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고구려
1. 성립과 발전
2. 영토확장과 전성기
3. 수·당과의 투쟁
4. 정치제도
5. 사회경제
6. 문화교육
7. 시가와 음악
8. 미술
9. 불교
10. 도교
11. 풍속
12. 멸망
백제
1. 성립과 발전
2. 멸망
3. 부흥운동
4. 정치제도
5. 경제생활
6. 한학의 발달
7. 국사편찬과 사가
8. 예술
9. 문화의 일본전파
신라
1. 성립과 발전
2. 상대
3. 중대
4. 하대
5. 중앙관제
6. 지방제도
7. 관등제도
8. 군사조직
9. 토지제도
10. 조세제도
11. 사회경제생활
12. 한문학과 유학
13. 문학과 음악
14. 분묘
15. 불교
1. 성립과 발전
2. 영토확장과 전성기
3. 수·당과의 투쟁
4. 정치제도
5. 사회경제
6. 문화교육
7. 시가와 음악
8. 미술
9. 불교
10. 도교
11. 풍속
12. 멸망
백제
1. 성립과 발전
2. 멸망
3. 부흥운동
4. 정치제도
5. 경제생활
6. 한학의 발달
7. 국사편찬과 사가
8. 예술
9. 문화의 일본전파
신라
1. 성립과 발전
2. 상대
3. 중대
4. 하대
5. 중앙관제
6. 지방제도
7. 관등제도
8. 군사조직
9. 토지제도
10. 조세제도
11. 사회경제생활
12. 한문학과 유학
13. 문학과 음악
14. 분묘
15. 불교
본문내용
운 모양으로 되어 있고, 천장은 돌로 덮였다. 입구는 대개 남쪽으로 있으며, 천장과 벽은 석회(石灰)를 발랐다. 굴식 돌방무덤은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합장(合葬)하기에는 손쉽다는 장점이 있다.
분묘의 외형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봉분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하단부에 자연석을 보이지 않게 적당한 간격으로 놓았으나 통일 후에는 석축(石築), 12지신상, 석상(石床), 방주석(方柱石), 석사자(石獅子)상, 문 ·무인석(文武人石) 등 둘레돌을 크게 이용하였는데, 신문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이 그와 같은 유형에 해당된다. 특히 죽은 뒤에도 방위신(方位神)인 12지신과 석사자 등 호석물을 세워 호위를 받으려 한 것은 전제왕권의 권위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 불교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불교 전래과정은 국가적 사절을 매개로 한 외교적 통로에 의한 전래였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 초기 전래는 눌지왕 때 고구려로부터 무명인에 의해 전래되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고, 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善山) 지방 모례(毛禮)의 집에서 아도(阿道)가 전도했으나 이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521년(법흥왕 8)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불교가 알려지자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진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고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異次頓)마저 순교하게 되었다(527). 이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고 중단했던 흥륜사(興輪寺) 창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535). 이와 같이 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불교를 수용한 원인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재래의 토속신앙을 극복하면서 고대국가의 이념과 사상을 통일하고 국가발전을 비는 호국신앙(護國信仰)과 현실구복적(現實求福的) 신앙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불교의 호국사상은 왕권의 신성함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불교왕명을 낳았다. 즉, 진평왕과 그 왕비는 석가의 모친명(名)을 따서 백정(白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불렀고, 법흥왕은 법공(法空), 진흥왕은 법운(法雲)이라 하는 등 불교왕명시대가 찾아왔다.
불교의 호국관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국사(佛國寺) ·흥국사(興國寺) ·흥왕사(興王寺) 등을 축조한 것이나, 황룡사9층탑의 축조 및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화랑이 되었다는 신념 등은 왕실호위와 국가수호의 호국신앙의 표시였다. 또한 호국경(護國經)인 인왕경(仁王經)이 존중되고, 국가의 안태(安泰)를 비는 백좌강회(百座講會:仁王會) ·팔관회(八關會) 등 불교행사가 성행하였다.
한편 승직제도인 국통제(國統制)가 진흥왕 때 수립되어 불교의 정치참여를 촉진시켰다. 또 현세구복적 성격면에서는 아들의 출산이나 치병(治病)을 기원하는 등 샤머니즘과 결부되어 불교의 대중화가 촉진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는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데 정치적 고문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중국 및 서역문화 수입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여 민족문화 개발에 활력소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문화 개발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특히 승려들은 학문과 사상의 선각자가 되어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신라인의 도덕적 요강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도 실증된다.
통일 전 불교의 종파는 자장을 중심으로 하는 계율종(戒律宗)이 유행하여 국민사상의 통일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한편 의상(義湘)의 화엄종(華嚴宗)은 원융사상(圓融思想)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부합되었기 때문에 귀족사회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통일 후 중대의 불교는 나 ·당간의 친선관계가 이룩되면서 유학생 ·유학승의 노력으로 단순한 호국종교의 역할을 벗어나 사상과 이념을 앞세운 종교철학으로 발전하였다. 이 결과 5교(敎)의 종파가 성립되었다. 이때 원효는 통일신라의 불교를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종파간의 대립의식이나 형식을 배격하고 일심(一心) ·진여(眞如)와 통일 ·화합의 화정사상(和靜思想)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형식화 ·귀족화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불교를 생활화하며 대중화하는 정토신앙을 확립하였다.
5교가 귀족들의 환영을 받은 데 대하여 정토신앙은 일반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이 정토신앙은 불경의 깊은 교리를 터득하지 않더라도 극락세계에 생왕(生往)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면, 고해에서 벗어나 서방의 정토(淨土:극락)에 귀의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도 손쉽게 믿을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정토신앙은 통일신라의 사회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민중들의 현실도피적 염세경향을 반영해준 불교 내세관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8세기 이후 신라 사회에 정치적 권위가 추락되자 불교계에도 불경과 계율을 앞세워 중앙귀족과 연결된 5교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대두되어 지방 호족과 연결, 9산(九山:禪宗)의 종파가 이룩되었다. 하대의 선종사상은 교리보다 스스로 사색하여 개인적인 심적 체험과 도야로서 진리를 깨닫는 것(見性悟道)이 옳다고 생각한 종파로서 문자를 떠나(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중요시하였다.
이 선종은 8세기 말 혜공왕 때의 신행(神行)과 9세기 초인 헌덕왕 때의 도의(道義)에 의하여 가지산파(迦智山派)가 성립되면서 9개파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을 거듭했던 하대에 심성(心性) 도야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시대적 환경에 부합될 수 있었다. 대개 6두품 출신이 지방 호족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변경에서 개창되었기 때문에 호족의 종교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발전 성행한 선종은 중세(中世)의 지성을 성립시키는 자극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왕실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호족세력의 사상적 이념을 제시해주었다. 특히 해주(海州) 수미산파의 개창자 이엄(利嚴)이 호족 출신인 왕건(王建)의 스승이 된 것 등으로 미루어 선종사상은 고려 왕조 개창의 정신적 계기가 되었다. 선종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중국문화의 폭을 넓혀주었고, 한문학 발달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분묘의 외형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봉분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하단부에 자연석을 보이지 않게 적당한 간격으로 놓았으나 통일 후에는 석축(石築), 12지신상, 석상(石床), 방주석(方柱石), 석사자(石獅子)상, 문 ·무인석(文武人石) 등 둘레돌을 크게 이용하였는데, 신문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이 그와 같은 유형에 해당된다. 특히 죽은 뒤에도 방위신(方位神)인 12지신과 석사자 등 호석물을 세워 호위를 받으려 한 것은 전제왕권의 권위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 불교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불교 전래과정은 국가적 사절을 매개로 한 외교적 통로에 의한 전래였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 초기 전래는 눌지왕 때 고구려로부터 무명인에 의해 전래되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고, 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善山) 지방 모례(毛禮)의 집에서 아도(阿道)가 전도했으나 이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521년(법흥왕 8)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불교가 알려지자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진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고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異次頓)마저 순교하게 되었다(527). 이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고 중단했던 흥륜사(興輪寺) 창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535). 이와 같이 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불교를 수용한 원인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재래의 토속신앙을 극복하면서 고대국가의 이념과 사상을 통일하고 국가발전을 비는 호국신앙(護國信仰)과 현실구복적(現實求福的) 신앙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불교의 호국사상은 왕권의 신성함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불교왕명을 낳았다. 즉, 진평왕과 그 왕비는 석가의 모친명(名)을 따서 백정(白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불렀고, 법흥왕은 법공(法空), 진흥왕은 법운(法雲)이라 하는 등 불교왕명시대가 찾아왔다.
불교의 호국관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국사(佛國寺) ·흥국사(興國寺) ·흥왕사(興王寺) 등을 축조한 것이나, 황룡사9층탑의 축조 및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화랑이 되었다는 신념 등은 왕실호위와 국가수호의 호국신앙의 표시였다. 또한 호국경(護國經)인 인왕경(仁王經)이 존중되고, 국가의 안태(安泰)를 비는 백좌강회(百座講會:仁王會) ·팔관회(八關會) 등 불교행사가 성행하였다.
한편 승직제도인 국통제(國統制)가 진흥왕 때 수립되어 불교의 정치참여를 촉진시켰다. 또 현세구복적 성격면에서는 아들의 출산이나 치병(治病)을 기원하는 등 샤머니즘과 결부되어 불교의 대중화가 촉진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는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데 정치적 고문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중국 및 서역문화 수입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여 민족문화 개발에 활력소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문화 개발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특히 승려들은 학문과 사상의 선각자가 되어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신라인의 도덕적 요강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도 실증된다.
통일 전 불교의 종파는 자장을 중심으로 하는 계율종(戒律宗)이 유행하여 국민사상의 통일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한편 의상(義湘)의 화엄종(華嚴宗)은 원융사상(圓融思想)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부합되었기 때문에 귀족사회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통일 후 중대의 불교는 나 ·당간의 친선관계가 이룩되면서 유학생 ·유학승의 노력으로 단순한 호국종교의 역할을 벗어나 사상과 이념을 앞세운 종교철학으로 발전하였다. 이 결과 5교(敎)의 종파가 성립되었다. 이때 원효는 통일신라의 불교를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종파간의 대립의식이나 형식을 배격하고 일심(一心) ·진여(眞如)와 통일 ·화합의 화정사상(和靜思想)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형식화 ·귀족화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불교를 생활화하며 대중화하는 정토신앙을 확립하였다.
5교가 귀족들의 환영을 받은 데 대하여 정토신앙은 일반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이 정토신앙은 불경의 깊은 교리를 터득하지 않더라도 극락세계에 생왕(生往)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면, 고해에서 벗어나 서방의 정토(淨土:극락)에 귀의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도 손쉽게 믿을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정토신앙은 통일신라의 사회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민중들의 현실도피적 염세경향을 반영해준 불교 내세관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8세기 이후 신라 사회에 정치적 권위가 추락되자 불교계에도 불경과 계율을 앞세워 중앙귀족과 연결된 5교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대두되어 지방 호족과 연결, 9산(九山:禪宗)의 종파가 이룩되었다. 하대의 선종사상은 교리보다 스스로 사색하여 개인적인 심적 체험과 도야로서 진리를 깨닫는 것(見性悟道)이 옳다고 생각한 종파로서 문자를 떠나(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중요시하였다.
이 선종은 8세기 말 혜공왕 때의 신행(神行)과 9세기 초인 헌덕왕 때의 도의(道義)에 의하여 가지산파(迦智山派)가 성립되면서 9개파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을 거듭했던 하대에 심성(心性) 도야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시대적 환경에 부합될 수 있었다. 대개 6두품 출신이 지방 호족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변경에서 개창되었기 때문에 호족의 종교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발전 성행한 선종은 중세(中世)의 지성을 성립시키는 자극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왕실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호족세력의 사상적 이념을 제시해주었다. 특히 해주(海州) 수미산파의 개창자 이엄(利嚴)이 호족 출신인 왕건(王建)의 스승이 된 것 등으로 미루어 선종사상은 고려 왕조 개창의 정신적 계기가 되었다. 선종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중국문화의 폭을 넓혀주었고, 한문학 발달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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