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고구려족의 기원
★예와 맥이란
1)고구려족의 변천
2)고주몽의 건국전설
3)북부여 출자설과 부여 출자설
4)동부여 출자설
※주몽건국신화에 나타나 있는 의미
Ⅱ.고구려 초기의 정치체계
1)`부` 성격과 그 구조 파악의 필요성
2)`부`의 성립
①부의 기원
②부의 용례
③부의 왕권
④5부의 성립시기
3)부체제의 구조
①부내(部內)부, 집단(集團)예민, 후국(侯國)
②읍락민과 가(加)
4)부체제하의 정치제도
①관등제와 제가회의
②동맹(東盟)제
5)고유명 부에서 방위명 부로
Ⅲ. 중앙집권화 정책
① 중앙정치제도
② 지방행정제도
Ⅳ.고구려의 대외관계
(1) 고구려와 중국 왕조
(2) 고구려와 백제신라에서 알아보는 대외관계
Ⅴ. 고구려의 한강유역 상실의 원인
1). 신라, 백제의 국력신장 결과
2). 고구려의 대내외적인 변화
1) 대내적 : 정치적인 분쟁(왕위계승분쟁과 귀족간의 내분)
2) 대외적 : 돌궐, 북제의 북부, 서부 경계선 위협
Ⅳ. 결 론
참 고 문 헌
★예와 맥이란
1)고구려족의 변천
2)고주몽의 건국전설
3)북부여 출자설과 부여 출자설
4)동부여 출자설
※주몽건국신화에 나타나 있는 의미
Ⅱ.고구려 초기의 정치체계
1)`부` 성격과 그 구조 파악의 필요성
2)`부`의 성립
①부의 기원
②부의 용례
③부의 왕권
④5부의 성립시기
3)부체제의 구조
①부내(部內)부, 집단(集團)예민, 후국(侯國)
②읍락민과 가(加)
4)부체제하의 정치제도
①관등제와 제가회의
②동맹(東盟)제
5)고유명 부에서 방위명 부로
Ⅲ. 중앙집권화 정책
① 중앙정치제도
② 지방행정제도
Ⅳ.고구려의 대외관계
(1) 고구려와 중국 왕조
(2) 고구려와 백제신라에서 알아보는 대외관계
Ⅴ. 고구려의 한강유역 상실의 원인
1). 신라, 백제의 국력신장 결과
2). 고구려의 대내외적인 변화
1) 대내적 : 정치적인 분쟁(왕위계승분쟁과 귀족간의 내분)
2) 대외적 : 돌궐, 북제의 북부, 서부 경계선 위협
Ⅳ. 결 론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히려면 돌궐의 발흥연대를 고찰하면 곧 알 수 있다. 돌궐이 내습해왔다는 551년에는 돌궐을 여전히 그들의 단노(鍛奴)였다고 무시하던 연연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돌궐의 세력이 요하 이동의 신성에까지 침공해 올 수 없었던 것이다. 돌궐이 독자적인 세력이 되어 고구려를 내습해올 수 있었던 시기는 빨라도 555년이었다.
그렇다면 돌궐은 고구려가 한강을 잃은 사실에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나아가 생각해보면, 위의 말대로 돌궐이 고구려를 내습해오긴 했으되, 그전에 돌궐이 아닌 다른 어떠한 세력(북제)이 실제 고구려의 서부방어선을 위협했고, 그것으로 남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할 고구려의 힘을 분산시켰고, 이어 돌궐이 내침해 와 장기적이고 보다 큰 위협이 되었다고 본다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사실에 돌궐이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보기 어렵다.
북제가 고구려의 서부 방어선을 위협했을 때, 고구려는 왕위 계승 분쟁을 치렀고 이어 남으로부터는 나제동맹의 군사적 공격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가능한 한 서북 방면에서 새로운 군사적 충돌을 초래할 분쟁의 위험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약점을 포착한 북제는 강한 외교적 압력을 넣었고 고구려가 이로써 더 이상 남고할 수 없게 힘을 분산시킨 것이다.
북제로 인한 서부 방면의 긴장을 북쪽 돌궐이 이어 받았다. 돌궐은 어느 정도 고구려의 세가 작용하던 지역-거란-에 침투해 들어와 각축을 벌이고, 이에 수가 개입함에 따라 점차 수의 세력이 우세해져 갔다. 그리고 돌궐은 다른 방면으로도 고구려와의 대결을 전개했다.
★이상에서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된 고구려측의 원인을 내분과, 서북부 국경에서 전개된 북제와 돌궐의 압박이란 면에서 살펴보았다. 전자가 551년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에 의한 한강 유역 공략을 초래케 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면, 후자는 그에 대응해 고구려측이 반격을 펼치지 못하게 된 동인이었다. 이러한 내외의 원인에 의한 한강 유역의 상실을 삼국간의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후 고구려 정치정세의 진전에도 큰 작용을 하였다.
Ⅳ. 결 론
이상으로 연맹체로 등장하여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로 성장해 나간 고구려의 발전 과정을 정치사에 초점을 두어 파악해 보았다. 먼저 첫 번째에서는 기본 사료인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초반부분 기사의 신빙성에 대해 살폈다. 그간 이 문제에 대해선 상반된 견해가 있어왔다. 하나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3세기 초까지의 기사를 전면적으로 불신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전면적 긍정론이다. 이 글에선 이 문제를 주몽설화와 고구려 초기 왕계의 성립 시기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검토해보았다. 두 번째에서는 이제까지 어떻게 貊과 濊貊이 기원전 1세기 중엽에 太子河 동쪽에서 松花江과 鴨綠江 사이에 펼쳐지는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는가를 살펴보았다. 또한 이 시기에 濊貊이 丸都, 즉 通溝의 평야지방에서 고구려 왕국의 기초를 닦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다음으로 고구려 초기의 정치체제를 部체제라고 명명하였다. 부체제 하의 고구려국은 각급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자치체는 고구려의 국가구조 내에서 점하는 정치적 위상에 따라 그 현실적인 처지가 달랐다. 그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집단이 5部다. 部의 원형은 고구려의 발상지였던 압록강 중류 지역 계곡에 형성되었던 부족이나 소국(chiefdom)이었다. 이들 집단이 상호 통합을 거쳐 다섯 집단이 되었고, 계루부 외의 네 집단은 다시 계루부 왕실에 의해 그 자치권의 일부를 박탈당하여 왕권 아래 종속된 자치체가 되었다. 각 부는 자체의 관인을 두어 그 내부의 일은 자치적으로 처리하였고, 각 부의 내부에는 다시 작은 하위의 자치체인 部內部가 존재하였다. 각 부와 부내부의 장은 諸加會議라는 회의체를 통해 국정에 참여하였다. 5부인들은 고구려국의 국가구조 내에서 볼 때, 여타 피복속민들에 비해 집단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지배 족단이었고, 동맹제에의 참여를 통해 그들간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그 다음으로 통치형태의 변화를 영주·국왕과의 관계와 중앙관료제도, 지방행정제도 등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그들의 초기 정치체계는 고구려의 통치계급이 국민들을 군정의 방법으로 다스리고 국민들의 반항을 무력으로 누르며 대외적으로 부단히 침입해오는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통치제도를 갖추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통치제도는 외래 침략자들과의 치열한 투쟁속에서 나라를 세우고 건국후에도 끊임없이 힘겨운 반침략투쟁을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역사적 조건에서 이루어진 필연적 산물이었으며 이러한 통치제도는 고구려 국민들을 수시로 반침략전쟁에 동원할 수 있게 하였으며 고구려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나아가서 국가를 강화하게 한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되었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이상의 내용을 집약해서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초기의 시기 구분을 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선 고구려사를 그 정치체제에 따라 연맹체적인 부체제 시기와 영역국가적인 중앙집권체제 시기로 크게 구분하였다. 초기에서 5부체제가 확립된 것이 태조왕대이므로, 이를 경계로 그 앞과 시기를 다시 세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태조왕대 이전 시기는 일단 漢郡縣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BC 75년을 상한선으로 상정한다. 소노 집단과 이어 계루집단이 주도하는 AD 1세기 중반 무렵까지의 고구려 연맹체는 압록강 중류 유역의 '那'들을 다 아우르지 못하였고, '那'들에 대한 고구려왕의 통제력 또한 확고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왕의 통제력은 일부 '那'에 작용하였고, 한편으로는 선비 異種인 만리 집단과 같은 다른 종족을 복속시켜 집단예민으로 지배하기도 하였다. 비록 아직 확립되지는 못하였지만, 부체제와 같은 정치구조의 일단을 형성하였다. 그런 만큼 이 시기를 부체제가 형성되어 가는 과도기로 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초기'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사의 시기 구분은 정치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연맹체적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로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미 백제나 신라와는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돌궐은 고구려가 한강을 잃은 사실에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나아가 생각해보면, 위의 말대로 돌궐이 고구려를 내습해오긴 했으되, 그전에 돌궐이 아닌 다른 어떠한 세력(북제)이 실제 고구려의 서부방어선을 위협했고, 그것으로 남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할 고구려의 힘을 분산시켰고, 이어 돌궐이 내침해 와 장기적이고 보다 큰 위협이 되었다고 본다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사실에 돌궐이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보기 어렵다.
북제가 고구려의 서부 방어선을 위협했을 때, 고구려는 왕위 계승 분쟁을 치렀고 이어 남으로부터는 나제동맹의 군사적 공격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가능한 한 서북 방면에서 새로운 군사적 충돌을 초래할 분쟁의 위험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약점을 포착한 북제는 강한 외교적 압력을 넣었고 고구려가 이로써 더 이상 남고할 수 없게 힘을 분산시킨 것이다.
북제로 인한 서부 방면의 긴장을 북쪽 돌궐이 이어 받았다. 돌궐은 어느 정도 고구려의 세가 작용하던 지역-거란-에 침투해 들어와 각축을 벌이고, 이에 수가 개입함에 따라 점차 수의 세력이 우세해져 갔다. 그리고 돌궐은 다른 방면으로도 고구려와의 대결을 전개했다.
★이상에서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된 고구려측의 원인을 내분과, 서북부 국경에서 전개된 북제와 돌궐의 압박이란 면에서 살펴보았다. 전자가 551년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에 의한 한강 유역 공략을 초래케 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면, 후자는 그에 대응해 고구려측이 반격을 펼치지 못하게 된 동인이었다. 이러한 내외의 원인에 의한 한강 유역의 상실을 삼국간의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후 고구려 정치정세의 진전에도 큰 작용을 하였다.
Ⅳ. 결 론
이상으로 연맹체로 등장하여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로 성장해 나간 고구려의 발전 과정을 정치사에 초점을 두어 파악해 보았다. 먼저 첫 번째에서는 기본 사료인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초반부분 기사의 신빙성에 대해 살폈다. 그간 이 문제에 대해선 상반된 견해가 있어왔다. 하나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3세기 초까지의 기사를 전면적으로 불신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전면적 긍정론이다. 이 글에선 이 문제를 주몽설화와 고구려 초기 왕계의 성립 시기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검토해보았다. 두 번째에서는 이제까지 어떻게 貊과 濊貊이 기원전 1세기 중엽에 太子河 동쪽에서 松花江과 鴨綠江 사이에 펼쳐지는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는가를 살펴보았다. 또한 이 시기에 濊貊이 丸都, 즉 通溝의 평야지방에서 고구려 왕국의 기초를 닦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다음으로 고구려 초기의 정치체제를 部체제라고 명명하였다. 부체제 하의 고구려국은 각급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자치체는 고구려의 국가구조 내에서 점하는 정치적 위상에 따라 그 현실적인 처지가 달랐다. 그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집단이 5部다. 部의 원형은 고구려의 발상지였던 압록강 중류 지역 계곡에 형성되었던 부족이나 소국(chiefdom)이었다. 이들 집단이 상호 통합을 거쳐 다섯 집단이 되었고, 계루부 외의 네 집단은 다시 계루부 왕실에 의해 그 자치권의 일부를 박탈당하여 왕권 아래 종속된 자치체가 되었다. 각 부는 자체의 관인을 두어 그 내부의 일은 자치적으로 처리하였고, 각 부의 내부에는 다시 작은 하위의 자치체인 部內部가 존재하였다. 각 부와 부내부의 장은 諸加會議라는 회의체를 통해 국정에 참여하였다. 5부인들은 고구려국의 국가구조 내에서 볼 때, 여타 피복속민들에 비해 집단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지배 족단이었고, 동맹제에의 참여를 통해 그들간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그 다음으로 통치형태의 변화를 영주·국왕과의 관계와 중앙관료제도, 지방행정제도 등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그들의 초기 정치체계는 고구려의 통치계급이 국민들을 군정의 방법으로 다스리고 국민들의 반항을 무력으로 누르며 대외적으로 부단히 침입해오는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통치제도를 갖추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통치제도는 외래 침략자들과의 치열한 투쟁속에서 나라를 세우고 건국후에도 끊임없이 힘겨운 반침략투쟁을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역사적 조건에서 이루어진 필연적 산물이었으며 이러한 통치제도는 고구려 국민들을 수시로 반침략전쟁에 동원할 수 있게 하였으며 고구려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나아가서 국가를 강화하게 한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되었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이상의 내용을 집약해서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초기의 시기 구분을 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선 고구려사를 그 정치체제에 따라 연맹체적인 부체제 시기와 영역국가적인 중앙집권체제 시기로 크게 구분하였다. 초기에서 5부체제가 확립된 것이 태조왕대이므로, 이를 경계로 그 앞과 시기를 다시 세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태조왕대 이전 시기는 일단 漢郡縣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BC 75년을 상한선으로 상정한다. 소노 집단과 이어 계루집단이 주도하는 AD 1세기 중반 무렵까지의 고구려 연맹체는 압록강 중류 유역의 '那'들을 다 아우르지 못하였고, '那'들에 대한 고구려왕의 통제력 또한 확고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왕의 통제력은 일부 '那'에 작용하였고, 한편으로는 선비 異種인 만리 집단과 같은 다른 종족을 복속시켜 집단예민으로 지배하기도 하였다. 비록 아직 확립되지는 못하였지만, 부체제와 같은 정치구조의 일단을 형성하였다. 그런 만큼 이 시기를 부체제가 형성되어 가는 과도기로 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초기'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사의 시기 구분은 정치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연맹체적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로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미 백제나 신라와는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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