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성공,실패한 기업가 4인(잭웰치, 유일한, 김우중, 맥스 디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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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내외 성공,실패한 기업가 4인(잭웰치, 유일한, 김우중, 맥스 디프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 론
◦ 기업가 정신의 개념과 기업가 선정 이유

2. 본 론
1) 국내의 성공한 기업가
◦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의 생애와 업적
2) 국내의 실패한 기업가
◦ 대우그룹 창업자 ‘김우중’의 실패원인
3) 국외의 성공한 기업가
◦ GE그룹 CEO ‘잭 웰치’의 생애와 업적
4) 국외의 실패한 기업가
◦ 허먼 밀러의 ‘맥스 디프리’의 실패원인

3. 결 론
◦ 4인의 기업가 정신을 보고 느낀 점

본문내용

학과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한 2명의 졸업생 중 한명으로 뽑혔다. 그는 대학 4학년 때에 여러 회사로부터 입사 제안을 받았다. 마음에 끌리는 좋은 조건이 많았으나 여러 교수들의 설득으로 그러한 제의들을 거절하고 연구비 지급을 약속한 샘페인에 있는 일리노이 대학의 대학원에 갔다. 그곳의 해리 드리카머 박사는 그를 마치 아들처럼 대해주었으며 가끔 짖궂은 농담을 하였으나 그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대학원 시절 내내 좋은 조언자가 되었다.
그렇게 1958년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할 무렵 미국은 경기 침체기를 맞아 그는 2군데 회사에서 입사제의를 받았었다. 그가 면접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스튜어디스가 자신의 동료에게 ‘박사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그 말이 듣기 좋다고 생각해 학교에서 공부를 더하기로 결심하고 미래에 대한 특별한 계획도 없이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또한 일리노이의 드리카머 교수와 짐 웨스트 워터 박사를 좋아했던 것도 박사 과정에 들어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박사과정을 밟을 때에는 실험실에거 거의 살다시피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는 박사과정 시절 증기 공급 시스템의 응축에 관한 연구를 하였으며 논문을 쓰며 자신의 연구결과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웨스트워터 교수의 강력한 지원으로 박사과정을 3년만에 마쳤다. 그가 또한 박사과정을 빨리 마칠 수 있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작업을 완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일이든 빨리 마무리 짓는 급한 성격이 한 몫을 하였다.
일리노이가 그에게 선사한 것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아내 캐롤린을 그곳에서 만났다. 그는 캠퍼스내의 카톨릭 교회에서 사순절 기간에 그녀를 처음 보았다. 한 친구가 샘페인 시내에 있는 술집에서 서로를 소개 시켜주었고 일리노이 대학의 영문학 석사과정을 다니는 그녀와의 인연이 그곳에서 시작 되었다. 5개월 후에 그들은 약혼을 하였고 11월 21일 캐롤린의 고향인 일리노이의 알링턴 하이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으로 그가 대학 졸업선물로 부모님께서 사주신 폭스바겐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일주 하였으며 신혼여행 기간 동안 입사제안을 받은 기업들중에서 가장 그의 흥미를 끌었던 GE의 화학물질 개발팀으로 지원하기 위해 피츠필드에 있는 실험실로 면접을 보러 갔고 그곳에선 댄 폭스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플라스틱을 개발하는 일은 그에게 관심을 가져다 주었고 그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그에게 GE를 선택하게 하였다.
GE에서 CEO가 되기까지
1960년 GE에 입사 했을 때 그의 꿈은 매우 소박했다. 박사 과정을 갓 마친 24세의 젊은 엔지니어였던 그는 1만 500달러의 연봉을 받았고, 30세가 될 때 쯤에는 연봉 3만 달러를 받고 싶었다. 만일 그에게 목표가 있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일에 쏟아 부으며 매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이후 몇 차례 승진을 거듭하면서 그는 더 높은 목표를 갖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그도 언젠가 하나의 회사를 맡아서 경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는 네모난 구멍 속의 동그란 말뚝 같은 존재였다. 그의 많은 동료들이 그를 GE와는 어울릴 수 없는 부적격자로 간주했다. 그는 무지막지하게 정직하게 솔직했다. 그는 개개인의 능력이나 성과 등을 고려하지 않고 미리 금액을 정해놓는 임금 인상은 그에게 염증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회사의 인색한 행정을 계속되었다. 초창기 그의 팀의 네 사람은 플라스틱스 가에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의 비좁은 사무실을 나눠 썼으며 두 대의 전화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고, 책성 너머로 서로 전화를 건네주느라 수선을 떨어야 했다. 사업차 여행을 할 때 또한 호텔에서 다른 사람들과 방을 같이 쓰라고 요구까지 하였다. 그러자 그는 회사의 관료주의적인 거만함에 대항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했다. 그래서 그는 회사로부터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는 무수한 압력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또한 참을성이 부족해서 툭 하면 마찰을 일으켰다. 그의 행동은 그다지 점잖지 못했고, 특히 크고 작은 사업상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열리는 파티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다행이 GE에는 그와 같은 기질을 사진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전 회장인 레그 존스가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레그는 말수가 적고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는 꼴사나운 말더듬이에다가 거칠고 시끄러운 다혈질이었다. 당시 레그 존스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서 워싱턴 정가에서도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잭 웰치는 GE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고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거의 경험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레그 존스와 깊은 공감을 나누었다. 레그 존스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레그 존스에게 이해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점에 있어서, 우리는 동질의 영혼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했고 중요한 생각들을 공유했다. 그는 둘 다 분석과 수치를 좋아했으며, 미리 충분히 검토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GE를 사랑했다. 레그 존스는 GE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잭 웰치가 그 일을 해낼 열정과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후임자 자리를 놓고 쟁쟁한 사람들과 경쟁을 하였으나 레그 존스는 자신의 신념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잭 웰치가 적임자임을 여러 사람들에게 설득시켰고 결국 1980년 10월 19일에 잭 웰치가 차기 회장으로 이사회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잭 웰치의 기업가 정신
- 중성자탄 잭(엄격한 구조조정)
: 잭 웰치가 처음 GE 회장의 책임을 맡았던 1981년 거대하고 지극히 관료적이며 보수적인 미국의 전형적인 대기업이었던 GE의 체질로는 다가오는 시대의 격심한 기술 경쟁과 원가 경쟁에서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그 당시 구조조정이라는 개념이 생소해서 핵심 역량과 경쟁력을 기준으로 한 GE식의 철저한 구조조정은 가히 혁명적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의 눈에 그는 과격한 이단자로 비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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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4.12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0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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