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제1권 유아기와 소년기
제2권 열여섯 살 되던 때의 청년기 배나무 밑에서
제3권 카르타고의 학생 시절과 마니교
제4권 유혹하고 유혹받으며, 속고 속이는 삶
제5권 마니교의 감독 파우스투스와 기독교의 감독 암브로시우스
제6권 기독교 신앙은 알았으나 세상의 욕망 때문에 고민함
제7권 어거스틴의 지적 회심
제8권 마음의 회심 : 무화과 나무아래서
제9권 어거스틴의 세례와 모니카의 죽음
제10권 기억의 신비
제11권 시간과 기억
제12권 무로부터의 창조, 질료와 형상
제13권 창세기 1장에 대한 은유적 해석
제1권 유아기와 소년기
제2권 열여섯 살 되던 때의 청년기 배나무 밑에서
제3권 카르타고의 학생 시절과 마니교
제4권 유혹하고 유혹받으며, 속고 속이는 삶
제5권 마니교의 감독 파우스투스와 기독교의 감독 암브로시우스
제6권 기독교 신앙은 알았으나 세상의 욕망 때문에 고민함
제7권 어거스틴의 지적 회심
제8권 마음의 회심 : 무화과 나무아래서
제9권 어거스틴의 세례와 모니카의 죽음
제10권 기억의 신비
제11권 시간과 기억
제12권 무로부터의 창조, 질료와 형상
제13권 창세기 1장에 대한 은유적 해석
본문내용
배에 있는데 유아기는 원죄에 대한 고찰, 소년기에는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사회 공교육에 대한 비판이 주된 내용이 된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유아기에 대하여 회상하며 인간의 존재의 근원과 원죄에 대하여 기독교적 관점에서 설명해주고 있는데 성인이 된 자신에게는 유아기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음으로 자신을 길러준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회상하고 유아들을 관찰하여 그 특성을 기록하였다.
인간의 원죄와 유아들의 죄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기들은 죄가 없고 순결하다 생각한다. 아기들은 그 영혼이나 육체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아기들이 사망할 때 이들에 대한 구원 문제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벌어진다. 하지만 어거스틴이 관찰한 유아들은 결코 무죄한 순결한 영혼은 아니었다. 유아들은 자신의 욕구를 위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시(울음이나 기타행동)를 한다. 성인들은 유아들의 이러한 행동이 성장과정에서 없어지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유아들에게도 이미 이러한 욕구가 존재하며 이 욕구가 해결되지 못할 때 그 감정을(화나 분노에 의해) 표현하는 것을 볼 때 유아기에도 이미 인간의 죄 된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예로 유아들이 다른 유아를 질투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모습을 통해 본 유아는 결코 그 마음(영혼)이 순결할 수 없고 단지 육체가 순결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태중의 유아는 죄가 있는 것인가? 이들은 순결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러한 반문에 부딪칠 수 있는데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죄악 중에 잉태되고 어머니 태중에 죄악으로 길러졌으니(시51:5) 인간은 존재의 어느 순간도 죄가 없는 순간이 없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유아에 대한 원죄의 존재를 말하며 존재의 근원이시고 공급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자신이 어머니 태중에 존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셨기 때문이고 부모님을 통한 보살핌과 양육은 하나님이 부모님을 통해 공급하신 채우심이었다고 고백하며 유아기의 회상을 마친다.
유아기의 회상을 지나 어거스틴은 자신의 소년기를 회상한다. 소년기는 배움의 시기로 언어를 습득하고 사회화되어지며 학교를 통한 교육을 받는 시기이다. 어거스틴은 당시 사회의 교육에 대해 자신의 관점과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한다.
당시 사회의 교육문화에 대해 살펴보자. 그 당시 사회는 교육열이 굉장히 높았고 학생에 대한 체벌이 존재하였다. 어거스틴의 기록으로 파악해 보면 학습부진이나 다른 이유로 체벌이 가해질 때 단순한 체벌만이 아닌 조롱과 비웃음까지 학생에게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자녀가 학교에서 체벌을 받았을 시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교육문화가 어떠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강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학생들이 이에 따라오지 못할 시 체벌과 조롱이 가해졌다. 어거스틴은 그러한 체벌을 견디기 힘들어했고 그러한 교육문화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강압적 교육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습득한 라틴어와 교육받은 그리스어를 예로 들어 교육은 자유로운 호기심이 더 효과적임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 잘못된 교육 목표를 지적하고 있다. 부모들의 자녀교육 목표는 오직 자녀가 많이 배워서 사회에서 인정받고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목표가 모두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러한 목표 이면에 명예와 영광에 대한 집착과 재물에 대한 끝없는 욕심을 만족시키려는 인간의 본성이 숨어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로 자신들을 교육하는 교사들의 자질이 문제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기록을 살펴보면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며 체벌한 교사들이 정작 자신들은 노는 것을 즐기며 하찮은 논쟁으로 분 내어 다투는 속 좁은 인물들 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교육 방법, 자질이 부족한 교사에게 교육받는 것 보다 어거스틴이 더 크게 문제 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사회공교육의 내용에 있었다. 당시 교육은 서사시, 신화, 웅변을 가르쳤는데 이 내용들이 사람들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서사시는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자신의 헛된 감정을 추구하게 만든다. 서사시에 감동된 마음은 연극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들로 어거스틴의 감정을 이끌어 갔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 없지만 소설과 연극의 주인공의 슬픔에 눈물 흘렸던 자신의 소년기를 회개한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감정을 추구하게 된 것은 사회교육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신화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더 큰 영적 문제를 가져다주었다. 일단 신화 자체가 거짓의 허구의 이야기 이다. 교육자들은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가르치며 그렇게 교육받은 학생들에게 죄에 대한 그릇된 오류의 싹이 심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도덕적이거나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인간의 죄악 된 습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신화를 교육받은 사람들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 신들처럼 죄를 지은 것으로 생각하게 됨으로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된다. 자신들도 신들처럼 되를 지은 것임으로 죄에 대하여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없어지고 그 죄책감을 전가하고 희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죄의 고민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본성 자체를 차단하는 영적 질병을 발생시키게 된다.
또한 웅변교육은 그 교육 목표가 명예를 추구하고 헛된 부를 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대적자에게 상처를 주고 사회생활에 큰 타격을 주어도 개의치 않는다. 웅변교육의 목표는 이러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웅변을 배우는 교육과정 내에서 허구의 이야기나 모방과 지어내는 이야기를 사용하여도 아무도 제제하지 않는다. 이렇게 교육받고 성장한 소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웅변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교육을 통해 소년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쾌락과 명예와 부를
어거스틴은 자신의 유아기에 대하여 회상하며 인간의 존재의 근원과 원죄에 대하여 기독교적 관점에서 설명해주고 있는데 성인이 된 자신에게는 유아기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음으로 자신을 길러준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회상하고 유아들을 관찰하여 그 특성을 기록하였다.
인간의 원죄와 유아들의 죄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기들은 죄가 없고 순결하다 생각한다. 아기들은 그 영혼이나 육체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아기들이 사망할 때 이들에 대한 구원 문제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벌어진다. 하지만 어거스틴이 관찰한 유아들은 결코 무죄한 순결한 영혼은 아니었다. 유아들은 자신의 욕구를 위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시(울음이나 기타행동)를 한다. 성인들은 유아들의 이러한 행동이 성장과정에서 없어지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유아들에게도 이미 이러한 욕구가 존재하며 이 욕구가 해결되지 못할 때 그 감정을(화나 분노에 의해) 표현하는 것을 볼 때 유아기에도 이미 인간의 죄 된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예로 유아들이 다른 유아를 질투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모습을 통해 본 유아는 결코 그 마음(영혼)이 순결할 수 없고 단지 육체가 순결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태중의 유아는 죄가 있는 것인가? 이들은 순결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러한 반문에 부딪칠 수 있는데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죄악 중에 잉태되고 어머니 태중에 죄악으로 길러졌으니(시51:5) 인간은 존재의 어느 순간도 죄가 없는 순간이 없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유아에 대한 원죄의 존재를 말하며 존재의 근원이시고 공급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자신이 어머니 태중에 존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셨기 때문이고 부모님을 통한 보살핌과 양육은 하나님이 부모님을 통해 공급하신 채우심이었다고 고백하며 유아기의 회상을 마친다.
유아기의 회상을 지나 어거스틴은 자신의 소년기를 회상한다. 소년기는 배움의 시기로 언어를 습득하고 사회화되어지며 학교를 통한 교육을 받는 시기이다. 어거스틴은 당시 사회의 교육에 대해 자신의 관점과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한다.
당시 사회의 교육문화에 대해 살펴보자. 그 당시 사회는 교육열이 굉장히 높았고 학생에 대한 체벌이 존재하였다. 어거스틴의 기록으로 파악해 보면 학습부진이나 다른 이유로 체벌이 가해질 때 단순한 체벌만이 아닌 조롱과 비웃음까지 학생에게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자녀가 학교에서 체벌을 받았을 시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교육문화가 어떠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강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학생들이 이에 따라오지 못할 시 체벌과 조롱이 가해졌다. 어거스틴은 그러한 체벌을 견디기 힘들어했고 그러한 교육문화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강압적 교육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습득한 라틴어와 교육받은 그리스어를 예로 들어 교육은 자유로운 호기심이 더 효과적임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 잘못된 교육 목표를 지적하고 있다. 부모들의 자녀교육 목표는 오직 자녀가 많이 배워서 사회에서 인정받고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목표가 모두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러한 목표 이면에 명예와 영광에 대한 집착과 재물에 대한 끝없는 욕심을 만족시키려는 인간의 본성이 숨어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로 자신들을 교육하는 교사들의 자질이 문제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기록을 살펴보면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며 체벌한 교사들이 정작 자신들은 노는 것을 즐기며 하찮은 논쟁으로 분 내어 다투는 속 좁은 인물들 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교육 방법, 자질이 부족한 교사에게 교육받는 것 보다 어거스틴이 더 크게 문제 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사회공교육의 내용에 있었다. 당시 교육은 서사시, 신화, 웅변을 가르쳤는데 이 내용들이 사람들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서사시는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자신의 헛된 감정을 추구하게 만든다. 서사시에 감동된 마음은 연극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들로 어거스틴의 감정을 이끌어 갔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 없지만 소설과 연극의 주인공의 슬픔에 눈물 흘렸던 자신의 소년기를 회개한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감정을 추구하게 된 것은 사회교육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신화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더 큰 영적 문제를 가져다주었다. 일단 신화 자체가 거짓의 허구의 이야기 이다. 교육자들은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가르치며 그렇게 교육받은 학생들에게 죄에 대한 그릇된 오류의 싹이 심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도덕적이거나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인간의 죄악 된 습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신화를 교육받은 사람들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 신들처럼 죄를 지은 것으로 생각하게 됨으로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된다. 자신들도 신들처럼 되를 지은 것임으로 죄에 대하여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없어지고 그 죄책감을 전가하고 희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죄의 고민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본성 자체를 차단하는 영적 질병을 발생시키게 된다.
또한 웅변교육은 그 교육 목표가 명예를 추구하고 헛된 부를 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대적자에게 상처를 주고 사회생활에 큰 타격을 주어도 개의치 않는다. 웅변교육의 목표는 이러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웅변을 배우는 교육과정 내에서 허구의 이야기나 모방과 지어내는 이야기를 사용하여도 아무도 제제하지 않는다. 이렇게 교육받고 성장한 소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웅변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교육을 통해 소년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쾌락과 명예와 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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