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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申乭石)
신돌석 (申乭石),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 1906년 영해(寧海)에서 의병 3백여 명을 일으켜 진군을 개시하였다. 울진군(蔚珍郡) 평해면(平海面)으로 가서 다시 3천여 명의 의병을 재편하고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접전, 경상도·강원도 일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기습전으로 많은 적을 사살하는 등 가는 곳마다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만큼 명성도 높았다. 1907년 12월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13도의 의병이 연합하기로 하고 양주에 모여들었을 때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자, 의병을 이끌고 영해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일본은 그를 체포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현상금을 탐낸 고종(姑從) 김자성(金子聖)이 일본인에게 매수되어 그를 집으로 초대, 독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형제가 무참히 도끼로 찍어 죽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 신돌석의 생애와 활동
1) 제 1기 소년기(1878~1895)
1878년 11월 3일 축산면 도곡동에서 신석주의 아들로 출생
1891~2년(추정) 상원마을 이중립의 육이당서 1년 가량 한문 수학
2) 제 2기 청년초기(1896~1905)
1896년 김하락 의진과 영해부 공격에 가담
1902년 청주한씨 한재여(1878~1952)와 결혼
1904년 외아들 만이 출생.
월송정에서 시
신돌석 (申乭石),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 1906년 영해(寧海)에서 의병 3백여 명을 일으켜 진군을 개시하였다. 울진군(蔚珍郡) 평해면(平海面)으로 가서 다시 3천여 명의 의병을 재편하고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접전, 경상도·강원도 일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기습전으로 많은 적을 사살하는 등 가는 곳마다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만큼 명성도 높았다. 1907년 12월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13도의 의병이 연합하기로 하고 양주에 모여들었을 때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자, 의병을 이끌고 영해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일본은 그를 체포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현상금을 탐낸 고종(姑從) 김자성(金子聖)이 일본인에게 매수되어 그를 집으로 초대, 독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형제가 무참히 도끼로 찍어 죽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 신돌석의 생애와 활동
1) 제 1기 소년기(1878~1895)
1878년 11월 3일 축산면 도곡동에서 신석주의 아들로 출생
1891~2년(추정) 상원마을 이중립의 육이당서 1년 가량 한문 수학
2) 제 2기 청년초기(1896~1905)
1896년 김하락 의진과 영해부 공격에 가담
1902년 청주한씨 한재여(1878~1952)와 결혼
1904년 외아들 만이 출생.
월송정에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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