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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고초를 겪은 뒤, 그 곳을 떠나 바다를 남하하여 배를 댄 곳은 미추홀이었다. 미추홀이 지금 어디인지 확실히 비정할 수는 없지만 그 동안 정설처럼 믿어왔던 인천은 아니라고 본다. 미추홀에 상륙한 국모 소서노는 두 아들과 신하들을 보내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보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강적만 만나면 남쪽으로 도망치는 비류의 소극적이며 온건한 정책과 이에 비해 젊고 혈기 넘치는 강경파의 온조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여기서 60고개를 바라보는 소서노는 맏이 비류의 편을 들었다. 소서노와 비류왕을 중심으로 한 온건 노장파와 온조를 축으로 삼은 강경 소장파의 틈은 점점 벌어져 갔고, 마침내 태어난 지 10년 밖에 안 되는 나라, 그나마 힘 약한 십제는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온조는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위례성에 분립해 스스로 임금을 자처하며 다시는 어머니와 형의 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후에 비류가 죽자 비류가 세운 미추홀국은 멸망, 그 신하와 백성들은 온조가 세운 십제에 흡수해 비로소 백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Ⅳ. 소서노의 죽음
‘삼국사기’ 온조왕조 13년(서기전 6년)은 “왕모가 61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지금 전해져오는 기록에는 두 아들의 분쟁을 막기 위해 남으로 내려가던 중 온조왕의 측근에 의해 살해 되었다는 암살설과 자연적인 노환으로 인한 사망설이 있다. 확실 하진 않지만 대부분의 역사책에 기록된 자연적 사망설이 유력하다고 본다. 그녀의 죽음 후 도성에서 여러 가지 괴변들이 일어나고, 또 말갈의 침입을 받는 등 백제는 내외로 큰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에 온조왕은 “국모가 세상을 버리는 등 정세가 편안치 못하니 서울을 옮겨야겠다.”라고 말하였다. 61세의 국모사망을 자연적인 노환의 사망으로 보지 않고 나라의 운명과 연결하고 있음은 국모 소서노의 죽음이 온조왕에게는 문론 백제민 전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수난으로 여겨졌기 때인 것이다. 후에 온조왕 17년 4월에 국모묘를 세웠는데, 이것은 소서노를 백제의 창업주이자 지모신이라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 숭배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고사회에서는, 아들에게 있어 어머니는 단순한 혈친을 넘어선 지모신과 같은 신앙의 존재로 여겼다.
※상고사회의 모자관계: 상고사회의 모자관계는 주몽의 건국 설화를 담은‘동명왕편’에 잘 나타나 있다. 지략과 용기가 뛰어난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할 때 어머니 유화부인을 남겨놓고 차마 혼자 떠날 수가 없었다. 아들은 눈물로 떠나기를 주저하였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주저 없이 떠날 것을 강권하였다. 그리고 창업에 필요한 오곡을 챙겨주었다. 어머니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창황히 떠나느라 그만 맥자를 떨어뜨린 채 도망하였다.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고 나무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주몽은 멀리서 날아오는 비둘기를 보았다. 그는 저 비둘기는 내가 잊어버리고 온 맥자를 보내주는 어머니의 사자임을 열감으로 알아 차렸는데, 고대 사회에서 어머니란 아들의 어떤 어려움도 처리해줄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Ⅳ. 소서노의 죽음
‘삼국사기’ 온조왕조 13년(서기전 6년)은 “왕모가 61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지금 전해져오는 기록에는 두 아들의 분쟁을 막기 위해 남으로 내려가던 중 온조왕의 측근에 의해 살해 되었다는 암살설과 자연적인 노환으로 인한 사망설이 있다. 확실 하진 않지만 대부분의 역사책에 기록된 자연적 사망설이 유력하다고 본다. 그녀의 죽음 후 도성에서 여러 가지 괴변들이 일어나고, 또 말갈의 침입을 받는 등 백제는 내외로 큰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에 온조왕은 “국모가 세상을 버리는 등 정세가 편안치 못하니 서울을 옮겨야겠다.”라고 말하였다. 61세의 국모사망을 자연적인 노환의 사망으로 보지 않고 나라의 운명과 연결하고 있음은 국모 소서노의 죽음이 온조왕에게는 문론 백제민 전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수난으로 여겨졌기 때인 것이다. 후에 온조왕 17년 4월에 국모묘를 세웠는데, 이것은 소서노를 백제의 창업주이자 지모신이라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 숭배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고사회에서는, 아들에게 있어 어머니는 단순한 혈친을 넘어선 지모신과 같은 신앙의 존재로 여겼다.
※상고사회의 모자관계: 상고사회의 모자관계는 주몽의 건국 설화를 담은‘동명왕편’에 잘 나타나 있다. 지략과 용기가 뛰어난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할 때 어머니 유화부인을 남겨놓고 차마 혼자 떠날 수가 없었다. 아들은 눈물로 떠나기를 주저하였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주저 없이 떠날 것을 강권하였다. 그리고 창업에 필요한 오곡을 챙겨주었다. 어머니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창황히 떠나느라 그만 맥자를 떨어뜨린 채 도망하였다.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고 나무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주몽은 멀리서 날아오는 비둘기를 보았다. 그는 저 비둘기는 내가 잊어버리고 온 맥자를 보내주는 어머니의 사자임을 열감으로 알아 차렸는데, 고대 사회에서 어머니란 아들의 어떤 어려움도 처리해줄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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