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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부 서장
1장 한국전쟁사의 역사
1. 정치적 논쟁과 공식 전쟁사
2. 여러 가설의 제출과 미궁
3. 미국 자료의 공개와 수정주의의 확산
4. 러시아 자료의 공개와 새로운 연구 경향
2장 전쟁의 개전 ․ 성격 ․ 형성
1. 개전을 둘러싼 논쟁의 해결
2. 전쟁의 성격 : 내쟁(內爭)같은 국제전쟁 ․ 외전(外戰)같은 동족전쟁
3. 전쟁의 형성
Ⅲ부 남북의 정치군사적 갈등과 38선 충돌
1. 정부수립 후 남북한의 적개심과 적대적 동화
1. 1948년의 동력학과 남북의 적대의식
<과도기로서의 1948년>
<폭풍 :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
<1948년의 동력학>
2. 남북한의 적대적 동화와 38선 충돌
<최고 지휘부의 적개심>
<군사 지도자들의 오해와 증오>
2. 무장충돌의 발화와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 구상 (1949.2 ~ 1949.4)
1. 1949년 38선 충돌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
2. 무장 충돌의 방화와 정치적 배경
<진지 구축과 주요 충돌 지점>
<유엔한국위원단의 방한과 기사문리․고산봉전투>
<‘해주의거’ 사건>
3. 공산주의 삼각동맹과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구상
<스탈린의 결정: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과 조소 군사원조협정>
<중공의 동의와 한인부대의 입북>
<북한의 병력․무장 강화>
4. 북한의 옹진 점령 계획과 9월 공세 (1949. 8 ~ 1949. 10)
1. 북한의 공격 노선 전환과 옹진 점령 계획
<옹진 제2차 충돌과 북한의 옹진 점령 시도>
<8월의 북한: 공격 노선으로 급격히 전환>
2. 9월의 소련: 대남공격 가능성 검토와 노선 전환
3. 북한의 9월 공세설
4. 은파산전투(옹진 3차 충돌)와 연대급 38선 충돌의 종식
5. 소규모 충돌의 지속과 북한의 공격형 군사력 완비
1. 정찰 과정에서의 소규모 충돌 지속
<고요가 깃든 38선>
<1950년 5월 : 북한의 38선 충돌 과장>
2. 북한의 공격형 군사력 완비
<정규군 병력·무장의 강화>
<제2전선 구축과 유격대 남파>
Ⅳ부 개전의 결정·공격 계획의 수립·초기 전투
3. 개전 초기 옹진 전투Ⅰ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주장
1. 내무성의 북침 · 반공격 보도
2. 포로들의 ‘북침’ 증언 검토
3. 옹진전투 승리의 진실
Ⅴ부 에필로그
1. ‘불의의 기습남침’과 ‘정보의 실패’
1. 만연한 북한의 침공 정보
2. 정보의 실패 : 잘못된 가정과 정보판단
3. 진정한 ‘불의의 기습남침’
2. 미혹된 진실 : ‘해주점령설’의 재검토
1. 한국의 설명 : 오보와 과장
2. 미극동군사령부 정보 자료의 혼란
3. 유도는 있었는가?
3. 혼돈 속의 진격 : 북한군의 실상과 허상
1. 공격사단들의 실상
2. 혼돈 속의 진격
1장 한국전쟁사의 역사
1. 정치적 논쟁과 공식 전쟁사
2. 여러 가설의 제출과 미궁
3. 미국 자료의 공개와 수정주의의 확산
4. 러시아 자료의 공개와 새로운 연구 경향
2장 전쟁의 개전 ․ 성격 ․ 형성
1. 개전을 둘러싼 논쟁의 해결
2. 전쟁의 성격 : 내쟁(內爭)같은 국제전쟁 ․ 외전(外戰)같은 동족전쟁
3. 전쟁의 형성
Ⅲ부 남북의 정치군사적 갈등과 38선 충돌
1. 정부수립 후 남북한의 적개심과 적대적 동화
1. 1948년의 동력학과 남북의 적대의식
<과도기로서의 1948년>
<폭풍 :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
<1948년의 동력학>
2. 남북한의 적대적 동화와 38선 충돌
<최고 지휘부의 적개심>
<군사 지도자들의 오해와 증오>
2. 무장충돌의 발화와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 구상 (1949.2 ~ 1949.4)
1. 1949년 38선 충돌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
2. 무장 충돌의 방화와 정치적 배경
<진지 구축과 주요 충돌 지점>
<유엔한국위원단의 방한과 기사문리․고산봉전투>
<‘해주의거’ 사건>
3. 공산주의 삼각동맹과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구상
<스탈린의 결정: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과 조소 군사원조협정>
<중공의 동의와 한인부대의 입북>
<북한의 병력․무장 강화>
4. 북한의 옹진 점령 계획과 9월 공세 (1949. 8 ~ 1949. 10)
1. 북한의 공격 노선 전환과 옹진 점령 계획
<옹진 제2차 충돌과 북한의 옹진 점령 시도>
<8월의 북한: 공격 노선으로 급격히 전환>
2. 9월의 소련: 대남공격 가능성 검토와 노선 전환
3. 북한의 9월 공세설
4. 은파산전투(옹진 3차 충돌)와 연대급 38선 충돌의 종식
5. 소규모 충돌의 지속과 북한의 공격형 군사력 완비
1. 정찰 과정에서의 소규모 충돌 지속
<고요가 깃든 38선>
<1950년 5월 : 북한의 38선 충돌 과장>
2. 북한의 공격형 군사력 완비
<정규군 병력·무장의 강화>
<제2전선 구축과 유격대 남파>
Ⅳ부 개전의 결정·공격 계획의 수립·초기 전투
3. 개전 초기 옹진 전투Ⅰ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주장
1. 내무성의 북침 · 반공격 보도
2. 포로들의 ‘북침’ 증언 검토
3. 옹진전투 승리의 진실
Ⅴ부 에필로그
1. ‘불의의 기습남침’과 ‘정보의 실패’
1. 만연한 북한의 침공 정보
2. 정보의 실패 : 잘못된 가정과 정보판단
3. 진정한 ‘불의의 기습남침’
2. 미혹된 진실 : ‘해주점령설’의 재검토
1. 한국의 설명 : 오보와 과장
2. 미극동군사령부 정보 자료의 혼란
3. 유도는 있었는가?
3. 혼돈 속의 진격 : 북한군의 실상과 허상
1. 공격사단들의 실상
2. 혼돈 속의 진격
본문내용
보고에 주요하게 등장한 지역은 죽천 방면, 연백 방면, 장풍 방면, 양구 방면, 양양 방면이었는데, 죽천-연백-장풍의 38선 이남 대안은 옹진-청단-개성으로 38선 충돌이 가장 격렬했던 지역이며, 양구의 38선 이남 대안은 춘천, 양양의 38선 이남 대안은 주문진으로 역시 38선 충돌이 격렬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전보고를 배부받을 수 있는 자격이 수상 김일성, 내무상 박일우, 고문, 즉 소련군사고문 등 3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현재 이같은 소규모 충돌이 누가 주도적으로 공격해서 기인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50년 상반기 충돌의 횟수가 증가한 것은 49년도와 같이 한국군의 공세적 태도 때문일 가능성이 있지만, 앞의 작전보고에서도 드러나듯이, 북한군 역시 38선 충돌의 절반 이상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충돌의 주도자와 원인에 대해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고 판단을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이 시점에서 조·중·소의 대남 전면공격이 결정되었고, 49년 초 스탈린이 교시한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은 본격적으로 작전 계획 수립단계에 돌입했다. 이와 때를 맞춰 북한은 돌연 한국을 침략자로 공격하는 대대적 선전작업을 개시했다.
<1950년 5월 : 북한의 38선 충돌 과장>
1950년 1월부터 6월까지 북한의 언론매체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는데 5월 18일 내무상 박일우가 기자회견을 통해 5월 7~10일 남한정부가 유엔한위를 초청해 한국군이 38연선에 집중되었고, 북한군을 공격할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고 설명했다고 비난했다. 그의 기자회견은 1949년과 마찬가지로 유엔한위에 대한 북한측의 적대적인 태도를 재확인하는 가능성과 한국전쟁 개전을 위한 북한의 명분 축적용 보도였을 거라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북한측 주장을 따른다 하더라도 50년 봄부터 6월까지, 남한측은 적어도 49년처럼 대규모로 포격하거나 38선 이북으로 밀고 올라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1950년 로동신문에서 북측은 50년 5~6월의 38선 충돌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남한의 침략 의도를 흥분한 어조로 과장하였다. 특히 50년 6월 25일자 로동신문에서 1면의 헤드라인은 교통 부문 지도 일꾼들에게 국기훈장 2,3급을 수여한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여기에 따르면, 옹진에서 북한 지역을 향해 6월 23~24일에 700발의 박격포·곡사포를 발사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빙성 없는 보도는 개전 성명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과장된, 한국군의 38선 이북 공격 보도는 오히려 이 보도가 잘 짜인 선전 계획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었다. 그러한 선전의 초점은 개전의 위장 명분이 된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을 위해서 ‘도발자·침략자로서의 남한군’과 ‘피침략자로서의 북한군’이 대비되어야 했기에 언론상 과장하였던 것이고, 북한은 ‘도발’받을 구체적 지역들을 집중적으로 거론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제 모든 위장과 책임을 한국군에게 떠넘길 수 있는 상황과 구도가 완벽하게 갖춰졌다.
2. 북한의 공격형 군사력 완비
<정규군 병력·무장의 강화>
1950년 들어 북한은 인민군의 무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북한 정부는 소련정부에 보내는 49년 12월 29일자 각서에서 약 1억 1,200만 루블러치의 무기, 탄약, 부품을 50년에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50년 3월 9일 북한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각서를 내각수상 김일성 명의로 소련정부에 전달했다. 내용은 1억2천만~3천만 루블어치의 군수품을 소련에서 차관으로 공급받고, 50년 내로 금 9톤, 은 40톤, 모나자이트 정광 1만 5000톤, 합계 1억 3805만 500루블을 상환할 예정이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3월 17일 김일성의 요청에 동의한다고 회신했다.
1950년 들어 인민군의 병력 수도 급증세를 보였다. 1월 8일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사령관 린뱌오는 마오쩌둥 명의의 전문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이 전문에서 린뱌오는 인민해방군 4개 대대 27개 중대 9개 소대로 구성된 1만 6000명 이상의 한인이 있으며, 이 중에는 2명의 사단장을 포함해 5명의 대령, 87명의 대대장급 지휘관, 598명의 중대장급 지휘관, 1400명의 소대장, 1900명의 분대장급 지휘관이 있다고 밝힌다. 린뱌오의 전분을 받은 소령정부는 곧바로 슈티코프에게 김일성을 만나 북한정부의 태도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다음날인 1월 9일, 김일성과 슈티코프는 중공군 내 한인병력의 이동 문제와 관련해 회담을 가졌다.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입북시킬 지휘관·장교의 숫자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고, 한인병력의 이동과 관련된 협의를 위해 조만간 대표자 3명을 중국에 파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들 병력의 입북은 아주 신속하게 추진되었는데, 김일성은 50년 1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김광협 등을 중국에 파견해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내 한인부대의 인도 교섭을 벌였다.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대리 섭영진의 회고에 따르면 김광협 등은 인민해방군 내 1만 4000명의 한적병사들의 인도를 요구했다. 당시 조선의용군 5지대가 성장한 길동보안군 제15단, 16단은 중국인과 혼성으로, 제4야전군 43군 156사와 제4야전군 47군 141사로 변모해 있었다. 또한 별도로 편성된 독립연대가 인민군에 편입되어, 제4사단 제 18보병연대가 되었다.
종합적으로 북한은 1950년에 들어서만 12사단 1만 4000명과 4사단 제 18연대 3000명 등 총 1만 7000명의 중국인민해방군 내 한인병사를 흡수했다. 이들은 북한인민군의 병력 수와 질적 수준을 제고시켰다. 1950년 5월 현재 북한군은 10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소련으로부터 이양받은 군수물자로 이들을 무장시킨 상태였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북한군은 편입된 중국군 내 한인병사들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전을 서둘렀다고 볼 수 있다. 아마 북한군이 초기 개전 이후 혼란을 겪게 되는 배경에는 이 점도 중요한 내부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제2전선 구축과 유격대 남파>
정규 무력의 강화와 함께 제2전선 구축 및 남한사회 혼란을 위한 유격대 남파가 지
현재 이같은 소규모 충돌이 누가 주도적으로 공격해서 기인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50년 상반기 충돌의 횟수가 증가한 것은 49년도와 같이 한국군의 공세적 태도 때문일 가능성이 있지만, 앞의 작전보고에서도 드러나듯이, 북한군 역시 38선 충돌의 절반 이상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충돌의 주도자와 원인에 대해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고 판단을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이 시점에서 조·중·소의 대남 전면공격이 결정되었고, 49년 초 스탈린이 교시한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은 본격적으로 작전 계획 수립단계에 돌입했다. 이와 때를 맞춰 북한은 돌연 한국을 침략자로 공격하는 대대적 선전작업을 개시했다.
<1950년 5월 : 북한의 38선 충돌 과장>
1950년 1월부터 6월까지 북한의 언론매체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는데 5월 18일 내무상 박일우가 기자회견을 통해 5월 7~10일 남한정부가 유엔한위를 초청해 한국군이 38연선에 집중되었고, 북한군을 공격할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고 설명했다고 비난했다. 그의 기자회견은 1949년과 마찬가지로 유엔한위에 대한 북한측의 적대적인 태도를 재확인하는 가능성과 한국전쟁 개전을 위한 북한의 명분 축적용 보도였을 거라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북한측 주장을 따른다 하더라도 50년 봄부터 6월까지, 남한측은 적어도 49년처럼 대규모로 포격하거나 38선 이북으로 밀고 올라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1950년 로동신문에서 북측은 50년 5~6월의 38선 충돌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남한의 침략 의도를 흥분한 어조로 과장하였다. 특히 50년 6월 25일자 로동신문에서 1면의 헤드라인은 교통 부문 지도 일꾼들에게 국기훈장 2,3급을 수여한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여기에 따르면, 옹진에서 북한 지역을 향해 6월 23~24일에 700발의 박격포·곡사포를 발사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빙성 없는 보도는 개전 성명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과장된, 한국군의 38선 이북 공격 보도는 오히려 이 보도가 잘 짜인 선전 계획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었다. 그러한 선전의 초점은 개전의 위장 명분이 된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을 위해서 ‘도발자·침략자로서의 남한군’과 ‘피침략자로서의 북한군’이 대비되어야 했기에 언론상 과장하였던 것이고, 북한은 ‘도발’받을 구체적 지역들을 집중적으로 거론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제 모든 위장과 책임을 한국군에게 떠넘길 수 있는 상황과 구도가 완벽하게 갖춰졌다.
2. 북한의 공격형 군사력 완비
<정규군 병력·무장의 강화>
1950년 들어 북한은 인민군의 무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북한 정부는 소련정부에 보내는 49년 12월 29일자 각서에서 약 1억 1,200만 루블러치의 무기, 탄약, 부품을 50년에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50년 3월 9일 북한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각서를 내각수상 김일성 명의로 소련정부에 전달했다. 내용은 1억2천만~3천만 루블어치의 군수품을 소련에서 차관으로 공급받고, 50년 내로 금 9톤, 은 40톤, 모나자이트 정광 1만 5000톤, 합계 1억 3805만 500루블을 상환할 예정이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3월 17일 김일성의 요청에 동의한다고 회신했다.
1950년 들어 인민군의 병력 수도 급증세를 보였다. 1월 8일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사령관 린뱌오는 마오쩌둥 명의의 전문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이 전문에서 린뱌오는 인민해방군 4개 대대 27개 중대 9개 소대로 구성된 1만 6000명 이상의 한인이 있으며, 이 중에는 2명의 사단장을 포함해 5명의 대령, 87명의 대대장급 지휘관, 598명의 중대장급 지휘관, 1400명의 소대장, 1900명의 분대장급 지휘관이 있다고 밝힌다. 린뱌오의 전분을 받은 소령정부는 곧바로 슈티코프에게 김일성을 만나 북한정부의 태도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다음날인 1월 9일, 김일성과 슈티코프는 중공군 내 한인병력의 이동 문제와 관련해 회담을 가졌다.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입북시킬 지휘관·장교의 숫자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고, 한인병력의 이동과 관련된 협의를 위해 조만간 대표자 3명을 중국에 파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들 병력의 입북은 아주 신속하게 추진되었는데, 김일성은 50년 1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김광협 등을 중국에 파견해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내 한인부대의 인도 교섭을 벌였다.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대리 섭영진의 회고에 따르면 김광협 등은 인민해방군 내 1만 4000명의 한적병사들의 인도를 요구했다. 당시 조선의용군 5지대가 성장한 길동보안군 제15단, 16단은 중국인과 혼성으로, 제4야전군 43군 156사와 제4야전군 47군 141사로 변모해 있었다. 또한 별도로 편성된 독립연대가 인민군에 편입되어, 제4사단 제 18보병연대가 되었다.
종합적으로 북한은 1950년에 들어서만 12사단 1만 4000명과 4사단 제 18연대 3000명 등 총 1만 7000명의 중국인민해방군 내 한인병사를 흡수했다. 이들은 북한인민군의 병력 수와 질적 수준을 제고시켰다. 1950년 5월 현재 북한군은 10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소련으로부터 이양받은 군수물자로 이들을 무장시킨 상태였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북한군은 편입된 중국군 내 한인병사들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전을 서둘렀다고 볼 수 있다. 아마 북한군이 초기 개전 이후 혼란을 겪게 되는 배경에는 이 점도 중요한 내부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제2전선 구축과 유격대 남파>
정규 무력의 강화와 함께 제2전선 구축 및 남한사회 혼란을 위한 유격대 남파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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