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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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당시 국내정치 상황

2. 사회, 경제적 상황

3. 사회적 불안과 민요, 민란

4. 국제 정치상황

5. 사상사적 배경
①동학사상
②개화사상

6. 갑오농민전쟁의 전개
① 교조신원운동
② 1차봉기
③ 2차 봉기

7. 평가
①혁명인가 봉기인가?
②농민군 지도부의 성격
③한국 민주주의사에 있어서의 위상

본문내용

에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전주가 떨어진 다음날 4월 29일, 시원임대신 및 각신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일부 원로대신의 신중론도 있었지만 민영준이 원세개를 통해 청국의 출병을 요구했다. 4월 30일 척시파 민영준이 주동이 되어 청병 조회문을 원세개에게 보낸 사실을 확인한 일본 대리공사 스기무라는 그 내용을 곧 일본 외무대신 무츠에게 보고하였고, 일본에서는 대본영을 설치하고 히로시마에 있던 공사 오오도리에게 중대훈령을 내려 급거 귀임토록 했다. 5월 6일에는 청군이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했다. 5월 4일에는 청,일간의 천진조약(1885)의 양국출병시의 상호의무 규정에 따라 일본 정부에 통고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청국으로부터 출병통보를 받기전 4월 30일에 일본군 출병을 결정, 2일에 대본영을 설치하여 히로시마의 제 5 사단에 동원령을 내리고, 6일에는 일시 귀국한 대마(大馬)공사가 420명의 육전대를 이끌고 인천에서 서울로 침입하고 이어서 대도의창 소장이 인솔하는 약 6,000여명의 혼성여단이 인천, 서울 지구를 점령했다. 이 상황에서 농민군의 신념에 흔들림이 발생하였고 지도부는 외국군대의 개입에 따른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농민군에 절대적 지지를 받던 전봉준이 총상을 입었고 농사철이 맞물려 농민의 일부가 계속 대열을 이탈하고 있었다. 정부 또한 연합군의 성격으로 지휘체계가 흔들렸고, 전체적으로 군내의 전의를 상실 상황이 컸으며 국내외적 상황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쌍방간의 요구에 의해 전주화약이 체결되게 된다.
③ 2차 봉기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은 내정간섭을 함부로 하여 마침내는 6월 21일 경복궁을 침입, 고종을 연금하고 민씨 세도가들을 몰아냈으며 대원군을 왕의 칙명으로 입궐 시킨 후 6월 25일 민씨정권을 대신하여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 개혁파 정권을 세우고 섭정의 자리에 대원군을 내세웠다. 일본군은 신정부 조직의 예비기구의 하나로 평의회를 구상, 군국기무처를 조직하여 국가의 모든 개혁사업을 통제하고 나섰다. 6월 23일 일본군이 풍도 앞 바다에서 청군의 군함을 공격함으로서 청, 일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과 청나라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완수하기 위하여 조선 땅에서 무력의 대결을 하게 된다. 이에 농민군 측은 이러한 정세의 추이를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신중한 대응책을 찾고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고 청·일 전쟁의 위기적인 국면상황이 표면화되자 농민군은 남원집회를 계기로 일본의 야심이 도발적 행동으로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의도임을 간파하고 농민군의 들뜬 분위기를 진정시켜 명령체제를 확립하고, 내부결속 강화와 함께 전라감사 김학진을 우군으로 포섭 2차 기병을 준비하게 된다. 10월 10~11일에 걸쳐 농민군 재기에 관한 삼례집회가 소집된다. 삼례에 모인 전봉준 직속의 농민군은 400여명에 이르렀고 스스로 의병이라 불렀으며 이는 일본의 침략으로 존망의 위기에 떨어진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났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었다. 이때 남접 농민군 지도자의 주전론에 대하여 북접 상층부간의 화평론이 대립하게 된다. 북접 교단은 농민봉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농민봉기를 묶어 두려고 했었다. 북접 교단은 대중집회시 교단내 강경파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정도였으며 대외적인 명분도 교조신원에만 국한하여 동학을 정식적인 종교로 인정받는데 만 노력하였다. 이점은 동학이라는 종교운동의 특성에서 기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동시에 북접교단 지도부가 대체로 최하 빈농층 보다는 부농과 준농의 입장을 반영하는데서 오는 어쩔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접은 정부와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대결보다는 유화적인 국면에서 타협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했다. 반면 전봉준등 남접이 주도한 원평집회는 서울로 직향하여 봉건정부의 심장부에 강타를 날리려했다. 보은집회가 지도부의 야반도주로 해산하자 원평집회 세력은 자신들만으로 봉건정부와의 전면전 대결을 벌이는데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의 진행을 끌어내지 못했지만 사발통문에서 보이듯이 전봉준의 노력은 그 이후에도 꾸준히 계속되어 고부 봉기와 1차 봉기로 폭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지속되어 삼례에 모인 농민군을 토벌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여 최시형은 고절문을 각 포에 돌리고 남접을 사문난적으로 몰고 남벌기를 만들어 호남 농민군을 공격하려했고 이에 따라 서울로 진격하기 전부터 남·북접이 서로 피를 흘리는 분쟁이 터지고 말았다. 이러한 분열은 중도파의 주선으로 극적 타협을 하게 되어 남, 북접 농민군이 연합하여 서울로 진격하게 되었다. 2차 봉기는 황해도 이남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남접과 북접 그리고 우국지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봉기 대열에 참여한 거족적인 민중봉기였다. 동학 교단과의 갈등을 해소한 농민군 지도부는 중앙에서 관군이 내려와 경기도의 농민군을 침공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드디어 북상진격 명령을 내리지만 8월 25일 남원으로 들어간 김개남은 49제를 핑계로 남원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손화중은 일본군이 서해안으로 침입한다는 정보에 따라 광주와 나주를 방비하여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농민군의 북상은 예산, 은진을 거쳐 10월초 강경포에 이르렀고 이때 전라감사 김학진은 농민군의 운관량이 되어 관청의 세곡은 물론이고 가을걷이한 양곡 혹은 마소를 징발하여 농민군 진영으로 실어 날랐다. 한편, 이종훈, 이용구가 이끄는 북접계 경기도 농민군은 괴산을 함락시키고 손천민의 충청도 농민군과 합류하여 보은 장내리에 총 집합하여 대오를 정비하였고 10월 초순 호서 농민군은 분대를 갑,을 2대로 나누어 영동, 옥천으로부터 공주를 공격하게 하였고 .한 대는 회덕 지명시에 이르러 청주의 관군과 일전을 벌이고 논산으로 나아갔다. 교단내 갈등과 남원에 머문 김개남 그리고 광주와 나주 방비에 나선 손화중 등에 의해 농민군의 북상은 지연되는데 이러한 북상지연은 관군에게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두황은 9월 20일 1개 중대병력을 거느리고 남하하였고 9월 24일 허진을 순무영 중군으로, 10월 2일 이규태를 좌선봉으로 삼아 교도중대와 통위영 병정 2중대를 이끌고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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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24
  • 저작시기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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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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