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교회의 본질
1.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
2.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3.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4. 교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5. 증거 공동체로서의 교회
Ⅱ. 교회의 기원
1. 천주교의 기원문제
2. 개신교의 기원문제
Ⅲ. 기원과학으로서 창조와 진화
Ⅳ.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창조론 교육
Ⅴ. 교회의 분열
1. 초기 선교사들의 갈등(알렌과 언더우드)
2. 소종파의 태동
3. 해방 이후의 교회 분열
1) 신사참배로 인한 고신파의 분열
2) 신학사상 차이로 인한 기장과 예장의 분열
4. 에큐메니칼운동으로 인한 분열
1)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2) 기성과 예성의 분열
5. 교회분열을 틈탄 사이비 기독교의 등장
Ⅵ. 분열의 배경
1. 국내적 배경
1) 지역성
2) 붕당성
3) 유교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
2. 국외적 배경
1) 미국 교회의 교파중심적 선교
2) 선교지 분할 정책
3) 신학적 상이성
Ⅶ. 결론
1.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
2.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3.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4. 교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5. 증거 공동체로서의 교회
Ⅱ. 교회의 기원
1. 천주교의 기원문제
2. 개신교의 기원문제
Ⅲ. 기원과학으로서 창조와 진화
Ⅳ.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창조론 교육
Ⅴ. 교회의 분열
1. 초기 선교사들의 갈등(알렌과 언더우드)
2. 소종파의 태동
3. 해방 이후의 교회 분열
1) 신사참배로 인한 고신파의 분열
2) 신학사상 차이로 인한 기장과 예장의 분열
4. 에큐메니칼운동으로 인한 분열
1)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2) 기성과 예성의 분열
5. 교회분열을 틈탄 사이비 기독교의 등장
Ⅵ. 분열의 배경
1. 국내적 배경
1) 지역성
2) 붕당성
3) 유교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
2. 국외적 배경
1) 미국 교회의 교파중심적 선교
2) 선교지 분할 정책
3) 신학적 상이성
Ⅶ. 결론
본문내용
아가 신학적 상이성을 다룬다.
1) 미국 교회의 교파중심적 선교
조선조에 먼저 선교를 했던 서구형 교회는 당시 천주교 박해 및 척사의 상황에서 도입될 가능성이 희박했고, 시기적으로 서구 열강에 대한 단호한 쇄국정책 때문에 지속적, 적극적 선교활동을 할 수 없어서 한국 정착에는 실패했다.
1882년 한미수호 통상으로 문호가 개방되고 당시 미국내에 선교부흥운동의 열기가 치솟는 가운데 미국 선교부는 한국선교를 결정한다. 한국기독교회 선교역사의 첫장을 찬란하게 장식한 선교사들은 미국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는 원래 교파적 신앙공동체의 이주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 건국 초기부터 헌법상 정교가 분리되어 국교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파적 형태의 기독교로 발전한 대표적 국가였다. 이런 교파적 교회는 하나의 교리로서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와 교회의 교구적 잎치에 대한 관념이 희박한 경향이 있으므로 한국교회에 분열의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는 미국의 각이한 교파들의 선교운동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여러 교파와 교파들로 나누어 졌고 미국의 상황에 따라 한국교회도 분열될 수 밖에 없는 상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2) 선교지 분할 정책
한국에서 활동을 하던 여러 교파 소속의 젊은 선교사들은 경험미숙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자 그 대안을 모색한다. 그 모색의 일환으로 이들은 1890년 중국지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존 네비우스(John Nevius)목사 부처를 초빙한다. 네비우스는 \'독립 자존적인 토착 교회수립\' 을 목표로 본토 전도인들에게 드는 경제적 지출을 최대한 줄여 선교비를 본토 교인들이 스스로 부담하는 선교방법을 내세웠다. 이것이 네비우스 플랜이다.
다음으로 이 원칙을 한국교회 적용할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 1893년 \'장로회정치를 쓰는 미센 공의회\'에서 내세운 선교지역의 분할 정책이다. 이것은 선교기간이 여럿이기 때문에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없는 경쟁을 하지 않도록 연합적으로 분할하는 프로그램이다. 연합해서 피차 협조하려면, 하는 일과 지역을 분할해야만 할 때가 있다. 이렇게 해서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및 경상북도를 분할하여 받았다.
한국이라는 좁은 땅에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이 정책은 교파단위 선교로 생긴 분열의 잠재적 가능성에 가세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즉 고려파는 해방이후 호주 장로교 선교지역이었던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1952년에는 기장이 분립했는데, 이 교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함경도 인사들로서 함경도 지역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지역이었다. 1960년대를 전후한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남, 북 장호교 선교재역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같이 분할된 선교지역은 각 교파 선교부의 영향하에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지역적 특성과 결부되어 교회의 일치가 어려워졌다.
3) 신학적 상이성
한국교회는 1930년대 까지는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인의 신학적 존구가 시작되었고 보수주의 신안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성경관이나 신학적 견해에 분명한 차이가 나타났는데, 다음의 동기와 영향이 있었다.
첫째로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유학한 인사중에 자유주의적 신학을 연구하거나 그 신학의 영향을 받은 인사가 귀국하여 집필이나 신학활동을 한 것이고, 둘째는 미국 교회의 신학적 논쟁과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북 장로교회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적인 자유주의화 경향은 선교의 상관관계를 볼 때 한국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Ⅶ. 결론
현 사회를 디지털 잼 ( Digital Jam)이라고 한다. 모든 체제(System)와 문화가 디지털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Digital)이란 펄스(Pulse)를 통한 이산적(離散的)인 불연속적 신호체제인 톱니바퀴로 표현된다. 이와 비교되는 아날로그(Analogue)는 전자기파의 흐름처럼 사이클(Cycle) 형태의 연속적인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다. 아날로그시대의 장비체제는 각각시스템(each system)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노하우(kow-how)와 실력은 유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넘쳤다. 그러나 디지털은 모든 장비는 함께 시스템(with system)이다. 홀로 존재는 불가능하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자신의 노하우(know-how)는 개방되어 부단한 경쟁 존멸(存滅)속에 살아가고 있다. 디지털 문화에 인색하리만큼 변화를 싫어하는 집단이 바로 정치집단이며 그 다음이 교회들이다. 그 이유는 기득권 유지라는 입장에서 정당이 그렇고 대형 교회가 그렇다. 디지털 시대는 사용하는 도구들이 따로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연결되어있다. 우리의 삶도 홀로 사는 시대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시대이어야 한다. 그래서 디지털 잼(digital jam)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디지털사회 속에 교회의 위상도 변화의 조짐이 있다. 불 특정다수에게 외치던 전도의 패턴이 특정 소수를 대상으로 전도하고 수용의 패턴으로 변화이다. 또한 교회는 무비판적 시스템에서 비판적 시스템을 수용하려는 움직임도 변화의 한 단면이다. 교회는 산업사회의 문화를 꽃피웠듯이 디지털 시대의 문화를 리드해야하는 시대적 사명이 있다. 그것은 디지털 사회에 개개의 시스템(each system)관계를 함께시스템(with system)관계로 엮어주어야 하며 수용의 패턴으로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또한 환경의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를 내 몸처럼 아끼던 기성세대는 점점 쇠잔해가고 디지털시대인 386세대가 교회에 전면에 나타나는 시대이다. 이러한 세대는 절대적(絶對的)인 개념보다 대안적(代案的)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변화에 민감하며 분위기를 중시한다. 교회는 어렵지만 디지털 사회에 참여하여 아날로그시대의 대형화의 일변도에서 동참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 본교는 디지털 사회와 함께 호흡하기 위해 시스템 구축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1) 미국 교회의 교파중심적 선교
조선조에 먼저 선교를 했던 서구형 교회는 당시 천주교 박해 및 척사의 상황에서 도입될 가능성이 희박했고, 시기적으로 서구 열강에 대한 단호한 쇄국정책 때문에 지속적, 적극적 선교활동을 할 수 없어서 한국 정착에는 실패했다.
1882년 한미수호 통상으로 문호가 개방되고 당시 미국내에 선교부흥운동의 열기가 치솟는 가운데 미국 선교부는 한국선교를 결정한다. 한국기독교회 선교역사의 첫장을 찬란하게 장식한 선교사들은 미국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는 원래 교파적 신앙공동체의 이주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 건국 초기부터 헌법상 정교가 분리되어 국교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파적 형태의 기독교로 발전한 대표적 국가였다. 이런 교파적 교회는 하나의 교리로서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와 교회의 교구적 잎치에 대한 관념이 희박한 경향이 있으므로 한국교회에 분열의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는 미국의 각이한 교파들의 선교운동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여러 교파와 교파들로 나누어 졌고 미국의 상황에 따라 한국교회도 분열될 수 밖에 없는 상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2) 선교지 분할 정책
한국에서 활동을 하던 여러 교파 소속의 젊은 선교사들은 경험미숙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자 그 대안을 모색한다. 그 모색의 일환으로 이들은 1890년 중국지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존 네비우스(John Nevius)목사 부처를 초빙한다. 네비우스는 \'독립 자존적인 토착 교회수립\' 을 목표로 본토 전도인들에게 드는 경제적 지출을 최대한 줄여 선교비를 본토 교인들이 스스로 부담하는 선교방법을 내세웠다. 이것이 네비우스 플랜이다.
다음으로 이 원칙을 한국교회 적용할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 1893년 \'장로회정치를 쓰는 미센 공의회\'에서 내세운 선교지역의 분할 정책이다. 이것은 선교기간이 여럿이기 때문에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없는 경쟁을 하지 않도록 연합적으로 분할하는 프로그램이다. 연합해서 피차 협조하려면, 하는 일과 지역을 분할해야만 할 때가 있다. 이렇게 해서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및 경상북도를 분할하여 받았다.
한국이라는 좁은 땅에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이 정책은 교파단위 선교로 생긴 분열의 잠재적 가능성에 가세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즉 고려파는 해방이후 호주 장로교 선교지역이었던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1952년에는 기장이 분립했는데, 이 교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함경도 인사들로서 함경도 지역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지역이었다. 1960년대를 전후한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남, 북 장호교 선교재역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같이 분할된 선교지역은 각 교파 선교부의 영향하에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지역적 특성과 결부되어 교회의 일치가 어려워졌다.
3) 신학적 상이성
한국교회는 1930년대 까지는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인의 신학적 존구가 시작되었고 보수주의 신안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성경관이나 신학적 견해에 분명한 차이가 나타났는데, 다음의 동기와 영향이 있었다.
첫째로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유학한 인사중에 자유주의적 신학을 연구하거나 그 신학의 영향을 받은 인사가 귀국하여 집필이나 신학활동을 한 것이고, 둘째는 미국 교회의 신학적 논쟁과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북 장로교회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적인 자유주의화 경향은 선교의 상관관계를 볼 때 한국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Ⅶ. 결론
현 사회를 디지털 잼 ( Digital Jam)이라고 한다. 모든 체제(System)와 문화가 디지털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Digital)이란 펄스(Pulse)를 통한 이산적(離散的)인 불연속적 신호체제인 톱니바퀴로 표현된다. 이와 비교되는 아날로그(Analogue)는 전자기파의 흐름처럼 사이클(Cycle) 형태의 연속적인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다. 아날로그시대의 장비체제는 각각시스템(each system)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노하우(kow-how)와 실력은 유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넘쳤다. 그러나 디지털은 모든 장비는 함께 시스템(with system)이다. 홀로 존재는 불가능하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자신의 노하우(know-how)는 개방되어 부단한 경쟁 존멸(存滅)속에 살아가고 있다. 디지털 문화에 인색하리만큼 변화를 싫어하는 집단이 바로 정치집단이며 그 다음이 교회들이다. 그 이유는 기득권 유지라는 입장에서 정당이 그렇고 대형 교회가 그렇다. 디지털 시대는 사용하는 도구들이 따로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연결되어있다. 우리의 삶도 홀로 사는 시대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시대이어야 한다. 그래서 디지털 잼(digital jam)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디지털사회 속에 교회의 위상도 변화의 조짐이 있다. 불 특정다수에게 외치던 전도의 패턴이 특정 소수를 대상으로 전도하고 수용의 패턴으로 변화이다. 또한 교회는 무비판적 시스템에서 비판적 시스템을 수용하려는 움직임도 변화의 한 단면이다. 교회는 산업사회의 문화를 꽃피웠듯이 디지털 시대의 문화를 리드해야하는 시대적 사명이 있다. 그것은 디지털 사회에 개개의 시스템(each system)관계를 함께시스템(with system)관계로 엮어주어야 하며 수용의 패턴으로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또한 환경의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를 내 몸처럼 아끼던 기성세대는 점점 쇠잔해가고 디지털시대인 386세대가 교회에 전면에 나타나는 시대이다. 이러한 세대는 절대적(絶對的)인 개념보다 대안적(代案的)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변화에 민감하며 분위기를 중시한다. 교회는 어렵지만 디지털 사회에 참여하여 아날로그시대의 대형화의 일변도에서 동참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 본교는 디지털 사회와 함께 호흡하기 위해 시스템 구축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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