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고 진행되면서 라틴세계는 이슬람과 그 창시자에 대한 정보를 점점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무함마드가 이단적인 그리스도교 수도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전설은 그 후 수백 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나타난다.
무함마드와 이슬람의 탄생에 대한 대중적인 상상은 끝날 줄 몰랐다. 이 전설적인 전통은 모두 새로운 종교를 독창적이고 자생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단적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으로, 그리하여 사이비 종교로 낙인찍으려는 목적을 가졌다.
군사행동 : 십자군과 재정복
- “너희의 모든 재산과 인격을 다해서 신의 길에 헌신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언어적 의미는 모든 저항에 맞서서 신앙을 지키고자 신명을 다해 자신의 길에서 의무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지하드는 이것을 의미한다.
- 서구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 고대의 철학사상에 근거하여 - ‘의로운 전쟁’에 대한 고전적인 가르침을 발전시켰다. 개척자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였다. 이단에 대한 그의 주장의 출발점은 누가복음 14장 23절에 있었다. “큰 길과 울타리 가로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누가는 아마 ‘억지로라도’라는 말을 ‘가장 힘찬 선교적 실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역사가 흐르면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난폭성으로 이어졌다.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십자군의 본래의 종교적인 원동력은 전쟁과 모험심, 피를 보려는 잔인함, 약탈욕, 권력욕 뒤에서 빠르게 퇴색되었다.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사이의 관계도 최악이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새로운 연대가 그 결과였다. 동방교회도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비참해졌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콘스탄티노플에 라틴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분열도 더욱 심해졌다.
제4장 페트루스 베네라빌리스 : 최초의 라틴어역 꾸란의 발안자
보론 : 꾸란의 자기 이해와 주장
- 신실한 무슬림에게 꾸란은 온전한 신의 말씀이며,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단어 하나하나가 무함마드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로써 꾸란은 신적 구술로 여겨지며, 그러므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신적 기원 때문에 꾸란은 오류가 없으며 유일무비하다. 내용에서도 꾸란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늘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에 상응한다. 이슬람의 이해에 따르면, 하늘에 있는 원본의 아랍어판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마지막 계시이다.
- 정통 이슬람에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꾸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 다만, 다른 언어에 의한 의역이나 주석, 혹은 행간의 해설은 허용되었다.
마르틴 루터가 조정에 나섬으로써 결국 1543년 1월 11일에 인쇄본이 공개되었다.
“무함마드나 투르크인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무기를 가지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길은 바로 그들의 꾸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꾸란이 거짓과 꾸며낸 이야기들과 혐오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으며, 형편없이 나쁘고, 불쾌하며, 절망적인 책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되는 데 있다.
제5장 이슬람과 프란치스코회ㆍ도미니코회의 대결
새로운 강조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무슬림에게 이해시키고, 성서적 메시지의 신빙성을 전한다는 의도가 강해진 결과였다.
“불신자들은 신이 세 신 가운데 한분이라고 말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신은 오직 한 분이시다. 만일 그들이 그런 주장을 그치지 않는다면, 그들 불신자는 고통스러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꾸란 5,73)
“그 분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다. 신에게는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아내가 없는데 아이를 어떻게 가질 수 있다는 말이며,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신은(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꾸란6,101)
“그들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신의 아들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웃는다. 왜냐하면 신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자기 아들의 고난 없이도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또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창조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1,3,6-10)
제6장 쿠자누스와 루터의 꾸란 이해 및 비판
무함마드와 그의 정신적 환경에 네스토리아니즘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중동지역에는 네스토리아니즘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시기에 네스토리아니즘은 그리스도교로 인정된 종교였다. 597년 페르시아인들이 아라비아 남부를 공략함으로써 그 지역이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서구 그리스도교로부터 격리되었고, 그래서 네스토리아니즘이 이 지역에서 우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무함마드가 소문으로라도 네스토리아니즘과 접촉하였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꾸란에서도 네스토리우스파적인 요소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사자에 불과하며, 그의 말씀일 뿐이다. 신이 그를 마리아에게 보내셨고, 자기 영을 주셨다.(꾸란 4,171)
꾸란의 용어들이 애초에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무함마드는 자신이 대표하는 엄격한 일신론의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 새로운 의미를 거기에 부여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후손들에게서 신이 보내신 분이 나오도록 간청한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해석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무함마드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마엘을 거쳐 나타난 후손이라는 꾸란의 족보를 간과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신약성서의 전통을 이해의 근거로 삼고 있다.
꾸란에서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꾸란은 신과 인간 사이를 제3자가 매개할 가능성을 일체 부정하기 때문이다. 중재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신 앞에서는 홀로 선다. 아무도 종말의 심판 때에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질 수 없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어떠한 중재자 역할도 꾸란이 엄격하게 거부한다는 사실은 꾸란이 원죄를 부정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구원의 신
무함마드와 이슬람의 탄생에 대한 대중적인 상상은 끝날 줄 몰랐다. 이 전설적인 전통은 모두 새로운 종교를 독창적이고 자생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단적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으로, 그리하여 사이비 종교로 낙인찍으려는 목적을 가졌다.
군사행동 : 십자군과 재정복
- “너희의 모든 재산과 인격을 다해서 신의 길에 헌신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언어적 의미는 모든 저항에 맞서서 신앙을 지키고자 신명을 다해 자신의 길에서 의무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지하드는 이것을 의미한다.
- 서구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 고대의 철학사상에 근거하여 - ‘의로운 전쟁’에 대한 고전적인 가르침을 발전시켰다. 개척자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였다. 이단에 대한 그의 주장의 출발점은 누가복음 14장 23절에 있었다. “큰 길과 울타리 가로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누가는 아마 ‘억지로라도’라는 말을 ‘가장 힘찬 선교적 실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역사가 흐르면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난폭성으로 이어졌다.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십자군의 본래의 종교적인 원동력은 전쟁과 모험심, 피를 보려는 잔인함, 약탈욕, 권력욕 뒤에서 빠르게 퇴색되었다.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사이의 관계도 최악이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새로운 연대가 그 결과였다. 동방교회도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비참해졌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콘스탄티노플에 라틴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분열도 더욱 심해졌다.
제4장 페트루스 베네라빌리스 : 최초의 라틴어역 꾸란의 발안자
보론 : 꾸란의 자기 이해와 주장
- 신실한 무슬림에게 꾸란은 온전한 신의 말씀이며,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단어 하나하나가 무함마드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로써 꾸란은 신적 구술로 여겨지며, 그러므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신적 기원 때문에 꾸란은 오류가 없으며 유일무비하다. 내용에서도 꾸란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늘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에 상응한다. 이슬람의 이해에 따르면, 하늘에 있는 원본의 아랍어판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마지막 계시이다.
- 정통 이슬람에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꾸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 다만, 다른 언어에 의한 의역이나 주석, 혹은 행간의 해설은 허용되었다.
마르틴 루터가 조정에 나섬으로써 결국 1543년 1월 11일에 인쇄본이 공개되었다.
“무함마드나 투르크인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무기를 가지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길은 바로 그들의 꾸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꾸란이 거짓과 꾸며낸 이야기들과 혐오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으며, 형편없이 나쁘고, 불쾌하며, 절망적인 책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되는 데 있다.
제5장 이슬람과 프란치스코회ㆍ도미니코회의 대결
새로운 강조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무슬림에게 이해시키고, 성서적 메시지의 신빙성을 전한다는 의도가 강해진 결과였다.
“불신자들은 신이 세 신 가운데 한분이라고 말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신은 오직 한 분이시다. 만일 그들이 그런 주장을 그치지 않는다면, 그들 불신자는 고통스러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꾸란 5,73)
“그 분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다. 신에게는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아내가 없는데 아이를 어떻게 가질 수 있다는 말이며,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신은(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꾸란6,101)
“그들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신의 아들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웃는다. 왜냐하면 신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자기 아들의 고난 없이도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또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창조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1,3,6-10)
제6장 쿠자누스와 루터의 꾸란 이해 및 비판
무함마드와 그의 정신적 환경에 네스토리아니즘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중동지역에는 네스토리아니즘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시기에 네스토리아니즘은 그리스도교로 인정된 종교였다. 597년 페르시아인들이 아라비아 남부를 공략함으로써 그 지역이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서구 그리스도교로부터 격리되었고, 그래서 네스토리아니즘이 이 지역에서 우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무함마드가 소문으로라도 네스토리아니즘과 접촉하였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꾸란에서도 네스토리우스파적인 요소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사자에 불과하며, 그의 말씀일 뿐이다. 신이 그를 마리아에게 보내셨고, 자기 영을 주셨다.(꾸란 4,171)
꾸란의 용어들이 애초에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무함마드는 자신이 대표하는 엄격한 일신론의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 새로운 의미를 거기에 부여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후손들에게서 신이 보내신 분이 나오도록 간청한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해석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무함마드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마엘을 거쳐 나타난 후손이라는 꾸란의 족보를 간과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신약성서의 전통을 이해의 근거로 삼고 있다.
꾸란에서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꾸란은 신과 인간 사이를 제3자가 매개할 가능성을 일체 부정하기 때문이다. 중재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신 앞에서는 홀로 선다. 아무도 종말의 심판 때에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질 수 없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어떠한 중재자 역할도 꾸란이 엄격하게 거부한다는 사실은 꾸란이 원죄를 부정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구원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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