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자와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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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구로자와 아키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립한 모조품이라는 것. 그러나 구로사와의 영화에 서구인들이 단번에 홀리는 이유가 가부키나 노(能)같은, 일본의 전통적인 연희 양식을 서구영화 스타일에 녹여낸 구로사와의 화술에 있는 것도 틀림없다.
일본인들이나 서구의 전문비평가들이 구로사와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다. <태어났지만…>이나 <동경이야기> <만춘> 등의 영화로 유명한 오즈는 일본 서민사회의 애환을 자기 식의 문법으로 찍어낸 감독.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태어났지만, 별 볼일 없다던가\', \'대학은 나왔지만 취직은 못했다든가\'하는 따위의 소재로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일상을 담았다. 전쟁이 끝난 뒤 오즈는 전통적인 사회가 무너지는 가운데 그런 변화에 마음 아파하고 체념하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담았다. <조춘>, <만춘>, <조추>, <만추> 등의 제목을 붙여 초봄이면 젊은 처녀, 늦봄이면 노처녀, 초가을이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 늦가을이면 죽음을 앞둔 노인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비슷한 얘기만을 찍어간 오즈였지만 그런 드라마 게임 같은 소재로 영화를 찍었는데도 대가의 통찰력을 느끼게 하는 것. 오즈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곧잘 화면을 정면에서 쳐다보고 있으며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화면도 자주 나온다. 꼼꼼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그런 스타일이 표면의 감정선보다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등장인물을 둘러싼 배경을 같이 담아내려는 독특한 오즈식 화술임을 눈치챈다.
미조구치 겐지는 오즈에 비해 늦깎이인 편. 20년대에 벌써 40편 이상의 영화를 찍었으나 대부분 흥행영화였다. 36년 <나니와의 연가> 이후 자기의 영화세계를 확립하고 페미니즘적 세계관과 긴 호흡의 리얼리즘 스타일을 보여주는 여인의 얘기를 주로 찍었다. 오즈와 미조구치가 대가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40년대 후반에 놀라운 화술을 보여주며 자리를 잡은 감독이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 구로사와는 50년대에 \'7인의 사무라이\', <살다>와 같은, 대중성과 예술성이 결합한 영화를 찍으면서 전성기를 열었다. 특히 57년에 만든 <거미의 성>은 당대 일본영화의 최고 기술수준을 보여주는 걸작.
오즈, 미조구치, 구로사와는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에서 도제 수업을 받고 자리를 굳힌 감독들이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독립영화사의 바람이 불었다. 그 중심은 오기사 나시마이기도 했다가 요시다 요시시게이기도 했다가 이마무라 쇼헤이이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의 메이져 영화사 중의 하나인 쇼치쿠에서도 시노다 마사히로가 축이 된, 전통적인 일본영화를 계승하는 게 아 니라 그 전통을 혁파한 \'쇼치쿠 누벨바그\'가 생겨 났다. 64년에 <모래의 여인>을 만든 데시가와라 히로서도 독립영화진영의 대표선수. 세계 영화사상 처음으로 모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자연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전면에 내세워 인간이 한낱 곤충으로 보일 정도. 데시가와라는 72년에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탈영한 미군들의 얘기를 찍은 다큐멘터리 성격의 영화를 만들고 난 뒤에 종적을 감추었다. 산 속에 들어가 도자기를 만들며 은둔했다는 것. 시대에 절망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미 1910년대부터 할리우드 영화의 액션을 모방한 \'챤바라\'(사무라이들이 칼싸움을 벌일 때 나는 칼 부딪치는 소리에서 따온 말), 곧 사무라이 영화가 정착했을 만큼 산업이 안정된 나라다. 그 전성기는 30년대. 대 영화사 밑에서 수많은 영화 인력이 일하면서 장르영화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일본영화가 예술적으로 황금기를 맞은 것은 50년대. 말할 것도 없이 오즈와 미조구치가 대가로 자리를 잡고 수많은 후배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산업이 조금씩 기울자 일본영화는 메이저 영화사 쪽에서는 야쿠자 영화, 사무라이 영화, 포르노로 산업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했고 재능 있는 감독들은 독립영화 쪽에서 둥지를 틀었다. 메이저 영화의 전통과 독립영화의 전통이 꾸준히 자리를 잡아온 셈이다. 게다가 일본영화계 당대의 거장들은 지금도 심심치 않게 작품을 내놓는다. 이미 일본영화계의 원로급에 해당하는 이마무라 쇼헤이가 <우나기>로 올해 칸 대상을 받았고 지난해에 시노다 마사히로는 시대극 <샤라쿠>로 칸 본선에 진출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신도 가네토도 95년에 <오후의 유언장>을 만들었다. 80줄의 구로사와도 여전히 영화를 찍는다. 김기영, 김수용, 유현목 등의 감독이 일찌감치 개점휴업에 들어간 우리 영화계와는 사정이 다른 것. 전통이 항상 살아있는 나라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럴만도 하다. 진짜 굉장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뤼미에르 형제로 부터 지금까지 영화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빠른 성장을 거듭해오고 있다.
매년 늘어나는 제작비와 발전하는 컴퓨터 그래픽 등등의 외적 성장은 점점 더 풍성한 볼거리들을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사적으로 명작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이뤄낸 내적은 성장에 비하자면 그것은 껍대기에 불과 하다고 까지 말할 수 있다.
오손 웰즈의 비운의 걸작 시민케인 ,오즈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 프랑소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명작들에는 그 마다의 작가의식과 더불어 독특한 카메라워크의 실험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카메라는 감독의 눈이자 곳 관객의 눈이다. 그러기에 카메라의 위치와 워킹 하나하나가 각각의의미를 내포하고 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민케인에서 사용된 오손 웰즈의 딥 포커스는 화면의 전체 사물과 인물에 포커스를 맞춰 관객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기는 영화사적으로 대단한 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 오손 웰즈 본인은 \"관객들은 한 쇼트 내에서 보고 싶어하는 것을 선택해서 볼 수 있다. 나는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연극의 선택적 취사 장점을 영화에 옮겨 사용했다고도 보여진다.
오즈 야스지로의 도쿄이야기에서 쓰여진 롱테이크 장면은 일명 다다미 쇼트라고도 불린다.
완벽하게 짜여진 동선으로 연기하는 연기자를 절제된 카메라가 쫓아가며 가족의 붕괴라는 일본의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롱테이크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절제의 미학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사랑을 하게 되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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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5.05
  • 저작시기2007.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08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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