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줄거리
Ⅱ. 작자
Ⅲ. 감상
Ⅱ. 작자
Ⅲ. 감상
본문내용
允자로 바꾸도록 했다. 외경의 대상인 천자의 이름을 형제이기는 하나, 이제는 신하가 된 자들이 그 이름을 쓰게 하지는 않았다. 옹정제는 이제 그들의 형제가 아니고, 그의 형제들은 모두 그의 신하들로 변했다.
옹정제 원년, 그에 대한 두 가지 소문이 있다. 첫째는 세상의 쓴 맛, 단맛을 다본 사려 깊은 군주라는 소문과 옹정제의 즉위가 선제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음모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볼 때 제1황자는 황태자 저주 혐의로 구금된 상태, 2황자는 폐태자 되었고, 3황자 총명하지 못했다 한다. 순서상으로 4황자인 옹정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당시 옹정제는 궁중에서 제2 황후의 슬하에서 자라 강희제가 그의 인품을 잘 알았을 것이다.
옹정제에 대한 여러 유언비어가 난무한 가운데, 그는 소문의 출처가 8황자라 점찍었다. 옹정은 처음부터 팔황자를 내치지 않고, 그에게 친왕의 자리와 정부의 최고 위원의 자리를 내린다. 대신 밀정을 통해 그의 행적을 감시하고, 그가 한 일에 대해 거듭 질책을 하고, 의심을 한다. 팔황자가 내무부의 인원관리를 명 받았을 때, 결국 다른 여타의 핑계를 대어 결국 8황자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내무부 내의 특별 독방에 감금시켰다. 그리고 이름을 ‘개(아키나)’ 라고 지어 불렀다. 옹정제 쪽에서 본다면 가족이라도 천자의 지위에서 본다면 모두 신하이고, 군신관계가 우선시 된다. 또한 독재군주에서 군주는 독재를 하도록 의무 지워져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에 대해서도 독재를 행할 수 없다면 만민에 대한 독재 군주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옹정제의 8황자에 대한 박해는 도가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8황자와 가장 친한 9황자 역시 박해를 받게 되었다. 9황자는 사천(四川)성의 서녕(西寧)으로 파견하여, 옹정제와는 긴밀한 관계가 있는 총독 연갱요(年羹堯)에게 감시하도록 하였다. 9황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밀정에 의해 감시되었고, 그가 14황자나 선교사들과 교류하는 편지를 압수하였다. 당시 크리스트 교에 관심을 가진 9황자가 로마자로 쓴 편지를 적과 내통하는 첩자의 짓이라 하여 옹정제는 9황자를 황족의 신분에서 쫓아낸다. 또한 그를 ‘돼지(사스헤)’라 이름 지었다. 8황자와 9황자는 같은 해 연달아 병사했다.
옹정제의 친형제인 14황자 역시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칭하이 평정이라는 공을 세우고 개선하는 14황자에게 개선행사가 없고, 가정적인 의례로 그를 맞이하지도 않는 옹정에게 “이것이 개선장군을 맞는 예식인가?” 라고 14황자가 분통을 터트리자 옹정은 “그것이 천자를 알현하는 예의인가?” 라고 되받아쳤다. 14황자는 강희제의 산릉을 수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고, 후에 그를 엎고 모반을 일으키려는 야심가들이 나타나자 같은 장소에 유폐되었다.
옹정제가 자기 형제들에게 박해를 가한 것은 특별히 즐겨서 한 일은 아닐 것이다. 때로 가학적으로 보이는 호아제의 집요함은 독재군주제의 특 안에서 군주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을 보인다. 그는 45년간의 궁중 내에서의 더부살이 생활과 수십 명의 황자들이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벌이는 비정한 암투 속에서 8황자와 9황자를 궁지로 내몰 때까지 냉정하게 기다리는 강한 정신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옹정 8년 그는 황위 계승을 위한 이러한 암투를 자식들이 되풀이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라 불리는 방식을 고안한다. 황제가 마음에 둔 후계자를 적어 상자에 넣고, 건청궁의 正大光明 액자 뒤에 두고, 이는 황제가 죽은 다음에 개봉하여 황위 계승자를 발표하도록 했다. 이 방법은 청조 내내 지켜졌고, 그 덕분에 어리석은 천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8,9,14 황자들과는 반대되는 처지의 13황자도 있었다. 그는 옹정과 친형제는 아니나 옹정에게는 헌신적이었고, 옹정제 역시 그를 신임했다. 옹정 8년 13황자인 이친왕이 세상을 떠나자 옹정의 슬픔은 컸고, 이친왕의 이름자를 원래의 胤자로 되돌려 놓으라 명했다. 완전히 신하가 된 형제여야 비로소 독재 군주로부터 형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만주에서 흥기한 청조는 중국에 들어와서 정치 형태 면에서는 차츰 중국화 되었지만 청조 사회에는 아직 만주색이 농후하게 남아 있다. 만주 귀족 중에는 현재의 황실보다도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일가가 있었는데, 수누(蘇努) 일족이 바로 그들이다. 수누는 청 태조 누르하치의 맏아들 추엥(英)의 자손으로 추
옹정제 원년, 그에 대한 두 가지 소문이 있다. 첫째는 세상의 쓴 맛, 단맛을 다본 사려 깊은 군주라는 소문과 옹정제의 즉위가 선제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음모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볼 때 제1황자는 황태자 저주 혐의로 구금된 상태, 2황자는 폐태자 되었고, 3황자 총명하지 못했다 한다. 순서상으로 4황자인 옹정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당시 옹정제는 궁중에서 제2 황후의 슬하에서 자라 강희제가 그의 인품을 잘 알았을 것이다.
옹정제에 대한 여러 유언비어가 난무한 가운데, 그는 소문의 출처가 8황자라 점찍었다. 옹정은 처음부터 팔황자를 내치지 않고, 그에게 친왕의 자리와 정부의 최고 위원의 자리를 내린다. 대신 밀정을 통해 그의 행적을 감시하고, 그가 한 일에 대해 거듭 질책을 하고, 의심을 한다. 팔황자가 내무부의 인원관리를 명 받았을 때, 결국 다른 여타의 핑계를 대어 결국 8황자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내무부 내의 특별 독방에 감금시켰다. 그리고 이름을 ‘개(아키나)’ 라고 지어 불렀다. 옹정제 쪽에서 본다면 가족이라도 천자의 지위에서 본다면 모두 신하이고, 군신관계가 우선시 된다. 또한 독재군주에서 군주는 독재를 하도록 의무 지워져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에 대해서도 독재를 행할 수 없다면 만민에 대한 독재 군주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옹정제의 8황자에 대한 박해는 도가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8황자와 가장 친한 9황자 역시 박해를 받게 되었다. 9황자는 사천(四川)성의 서녕(西寧)으로 파견하여, 옹정제와는 긴밀한 관계가 있는 총독 연갱요(年羹堯)에게 감시하도록 하였다. 9황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밀정에 의해 감시되었고, 그가 14황자나 선교사들과 교류하는 편지를 압수하였다. 당시 크리스트 교에 관심을 가진 9황자가 로마자로 쓴 편지를 적과 내통하는 첩자의 짓이라 하여 옹정제는 9황자를 황족의 신분에서 쫓아낸다. 또한 그를 ‘돼지(사스헤)’라 이름 지었다. 8황자와 9황자는 같은 해 연달아 병사했다.
옹정제의 친형제인 14황자 역시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칭하이 평정이라는 공을 세우고 개선하는 14황자에게 개선행사가 없고, 가정적인 의례로 그를 맞이하지도 않는 옹정에게 “이것이 개선장군을 맞는 예식인가?” 라고 14황자가 분통을 터트리자 옹정은 “그것이 천자를 알현하는 예의인가?” 라고 되받아쳤다. 14황자는 강희제의 산릉을 수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고, 후에 그를 엎고 모반을 일으키려는 야심가들이 나타나자 같은 장소에 유폐되었다.
옹정제가 자기 형제들에게 박해를 가한 것은 특별히 즐겨서 한 일은 아닐 것이다. 때로 가학적으로 보이는 호아제의 집요함은 독재군주제의 특 안에서 군주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을 보인다. 그는 45년간의 궁중 내에서의 더부살이 생활과 수십 명의 황자들이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벌이는 비정한 암투 속에서 8황자와 9황자를 궁지로 내몰 때까지 냉정하게 기다리는 강한 정신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옹정 8년 그는 황위 계승을 위한 이러한 암투를 자식들이 되풀이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라 불리는 방식을 고안한다. 황제가 마음에 둔 후계자를 적어 상자에 넣고, 건청궁의 正大光明 액자 뒤에 두고, 이는 황제가 죽은 다음에 개봉하여 황위 계승자를 발표하도록 했다. 이 방법은 청조 내내 지켜졌고, 그 덕분에 어리석은 천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8,9,14 황자들과는 반대되는 처지의 13황자도 있었다. 그는 옹정과 친형제는 아니나 옹정에게는 헌신적이었고, 옹정제 역시 그를 신임했다. 옹정 8년 13황자인 이친왕이 세상을 떠나자 옹정의 슬픔은 컸고, 이친왕의 이름자를 원래의 胤자로 되돌려 놓으라 명했다. 완전히 신하가 된 형제여야 비로소 독재 군주로부터 형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만주에서 흥기한 청조는 중국에 들어와서 정치 형태 면에서는 차츰 중국화 되었지만 청조 사회에는 아직 만주색이 농후하게 남아 있다. 만주 귀족 중에는 현재의 황실보다도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일가가 있었는데, 수누(蘇努) 일족이 바로 그들이다. 수누는 청 태조 누르하치의 맏아들 추엥(英)의 자손으로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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