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영국 토인비홀의 창시자인 새뮤얼 바넷트의 생각을 처음부터 거부하였다. 그 대신 미국의 사회복지관 사업가들은 사회환경을 사회개혁의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다. 그 때문에 미국인들은 영국의 동료들과는 달리 단순한 자선의 차원을 넘어 교육과 사회조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도시의 지역사회조직을 부활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지역사회 밖으로 까지 자기들의 책임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점에서 볼 때 미국의 사회복지관 사업가들은 영국의 동료들 보다 더 시야가 넓었고, 그 때문에 미국사회에서 사회복지관 운동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영국사회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중요성 보다 훨씬 더 컸고 또한 훨씬 더 큰 개혁의 힘이 되었다. 그것은 1910년에 영국에는 사회복지관 수가 겨우 42개였던 데 비해 거의 같은 시기인 1911년에 미국에는 무려 400개가 넘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미국의 사회복지관 사업가들이 미국의 전통적인 자선사업가들 과도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사회복지관을 윌리암 쥬이트 덕커가“고급자선”이라고 부르고 자선단체를 “하급자선”이라고 부름으로써 양자를 하나의 범주 속에 넣어 양자의 차이를 좁혀 보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두 번째, 인보관 운동은 여성운동, 청소년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후에 여성, 청소년 복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인보 운동이 산업 혁명 이후 발생하였던 사회계층간의 장벽을 깨기 위한 방법으로 출현된 것과는 달리 미국의 인보 운동은 부분적으로 여성 운동의 일환이었으며, 서로 다른 민족의 이민에 의한 인종적, 종교적, 언어적 문제해결로 이 민족의 미국에로의 동화 촉진 방법으로 발전되어갔다. 인보관 사업은 그 후 사회변화에 따라 사업 내용이나 프로그램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면서 발전해 온 것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인보관이 이웃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통한 실제적인 개혁을 행하였던 분위기가 변화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1920년대에는 사회복지관들은 이주민 본래의 민족적 특성을 살리고 보존하는 프로그램을 발전시켰으며, 청소년들의 고용과 정신 위생적인 측면에서 청소년 클럽 활동, 여가 활동이 활발해졌다.
세 번째, ‘사회복지는 지역사회의 주민도 함께 해야 한다’는 아담스의 생각은 당시 실천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이것이 지금의 지역사회복지를 발전하게 해준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에는 인보 운동이 시설 중심화 되어서 시설 내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의 질과 방법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집단 사회사업을 시민 정신의 훈련과 민주적인 의사결정 훈련에 중요한 원리로 보게 됨으로써 집단 사회사업의 발전과 적극적 활용이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는 지역사회 욕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발견으로 지역사회조직(Community Organization)을 강조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빈곤퇴치(War on Poverty)가 국가적 이슈로 새로운 활동을 찾았으며, 이 시기에는 사회복지관이 지역 사회 내 계층 간의 상호 보조적 관계보다는 지역 주민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혜택을 받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네 번째, 아담스가 교육이 사회개혁의 수단이라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 것은 오늘날 빈곤의 대물림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안인 교육 평등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스와 동시대 많은 사회복지가들은 '교육'이 사회개혁의 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교육만이 대학의 학문과 실제사회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생각은 그녀의 저서 「The Subjective Necessity」에 "사회복지관은 교육에 대한 한정된 시각에 대한 항의다."라는 표현에 잘 나타나있다. 그녀의 빈민들을 위한 교육방법 중 한 가지는 바로 탁아소(託兒所)와 유치원(幼稚園)의 개설이었다. 빈민들 중 대부분은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하기 바빴고, 따라서 그들의 자식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런 아이들을 헐 하우스 내(內)의 탁아소에서 미술, 음악 및 창조적인 놀이들을 가르침으로써 전인적 어린이로 양성하려 힘썼다.
(심화내용)
◎미국의 사회복지관과 영국의 사회복지관 관점 비교
첫째로 영국의 사회복지관들은 종교적인 성격을 뚜렷이 하고 종교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데 반해 미국의 그것들은 비종교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다. 영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사회복지관들도 대부분 교회와 종교단체에 의해 세워졌다. 가장 많이 설립한 교단은 회중교회와 장로교회였고, 그 다음으로는 미국성공회와 유니태리안 교회였다. 침례교, 유태교, 카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것도 있었지만 드물었다. 이처럼 미국의 사회복지관들은 대부분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의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경우와는 달리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나타내지도 않았고 또한 선교활동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 미국의 사회복지관등이 활동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주오 카톨릭 교도로 구성된 이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민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예를 들면, 로버트 우즈는 앤도버 신학교의 이름을 따서 보스톤에 세운 앤도버하우스를 나중에 종교적 냄새가 나지 않는 사우스엔드 히우스로 명칭을 바꾸었다. 꼭 같은 이유에서 뉴을리언즈 킹슬리하우스의 책임자인 엘리노어 맥메인은 1900년에 미국성공회와 관계를 끊었다.
둘째로 미국의 사회복지관 사업가들은 자신들을 자선사업가로서 보다는 사회정혁자로서 더 생각했다는 점에서 영국의 동료들과는 달랐다. 미국의 사회복지관 사업가들은 사회개혁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영국 토인비홀의 창시자인 새뮤얼 바넷트의 생각을 처음부터 거부하였다. 그 대신 미국의 사회복지관 사업가들은 사회환경을 사회개혁의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다. 그 때문에 미국인들은 영국의 동료들과는 달리 단순한 자선의 차원을 넘어 교육과 사회조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도시의 지역사회조직을 부활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지역사회 밖으로 까지 자기들의 책임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점에서 볼 때 미국의 사회복지관 사업가들은 영국의 동료들 보다 더 시야가 넓었고, 그 때문에 미국사회에서 사회복지관 운동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영국사회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중요성 보다 훨씬 더 컸고 또한 훨씬 더 큰 개혁의 힘이 되었다. 그것은 1910년에 영국에는 사회복지관 수가 겨우 42개였던 데 비해 거의 같은 시기인 1911년에 미국에는 무려 400개가 넘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미국의 사회복지관 사업가들이 미국의 전통적인 자선사업가들 과도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사회복지관을 윌리암 쥬이트 덕커가“고급자선”이라고 부르고 자선단체를 “하급자선”이라고 부름으로써 양자를 하나의 범주 속에 넣어 양자의 차이를 좁혀 보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