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한말 의병전쟁의 배경
2. 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
3. 한말 의병전쟁(乙未義兵)의 시기구분
1) 제1차 의병전쟁
2) 제2차 의병전쟁
4. 갑오. 을미의병(전기의병)
5. 을사의병(중기의병)
6. 정미의병(후기의병) -민족 성전-
7. 의병의 해산과 독립군으로의 전환
참고문헌
2. 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
3. 한말 의병전쟁(乙未義兵)의 시기구분
1) 제1차 의병전쟁
2) 제2차 의병전쟁
4. 갑오. 을미의병(전기의병)
5. 을사의병(중기의병)
6. 정미의병(후기의병) -민족 성전-
7. 의병의 해산과 독립군으로의 전환
참고문헌
본문내용
선유위원이 지속적으로 파송된 것이다. 이들은 군청 소재지의 객사나 시장터 등지에서 면·리장과 주민들을 상대로 선유조칙을 읽고 의병의 해산과 귀순을 권유하였다.
다음으로 의병의 귀순을 적극 장려하였다. 1907년 12월에 '귀순자조례'를 발표하여 일제의 군경기관을 비롯한 행정기관과 선유사와 선유위원 등이 귀순자를 받아들였다. 이는 의병활동이 위축되는 동절기를 이용하여 가능한 많은 귀순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듬해의 의병활동을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전국의 군·면 단위까지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활동을 방지하고 주민과의 연계를 차단하여 의병을 고립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은 군사력을 동원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를 위해 군대와 헌병 및 경찰력을 증강, 배치하였다. 예를 들면 군대의 경우 이미 조선에 배치된 조선주차군의 2개 사단 외에도 1908년 5월에 2개 연대 1,600명을 증파하였으며, 1909년 6월부터 여단 규모의 임시한국파견대가 증강 배치되었다. 또한 헌병대의 경우에도 1907년 10월에 200명의 규모였으나, 다음해 9월에는 6,500명(헌병보조원 포함)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일제의 통감부와 군경기관에서는 밀정이나 정탐을 고용하거나, 정찰대를 조직하여 의병에 관한 제반정보를 수집하였다. 1908년 7월 현재 일제에 고용되어 전국에 파견된 정탐원이 800명이나 되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의병진압과 적정정찰을 목적으로 한 特設巡査隊를 편성하여 의병항쟁이 치열한 지역에 투입시켰다. 특설순사대는 3개 부대로 편성되었는데, 제 1순사대는 강원·경상도, 제 2순사대는 전남, 제 3순사대는 함경도 지역의 의병을 진압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한편 특정지역의 의병이나 특정 의병부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의병학살작전을 실시하였는데, 예를 들면 북구수비관구에서는 1908년 6∼7월에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황해도 의병을 진압하였다. 그 결과 의병 585명이 전사하고 202명 체포되었다. 1908년 12월에는 2주일 예정으로 광주 수비대와 영산포 헌병대를 중심으로 전남 일원의 의병 진압에 나선 적도 있었다. 호남의병을 말살한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 밖에도 일제는 변장대나 경비선을 투입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병을 학살하거나 의병과 관련된 마을을 불태우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 의병들은 주로 황해·경기·강원·함경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1909년 10월부터 1915년 경까지 의병활동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이름을 떨친 의병장으로는 蔡應彦·姜基東·韓貞萬·유인석·임병찬·홍범도·이진룡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일제의 진압을 견디지 못하여 국외로 망명하거나, 잠적하여 비밀결사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연해주나 간도로 망명한 의병장으로는 이진룡과 홍범도 등인데, 이들은 그곳에서 활동중인 李範允·安重根 등과 연합하였다. 1910년 6월에 유인석과 이범윤을 중심으로 의병연합체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13道義軍이다. 13도의군은 연해주와 간도를 비롯한 전국 13도의 의병을 아우르는 통합단체를 표방하였다. 이로써 의병의 중심이 국내에서 국외로 이동되었다.
나아가 연해주와 간도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애국계몽운동가들과 힘을 합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민족교육과 독립군의 양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무장투쟁과 실력양성을 주장하던 양대세력이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향해 통합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은 독립운동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상과 같이 의병전쟁은 1894년에 봉기하여 1915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약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의병들은 불굴의 의지와 투쟁역량을 강화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섰던 것이다. 따라서 의병전쟁은 반침략적 구국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의병전쟁은 평민의병장이 대거 등장한 후에 더욱 활성화됨으로써 반봉건적 성향도 없지 않다. 의병들은 투쟁역량의 강화에 힘을 기울여 근대적인 부대편제와 연합전선의 형성, 장기항전의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다만 의병들은 일제의 군사력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열악한 상태로 투쟁함으로써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의병전쟁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광범한 계층이 호응하고 참여한 민족운동이었다. 따라서 의병전쟁은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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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의병의 귀순을 적극 장려하였다. 1907년 12월에 '귀순자조례'를 발표하여 일제의 군경기관을 비롯한 행정기관과 선유사와 선유위원 등이 귀순자를 받아들였다. 이는 의병활동이 위축되는 동절기를 이용하여 가능한 많은 귀순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듬해의 의병활동을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전국의 군·면 단위까지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활동을 방지하고 주민과의 연계를 차단하여 의병을 고립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은 군사력을 동원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를 위해 군대와 헌병 및 경찰력을 증강, 배치하였다. 예를 들면 군대의 경우 이미 조선에 배치된 조선주차군의 2개 사단 외에도 1908년 5월에 2개 연대 1,600명을 증파하였으며, 1909년 6월부터 여단 규모의 임시한국파견대가 증강 배치되었다. 또한 헌병대의 경우에도 1907년 10월에 200명의 규모였으나, 다음해 9월에는 6,500명(헌병보조원 포함)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일제의 통감부와 군경기관에서는 밀정이나 정탐을 고용하거나, 정찰대를 조직하여 의병에 관한 제반정보를 수집하였다. 1908년 7월 현재 일제에 고용되어 전국에 파견된 정탐원이 800명이나 되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의병진압과 적정정찰을 목적으로 한 特設巡査隊를 편성하여 의병항쟁이 치열한 지역에 투입시켰다. 특설순사대는 3개 부대로 편성되었는데, 제 1순사대는 강원·경상도, 제 2순사대는 전남, 제 3순사대는 함경도 지역의 의병을 진압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한편 특정지역의 의병이나 특정 의병부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의병학살작전을 실시하였는데, 예를 들면 북구수비관구에서는 1908년 6∼7월에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황해도 의병을 진압하였다. 그 결과 의병 585명이 전사하고 202명 체포되었다. 1908년 12월에는 2주일 예정으로 광주 수비대와 영산포 헌병대를 중심으로 전남 일원의 의병 진압에 나선 적도 있었다. 호남의병을 말살한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 밖에도 일제는 변장대나 경비선을 투입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병을 학살하거나 의병과 관련된 마을을 불태우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 의병들은 주로 황해·경기·강원·함경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1909년 10월부터 1915년 경까지 의병활동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이름을 떨친 의병장으로는 蔡應彦·姜基東·韓貞萬·유인석·임병찬·홍범도·이진룡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일제의 진압을 견디지 못하여 국외로 망명하거나, 잠적하여 비밀결사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연해주나 간도로 망명한 의병장으로는 이진룡과 홍범도 등인데, 이들은 그곳에서 활동중인 李範允·安重根 등과 연합하였다. 1910년 6월에 유인석과 이범윤을 중심으로 의병연합체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13道義軍이다. 13도의군은 연해주와 간도를 비롯한 전국 13도의 의병을 아우르는 통합단체를 표방하였다. 이로써 의병의 중심이 국내에서 국외로 이동되었다.
나아가 연해주와 간도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애국계몽운동가들과 힘을 합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민족교육과 독립군의 양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무장투쟁과 실력양성을 주장하던 양대세력이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향해 통합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은 독립운동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상과 같이 의병전쟁은 1894년에 봉기하여 1915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약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의병들은 불굴의 의지와 투쟁역량을 강화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섰던 것이다. 따라서 의병전쟁은 반침략적 구국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의병전쟁은 평민의병장이 대거 등장한 후에 더욱 활성화됨으로써 반봉건적 성향도 없지 않다. 의병들은 투쟁역량의 강화에 힘을 기울여 근대적인 부대편제와 연합전선의 형성, 장기항전의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다만 의병들은 일제의 군사력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열악한 상태로 투쟁함으로써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의병전쟁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광범한 계층이 호응하고 참여한 민족운동이었다. 따라서 의병전쟁은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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